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96화 (479/730)

〈 496화 〉 496. 재회의 순간(3)

* * *

구미호의 답변을 들은 오르타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쉽군.”

“그게 아쉽다는 감정을 품은 인간의 얼굴인가?”

전혀 아쉬운 표정을 짓기는커녕 마치 처음부터 구미호의 선택을 예상하였다는 듯 오르타스의 얼굴은 몹시 담담했다.

“아쉬울 수밖에.”

천천히 몸 안의 마력을 방출하여 오르타스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에린이 평범한 인간의 상태에서 신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처럼, 서서히 형체를 갖춰나가는 은백색의 아홉 꼬리와 머리에 달린 여우귀는 오르타스가 신수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고 구미호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과 마찬가지.

자신에게서 빼앗은 힘을 이용하여,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거듭난 오르타스의 모습을 본 구미호는 부아가 치미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 손으로 직접, 내가 연모했던 이를 두 번이나 죽여야 하니까.”

가능하면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고 가슴에 품고 싶다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얼굴을 일방적으로 구타하는 구미호의 매서운 주먹들을 피하지 않고 모두 맞았다.

불완전하다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신수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제약이 존재했지만, 분수에 넘치는 불멸의 삶을 손에 넣어 구미호와 동급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미X 놈.”

구미호는 기분 나쁜 더러운 소리를 들어버린 것에 인상을 구겼다.

이미 배신을 당했고, 배신한 순간부터 자신과 오르타스는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대립 관계다.

첫 단추부터가 잘못 끼워졌는데, 이제 와서 증오와 복수로 얼룩져있는 과거의 업보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가 있을까.

적어도 구미호에게는 불가능하다.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고르고 싶지 않은 선택지를 제시하는 오르타스를 보며 구미호는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오늘은…정말로 슬픈 날이야.”

오르타스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백색의 아홉 꼬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푸른색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같은 기원을 가진 두 신수는 대기 중을 감싼 서로의 마력을 충돌시켰다.

우우웅

대기가 진동하여 공명음을 일으키는 두 신수의 중간지점이 아지랑이가 생겨나며 공간을 일그러뜨린다.

“내 손으로 내가 연모했던 여자를 죽이는 것과 동시에, 내 백성들을 모두 죽여야만 하니까.”

“죽이겠다고? 전부…네놈의 후손들이 아니냐.”

이 오르비스 섬에 있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왕족들은 물론, 그들을 호위했던 아르티아 기사들을 포함한 전원을 죽이겠다는 오르타스의 중얼거림에 구미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것에 분노한다기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배신한 것은 물론 수많은 희생을 치렀던 그가 자신의 핏줄이나 다름없는 후손과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모순적인 행동과 사고방식에 대한 경멸에 가까웠다.

“나의 정체를 들켰으니까.”

신수와 자신이 얽혔던 비밀은 물론, 피를 이은 후손의 육체를 강탈하여 지금까지 불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왕국 내부에서도 자신에 대한 존재에 대해 큰 파란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측이다.

이 비밀이 탄로 나는 것은 오르타스로서도 최악의 상황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하는 일.

그렇기에 오르타스는 가슴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백성들과 후손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오랜 불멸의 삶을 살면서 정신이 망가져 미쳐버린 그는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쓰레기 자식.”

그 말을 끝으로, 구미호는 움직였다.

[호족요술(????)]

[여우불]

푸른색의 기류를 타고 주위에 흩뿌려진 구미호의 마력들이 응집되며 불타오르는 푸른색의 불꽃을 만들어 낸다.

그 숫자는 거의 스물이 넘어가며 기껏 해봐야 네다섯 정도의 여우불을 소환하여 부릴 수 있는 에린의 수준과는 또 차원이 다르다.

손가락으로 오르타스를 척 가리켜 목표물을 설정하자, 총 스물다섯 개의 여우불이 일제히 오르타스를 향해 날아갔다.

마치 개인의 의지가 있는 양 날아가는 여우불들이 목표물인 오르타스의 몸을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거칠게 불타오른다.

“…….”

오르타스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자신의 전신을 불태우기 위해 돌진해오는 여우불의 중심으로 돌진했다.

상체를 앞쪽 아래로 낮추고 여우불을 아슬아슬한 간격의 차이로 모조리 피해내며 빠른 속도로 전진해오는 오르타스의 움직임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극한의 속도를 선보였다.

구미호는 자신의 여우불을 피해내면서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오르타스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그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힘을 활용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모조리 신체의 강화 쪽에….’

어찌보면 당연한 방식이다.

자신에게서 여우 구슬과 신수의 힘을 강탈하기는 했다지만, 오르타스는 신수의 힘이라는 것을 다뤄본 적도 없는 그저 강한 인간에 불과했다.

힘을 손에 넣었을 당시, 에린처럼 누군가가 옆에서 신수의 힘을 가르쳐준 적도 없던 오르타스는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아까 보여주었던 백귀야행처럼 주인과 종자의 관계로서 영혼의 맹약을 맺는다면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오르타스는 구미호의 요술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오르타스가 신수의 힘, 구미호의 마력을 사용하는 방식은 당연히 물리적인, 피지컬적인 분야에 모든 마력을 투입하여 본인의 신체를 강화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그 미숙한 것보다 더 미숙하군.”

정말로 단순 무식하기 짝이 없으며 요술의 활용이나 신수의 마력을 사용하는 센스 자체는 에린보다도 재능이 없다.

하지만 지금 현재로선 그런 오르타스가 몹시 성가신 것도 사실이다.

“…쯧.”

