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7화 〉 497. 유적의 수호수(1)
* * *
구미호에 의해서 오르타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자리를 응시하며, 디아네 왕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데미안….”
작은 중얼거림을 내뱉던 그녀가 이내 커다란 상실감의 폭주로 반복된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데미안…. 데미안…. 내, 내 아들….”
이내 그녀는 가슴 속에 뻥 뚫린 것처럼 생겨난 공허함을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 채워, 이 상황을 만들어낸 원흉이나 다름없는 대상에게 그 감정을 모조리 표출했다.
“내 아들을…. 어디로 빼돌렸어!”
몸을 일으켜 은현의 멱살을 부여잡고 외쳤다.
일그러진 디아네 왕비의 표정은 일국의 왕비로서 당당하고 도도함을 갖춘 얼굴이 아닌, 아들이 사라져버렸다는 상실감과 절박함이 드러나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다.
“어, 어….”
에린은 당황했다.
은현의 멱살을 붙잡고 거칠게 분노를 표출하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디아네를 말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였다면 은현에게 손찌검해대는 것을 자신은 물론이고, 엘레노아마저도 용납할 리가 없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에게 수작을 부린 것이나 다름없다.
은현은 오르타스를 구미호와 함께 전이시켜 이 자리에서 제외한 것이었지만, 디아네 왕비에게는 너무나도 갑작스레 자기 아들을 잃어버린 상황이었으니, 멘탈이 무너지고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당연하다.
에린에게도 디아네 왕비에 대한 인상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차마 은현의 멱살을 붙잡는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피가 이어진 가족을 잃었을 때의 절망감은 에린 또한 잘 알고 있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에린은 어떨 때는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잔인하고 비정해진 면도 존재했지만, 아직도 무른 면이 존재했다.
“아직 이 섬에 있습니다.”
은현은 담담히 디아네 왕비의 외침에 답했다.
“단지 둘이서만 있을 수 있도록 이 섬의 어딘가로 전이를 시킨 것뿐입니다. 아직 이 섬 안에 있어요.”
은현이 구미호에게 건넨 것은 일리아나와 자신이 만들어 내어 텔레포트의 마법이 각인된 아티팩트다.
특별한 점은 특별히 전이시키기 위한 장소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며, 발동되는 순간 아티팩트와 신체적인 접촉이 된 대상을 최대 2명까지 반경 2km 내의 장소로 랜덤으로 전이시킨다는 점이다.
오직 구미호와 오르타스가 오직 둘만이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제작된 아티팩트일 뿐, 이외의 특별한 마법은 각인시키지 않았다.
“내 아들…. 데미안을 어쩔 셈이야!”
은현의 멱살을 움켜쥔 디아네 왕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건…저도 모르죠. 모든 건 그분의 뜻에 달려있으니.”
은현은 구미호에게 이 아티팩트를 건네주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만 했을 뿐, 자세한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
약 2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오면서 지금까지 은현의 약속을 믿고 복수심의 감정을 꾹 참아왔던 그녀에게 걸 수 있는 조건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피해를 주지 마라.’가 최선이었다.
그녀의 복수가, 왕가는 물론 왕국의 백성들 전체로 불길이 휩싸이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그녀를 배신했던 오르타스를 어떻게 하네 마네까지는 은현이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의 행동을 예측해보자면, 구미호는 반드시 오르타스를 죽일 것이다.
“데미안은…. 초대 국왕이 아니야. 내 아들은 내 아들이야. 제발…. 제발…. 데미안만큼은….”
떨리는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왕비의 목소리는 애절하기까지 했다.
은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멱살을 쥐고 손을 부들부들 떠는 디아네 왕비에게 진실을 전했다.
“왕비님. 이미…. 그 몸에 데미안 왕자의 영혼과 정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거칠게 떨렸던 디아네 왕비의 두 손이 움찔 떨며 경직되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아들의 육체는 버젓이 살아있는데, 그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들이 아니라니.
그녀의 가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아마 왕비님께서도, 이전부터 어떠한 위화감을 눈치채고 계셨겠죠.”
“…….”
