〈 500화 〉 500. 신수 대전(1)
* * *
아르티아의 기사단원들과 교전을 펼치고 있는 백귀들과의 싸움은 너무나도 쉽게 기사들 쪽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애초에 구미호가 소환하는 아홉 개체의 백귀들과 오르타스가 소환한 대량의 백귀들은 질적으로 틀리다.
개인이 조종할 수 있는 수준의 한계를 100이라고 보았을 때, 11정도의 전력을 보유한 강력한 영혼 아홉 개체와 계약을 맺어 100이라는 한도를 채운 구미호와 달리, 오르타스의 백귀들은 1도 안 되는 수준의 전사들을 다수 계약으로 맺어 100이라는 한도를 채운 것에 불과하다.
신수의 힘을 조작하는 감각 자체를 익힐 수 없었던 오르타스는 구미호가 구현했던 능력 일부를 어떻게든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고, 질보다 양을 우선하는 식으로 ‘백귀야행’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백귀들은 엘레노아의 축복을 받은 아르티아의 기사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후우….”
마지막 백귀를 처리했던 아르티아의 기사단원은 거칠었던 숨을 고르게 쉬었다.
콰아앙!
“큭!?”
이윽고 대기를 진동시키는 강력한 소음을 접하여 소란이 일고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관전하며, 아르티아의 기사단원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단원들 또한,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이 싸움을 관전하고 있었다.
파지직!
뇌전을 두른 한줄기의 섬광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요호의 공격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허공을 내려찍는 요호의 앞발이 그대로 바닥을 분쇄하며 지면이 거칠게 진동했고, 제라드는 아주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요호의 품에 파고들어 다시 한번 급소에 강력한 뇌광이 담겨있는 단검을 찔러넣었다.
크르륵!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부르르 떨던 요호가 또 한 번 감전의 상태에 걸렸지만, 처음 아픈 맛을 보았던 요호는 곧바로 제라드의 공격에 대응했다.
곧바로 마력을 활성화하여 제라드의 단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기린의 강렬한 뇌전을 중화시켰다.
빠르게 감전 상태에서 벗어난 요호가 다시 움직임을 개시하자, 제라드는 단검을 뽑고 곧장 거리를 벌렸다.
크르르!
“쯧.”
제라드는 생각보다 빠르게 대응을 하기 시작한 구미호의 모습에 혀를 찼다.
성장을 했다지만, 신수 구미호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이 요호는 그렇게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 만들어진 빈틈을 노린 리오드가 또 한 번 검기를 날렸지만, 이미 제라드의 교란 속에서 만들어진 빈틈을 정확히 포착하여 날아오는 검기 또한 두 번이나 당해보았던 만큼 요호의 대응은 빨랐다.
요호는 거구의 전신을 한차례 회전하여 백은색의 아홉 꼬리를 휘둘렀다.
아홉 꼬리에 두르고 있던 마력으로 만들어진 거친 돌풍이 일어 충돌한 리오드의 검기를 중화시켰고 요호가 돌풍과 검기가 충돌한 곳을 향해 돌진했다.
위력이 약해진 검기를 요호가 그냥 맨몸으로 받아냄과 동시에 충돌로 인해 생겨난 먼지 바람을 뚫고 리오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륵!
자신의 가죽과 살갗을 사정없이 찢어버렸던 강력한 검기를 날렸던 리오드를 응시하며 으르렁거렸던 구미호가 앞발을 들어 올려 리오드의 몸을 찌그러뜨릴 기세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아버지…!”
멀찍이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에이라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창 치열한 전투를 이어가던 리오드는 딸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공적인 장소에서는 단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딸에게 그것을 바라는 것도 너무 과한 것일까.
나중에 주의를 시키자고 생각을 하면서, 리오드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짓뭉개기 위해 내려오는 거대한 앞발을 응시했다.
아주 천천히 시간이 느려지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순간은 몇 초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
20년 전이였다면 이 상황에서 가장 앞에서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내 주었던 것은 레이넌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없으며,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그와 연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녀석은 이렇게 했었지.’
리오드는 천천히 은현의 검을 떠올렸다.
자세를 낮추고 검을 꽉 쥐고는 그의 자세를 떠올리며 재현했다.
계속해서 반복하여 숙련을 시키고 점점 완성도를 높여간, 시에테에게서 전수 받은 은현의 검술은 현재 왕국 내부에서 검의 정점에 서 있는 리오드가 보아도 굉장히 훌륭했다.
지금 자신의 수준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만들어내고 정립시킨 것 이외의 검술을 보고 참고하며 자신의 검에 접목하길 반복했다.
리오드는 지금도 한창 점점 성장해가고 있었다.
[올리비온 검술]
[매화 베기]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깔끔한 세로 베기가 요호의 거대한 앞발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 ◆ ◆
아우우우!
하늘 위로 포효하여 울려 퍼지는 요호의 울음소리는 먼 거리에 있는 구미호와 오르타스에게도 들렸다.
콰아앙!
하지만 그 소리를 신경 쓸 새도 없었던 둘의 치열한 공방전은 조금씩 한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신체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인간의 경계를 초월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오르타스에게도 밀리지 않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마력을 공급받는 오르타스와 보유하고 있는 마력만을 사용하여 전투에 임해야 하는 명확한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누가 더 우세해지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하다.
대량의 마력이 소모되는 대규모의 광역 기술은 오르타스를 상대로 효율이 높지 않다고 생각한 구미호는 오르타스를 상대로 신체 강화를 이용한 체술을 구사하고 있었으나, 그 또한 한계가 존재했다.
“크…윽!”
오르타스의 품에 파고들어, 얼굴에 주먹을 가격하려 했으나 오르타스는 고개를 비틀어 주먹을 피해내고 구미호의 복부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튕겨 나간 구미호가 작게 신음하며 바닥에 쓸리면서도 급하게 자세를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졌다고?”
검을 들어 올려 구미호를 겨누던 오르타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구미호를 보며 비웃었다.
“진 건 너희다.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해. 지금이라도 나와 함께….”
“미호야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구미호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고, 설득하려 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한 여성의 힘찬 목소리가 오르타스의 말을 끊었다.
“이 목소리는….”
구미호는 땅을 박차고 뛰어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굳히며 오르타스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저 미숙한 것이 어째서….”
먼 곳에서 빠른 속도로 질주해오고 있던 에린은 구미호와 대치하여 그녀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오르타스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신수의 마력을 개방했다.
요동치는 마력이 체내를 순환하여 활성화하고 폭발적으로 증가한 신체 능력의 상승을 질주하고 있는 양쪽 다리에 집중한다.
‘더 빠르게!’
은현과 제라드의 기술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그것을 따라 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했던 에린은 아주 짧은 찰나 그것을 완성했다.
[주현성 극원류]
[이형환위(????)]
땅을 박찬 에린의 모습이 순간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오르타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공간이동이 아닌, 신체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잔상을 남길 정도로 고속으로 이동하는 보법.
당연히 폭발적으로 붙어있는 가속도는 그대로 놀라운 위력을 자랑한다.
에린이 노리는 것은 사람의 급소인 심장이 위치한 왼쪽 가슴이다.
[갤러해드 세검술]
[질풍사(?風?)]
두 눈으로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극한의 찌르기는 그 어떤 때보다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그녀에게 세검술의 기초를 가르쳤던 백귀, 갤러해드조차도 이것을 보았다면 경탄을 터뜨릴 정도.
카아앙!
하지만 오르타스는 이형환위와 연계된 에린의 찌르기를 완벽하게 쳐냈다.
위로 튕겨 나가는 레이피어의 모습을 확인하고 에린은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이번에 나 진짜로 잘했는데!’
이 자리에서 은현이 보았다면 아주 훌륭했다고 머리를 백번은 쓰다듬어주었을 만큼 확신이 있었는데, 자신의 그 찌르기가 너무나도 깔끔하게 막혀버린 것에 경악했고, 그 이후에 몰려오는 감정은 짜증이다.