은현의 말이 정곡을 찔렸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떨리던 디아네 왕비의 몸이 단숨에 굳어졌다.
그 반응은 그녀 또한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어느 샌가부터 아들인 데미안은 무언가가 미묘하게 바뀌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나이에 걸맞게 천진난만하고 밝은 웃음을 띄웠고 다양하고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덤덤하고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일관된 표정을 지었다.
그 시기는 꽤 이전, 현 국왕인 안드레아 페르니아스가 병환으로 앓아누우며 왕비를 포함한 궁정의 모든 이들에게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을 때와 일치한다.
그저 아버지의 병환이 겹침과 동시에 나이를 먹고 사춘기를 지내며 변한 것이라 애써 얼버무렸던 위화감이 이제야 싹을 틔우며 디아네 왕비의 가슴 속을 술렁이게 했다.
만약 그때 이미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몸에 있는 오르타스의 영혼이 데미안의 몸속으로 옮겨간 것이라면.
갑작스러운 데미안의 변화도, 모든 아귀가 들어맞는다.
“그럴…리가 없어…!”
하지만 마치 퍼즐 조각들처럼 딱딱 들어맞는 정황과 사실관계에도 불구하고, 디아네 왕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말로 자기 아들인 데미안이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같다.
“아니지? 방법이 있는 거지? 제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을 이곳에 데려왔잖아! 제발…! 제발 내 아들을 원래대로 돌려내! 데미안을 제발!”
아주 오래전부터, 디아네 왕비에게 있어선 그녀의 아들인 데미안이 전부였다.
아들을 왕세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왔으며,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저지르는 비리 귀족 파벌들과 손을 잡고, 많은 백성이 보는 피해들에서 눈을 돌렸다.
그렇게 키워온 아들의 영혼이 사라지고 다른 존재가 그 몸을 차지했다는데 그 사실을 듣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을까.
절박함이 가득해진 디아네 왕비는 이전처럼 존대를 통해 은현을 대하지 않았다.
은현은 그런 그녀의 애원에 답했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자신이 부활하여 이 나라에 왔고, 일리아나를 만나 페르닌에서 살고 있었을 때는 이미 오르타스는 데미안 왕자의 몸을 차지한 상태였다.
사전에 그 사건을 막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미 벌어진 그 사건의 피해자인 데미안 왕자를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비님. 정말로 오르타스 그자가 어째서 왕비님의 아들인 데미안 왕자를 타겟으로 골랐는지 모르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은현은 흘끗 고개를 돌려 살짝 떨어진 장소에서 아르티아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헬레나 후비와 유리아 왕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험악한 상황에 무서움을 느끼고 헬레나 후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뒤에 숨어있는 어린 왕자까지.
“사실 오르타스의 입장에서는 데미안 왕자나 에반 왕자나 새로운 육체로 삼는 것은 별반 상관이 없었을 겁니다.”
“……!”
은현의 말을 들은 헬레나 후비가 인상을 굳히며 더욱 자기 아들의 손을 꽉 잡으며 소년을 보호했다.
“그런데 오르타스는 어째서 데미안 왕자를 자신의 새로운 그릇으로 삼았을까요.”
“…….”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데미안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될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죠.”
오르타스의 목적은 지속해서 대를 잇는 자신의 핏줄에 영혼을 정착시켜 계속해서 왕의 지위를 보존하고 영생의 삶을 살며 페르니아스 왕국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 오르타스에게 있어 페르니아스 왕국의 내부 정치 상황은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비리와 부정부패를 서슴지 않은 귀족 파벌의 세력은 페르니아스 왕국의 정권을 잡고 있었으며, 국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는 디아네 왕비의 위세를 앞세워 더욱 질 나쁜 폭정을 일삼았다.
이후 데미안 왕자의 왕세자 책봉은 거의 확정에 가까웠으며 헬레나 후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이 소공작인 애슈턴의 만행으로 모든 책임을 지고 궁정 귀족 직에서 사임했다.
결과적으로 헬레나 후비의 아들인 에반 왕자를 지지할 세력이 자연스레 무너지면서 데미안 왕자의 왕세자 책봉이 거의 확정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은 그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비리 귀족들은 모조리 은현과 아르티아 기사단에 의해서 철저히 응징을 당했다지만, 그때 당시 비리 귀족들과 함께 정권의 힘으로 헬레나 후비의 파벌과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을 견제하고 찍어누르도록 주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디아네 왕비다.
“나…때문이라고…?”
디아네 왕비는 오르타스가 다음 육체의 그릇으로, 먹잇감으로 자기 아들을 찍어두었던 이유가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고 저지르며 백성들의 비명을 외면했던 자신의 만행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 때문에, 아들의 영혼이 소멸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디아네 왕비의 손에 힘이 스르륵 빠지며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돼…. 데미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점차 깨닫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외면하는 디아네 왕비가 정신착란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아르티아의 두 기사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점차 멀어져가는 왕비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은현은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
침음해진 분위기 속에서 유리아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호위하고 있던 알렉스를 불렀다.
“네. 왕녀님.”
“당신은…. 이 사실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습니다.”
“어째서…저한테 미리 말해주지 않았죠?”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야 할까요.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쓰게 웃으며 사죄했다.
그가 은현에게서 초대 국왕인 오르타스에 대한 이야기와 계획의 단편을 들은 것은 출발하기 하루 전날이다.
이후로는 헬레나 후비와 에반 왕자와 계속 붙어있는 그녀에게 이 사실을 몰래 전할 수 있는 상황은 오지 않았다.
“후우….”
유리아는 어쩔 수 없었다는 그의 사실을 받아들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착잡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근심이 깔려 있었다.
이 사실이 왕국의 귀족들에게, 그리고 외부로 나간다면 어떠한 파란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졌다.
‘아마도 이야기의 후반부 전개에 이런 내용이 있었겠지.’
페르니아스 왕가와 구미호에 대해 얽힌 이야기는 이전 생에서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이 세상의 미래 단편을 접해본 유리아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내용뿐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본 미래시라는 소설의 초반 전개에서 구미호가 갑작스레 튀어나와 페르닌을 불바다로 만드는 전개가 이어졌는지, 그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알게 되어서 더욱 이 사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곤란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환장하겠네. 진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렉스는 이 상황이 걱정이 안 되나요?”
“저도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왕녀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알렉스는 잠시 말을 끊으며 은현과 엘레노아, 에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을 일부러 초대 국왕을 자극하지 않고, 이곳으로 오는 타이밍을 노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즉, 은현은 이 진실을 수습하여 페르니아스 왕국에 올 피해를 최소화할 계획을 이미 준비해두었다는 뜻이다.
“알렉스의 말대로, 저 인간이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이런 핵폭탄 같은 사실을 까발렸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지만….”
“핵폭탄이라는 게 뭡니까?”
“있어요. 터지기만 해도 왕국 전체가 불바다가 될 수 있는 그런 게.”
“일리아나님과 같은 존재인 겁니까?”
“…….”
‘핵폭탄과 일리아나의 마법 중 뭐가 더 강할까?’라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알렉스의 질문에 설명하기가 귀찮아 유리아가 입을 다물었을 때.
우우웅
역대 왕족들의 시신이 안장되어있는 오르비스 유적의 입구로부터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일어나 응집되기 시작한다.
“뭐, 뭐가 또….”
이제는 또 뭐가 튀어나오려는 건지 제발 그만 좀 해달라는 애원을 표정에 그대로 담아낸 유리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유적의 입구를 응시했다.
유리아뿐 만이 아니라, 밀도 높은 마력을 흩뿌리는 압박감을 느낀 아르티아의 기사들 전원이 경계의 태세를 취하며 입구를 응시했다.
끝없이 가느다란 실처럼 응집되기 시작하는 푸른색의 마력은 이내 질량을 가진 무언가로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고, 그 크기는 몹시 거대했다.
평범한 인간 남성의 네 배에 달하는 덩치로 갖춰진 그것의 모습은 짐승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유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우?”
거대한 아홉 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바람이 이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커다란 구미호가 하늘을 보며 포효했다.
아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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