“…이이!”
분함을 삼키며 에린은 구미호 쪽으로 점프하여 몸을 뺐다.
“그래. 네가 있었지.”
오르타스는 담담이 에린을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구미호와 마찬가지고 아홉 꼬리가 달린 수인 여성으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오르타스의 시선에 에린이 꺼림칙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오르타스의 시선보다도,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경계의 태세를 풀지 않으면서 천천히 구미호의 옆에 서며 그녀의 상태를 곁눈질로 살폈다.
“미호야. 괜찮아?”
“이 미숙한 것! 도대체 여기는 왜 온 것이냐!”
“너가 걱정됐으니까 온 게 당연하잖아!”
“아직도 미숙한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정면에 오르타스를 계속 응시하면서, 에린은 웃으며 반박했다.
“흥! 지금도 살짝 밀리고 있었으면서, 솔직히 말해. 내가 와서 조금은 다행이지?”
“시끄럽다!”
지금까지 아슬아슬했던 균형이 무너지면서 조금씩 밀리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구미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신수로서 햇병아리에 불과한 에린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이, 몹시 자존심이 상하여 죽어도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에린의 개입과 구미호와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사이, 오르타스가 멀찍이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어 에린에게 말을 걸었다.
“미호와 함께 너 또한 나에게 와라.”
“…뭐?”
에린은 느닷없는 제안에 구미호에게서 고개를 돌려 오르타스를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기다리자, 오르타스가 재차 말했다.
“너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신수의 힘을 이어받은 훌륭한 자질을 지닌 자. 나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너를 왕비로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
에린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마수 범람 사태가 벌어졌었던 모그라프령 사건 때부터 파악해둬 눈여겨보고 있었다.
오르타스의 목적은 좀 더 완벽한 육체의 그릇을 만들어내어 그 그릇에 자신의 영혼을 정착시키고 반영구적인 영생을 누리며 페르니아스 왕국을 통치하는 것.
그런 그의 관점에서 보면, 신수의 힘을 가지고 있는 에린과 자신의 피가 합쳐진다면.
신수의 힘은 물론 여우 구슬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리스크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육체를 가진 아기가 만들어진다.
계속해서 수명이 짧아지는 리스크를 짊어지며 몇백 년 동안 그릇을 옮겨 다닌 오르타스로서 에린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관계에 사랑이나 애정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오르타스와 구미호의 과거와 지금까지의 행적을 모두 들은 에린이 손에 쥐고 있던 레이피어를 꽉 쥐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머리가 나쁜 에린이라도 저 제안 속에서 자신을 그저 오르타스의 새로운 육체가 될 아기를 낳기 위한 씨받이로밖에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미숙한 것?”
에린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구미호가 조심스레 에린을 불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뭐, 뭐 저런 쓰레기가 다 있어!”
하지만 에린의 감정이 폭주하기 시작하여 비난의 화살이 돌아간 것은 자신을 모욕했던 오르타스 쪽이 아니라, 구미호 쪽이었다.
“미호! 너도 진짜 한심해!”
“뭐…라고!?”
“어떻게 저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믿고 세상에 나올 생각을 한 거야! 남자 보는 눈도 진짜 지지리도 없지!”
느닷없이 날아온 팩트 폭력에 구미호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에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갔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항상 미숙하다고, 햇병아리에 불과하다고 무시했던 에린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반박을 할 수가 없으니, 구미호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 이이…! 시끄럽다! 그놈은 뭐 얼마나 잘났다고! 정인을 넷…. 아니지. 다섯이나 두고 있는 그 바람둥이 놈도 쓰레기가 아니냐!”
“현이가 뭐 어때서! 저런 쓰레기랑 비교하지마!”
갑작스레 서로 자신의 전 애인과 현 애인 중 누가 더 낫냐는 답이 없는 다툼을 하던 중, 에린이 오르타스를 홱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 이미 결혼해서 임자 있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너 전혀 내 타입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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