극한으로 끌어올린 피지컬적 요소를 통해 여우불을 요리조리 피해내면서도 그녀의 여우불이 오르타스에게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모조리 피해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기를 불태우는 고열을 발생시키는 여우불과 가까이 인접한 것만으로도 오르타스의 살갗이 불타오르고 적지않은 화상 데미지를 입혔다.

하지만 이곳, 오르비스의 지면에서 흘러나오는 농밀한 신수의 마력이 일방적인 구타로 반죽이 되었던 오르타스의 얼굴을 회복시켰을 때처럼, 그의 체내로 흘러들어와 그가 입은 데미지들을 모조리 회복시켰다.

성가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르타스는 치명상에 가까운 데미지들을 모조리 최소화하면서, 자잘한 상처들은 무시하는 무식한 행동방식을 취해왔다.

어차피 그 자잘한 상처들은 지금처럼 이 섬의 유적에 봉인된 여우 구슬로부터 공급된 마력이 모조리 회복시켜줄 터.

에린보다 신수의 힘을 다루는데 재능이 없지만, 그만큼 피지컬적인 측면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자랑하고 있는 오르타스는 어떤 의미로는 가장 성가셨다.

구미호 또한 피지컬적인 요소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스펙이지만, 대를 물린 후손의 육체를 빼앗아 반영구적인 영생을 살아왔던 그의 검술이 그저 생전의 그 시절에서 정체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오르타스가 구미호가 만들어낸 스물다섯 개의 여우불들을 모조리 피해내고 구미호를 향해 돌진하여 검을 휘둘렀다.

작게 혀를 찼던 구미호는 허리를 비틀어 오르타스의 공격 궤도에서 벗어났고 곧바로 그의 품에 파고들어 팔꿈치로 복부를 가격하려 했지만, 오르타스 또한 능숙하게 반대쪽 팔을 들어 올림으로써 구미호의 공격을 막아냈다.

서로의 공격이 빗나가고 막히자마자, 둘은 거리를 벌려 다시 서로를 응시하며 대치했다.

“후우….”

“포기해. 미호. 지금의 너로선 나를 이길 수 없어.”

그것은 허세가 아닌 명확한 지금의 현실이다.

구미호는 현재 은현과 일리아나, 에린의 조력으로 새로운 여우 구슬을 제작하고 그것을 그릇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지만, 새롭게 제작된 여우 구슬에는 밀도 높은 다량의 마력이 가득 보충되지 않은 상태.

반면 오르타스의 경우에는 자신에게서 강탈한 여우 구슬 속에는 자신이 몇백 년간 모아두었던 밀도 높은 마력의 정수가 가득 들어있다.

요술을 누가 더 능숙하고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냐는 숙련도의 차이에서는 구미호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신체적인 스펙의 조건도 서로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차이로 인해 구미호 쪽이 단연 불리하다.

오르타스는 그런 구미호의 상태를 곧바로 꿰뚫어 보았다.

그렇기에 검을 들어 올려 구미호를 겨누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후후.”

이 불리한 조건이 가득한 격차 속에서, 구미호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꼴로 전락을 해버렸는지, 남자 하나를 잘못 만나서 신수의 생이 완전히 꼬여버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뭐지?”

오르타스는 구미호의 웃음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이 상황은 분명히 자신 쪽이 유리하고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진데, 도리어 여유로운 표정에 가까운 웃음을 짓고 있으니 미심쩍을 만하다.

“비장의 수라도 숨겨둔 건가?”

“아니.”

구미호는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정말로 분하고 부아가 치미는 일이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오르타스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구미호가 순순히 인정했다.

“지금의 나로는 너를 이기지 못하겠지. 하지만….”

구미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르타스, 너는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라고?”

구미호의 그 말은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간파했다.

과거에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던 오르타스이기 때문에 지금의 여유로운 구미호의 태도가 허세에서 나오는 거짓말이 아닌, 진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태도가 매우 꺼림칙하여 오르타스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나와 함께 순순히 이곳으로 전이된 게 너의 실수지.”

“…….”

지금 이렇게 구미호와 둘이서만 대치하고 있는 것이, 자신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라고 구미호는 선언했다.

그렇다면 자신과 구미호가 사라진 그곳에 누가 남아있는지를 생각해보았던 오르타스는 곧바로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인가.”

현실에 간섭하는 마법보다 더 놀라운 신비한 술법으로 자신의 정체와 과거의 이야기를 까발리고,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죽였던 구미호를 부활시켜, 이 상황을 주도하고 만든 백은발의 적안을 가진 남자.

은현이다.

“…소용없다. 이미 나의 백귀들이 그놈과 나의 후손, 백성들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터. 게다가…. 이 섬에는 너의 구슬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또 하나의 수호수(???)가 존재한다.”

설령 자신들의 백귀들을 모두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신수의 마력을 직접 공급받아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는 그 수호수(???)를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나보다 완전한 불멸자라고 하더라도…. 신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토벌할 수는….”

“글쎄. 과연 그럴까?”

“…뭐라고?”

구미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문하는 오르타스를 보고 비웃었다.

오르타스는 아무것도 모른다.

은현이 불멸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어떻게 불멸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 누구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지, 이제는 인간을 초월하여 상위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조차.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와 능력을 숨겨가며 행동을 해왔던 은현에 대해서, 오르타스는 그저 들리는 소문에 의해 단편적인 정보들밖에 파악하지 못했으리라.

“그 영악하고 능글맞은 놈이, 내가 네놈과 이렇게 단둘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조차 이용하려는 놈이, 설마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까.”

오르타스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미 구미호에 의해 이렇게 전이되어 그녀와 단둘이 되어버린 시점부터, 그 유적지에서 떨어진 시점부터 그의 패배는 확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구미호는 이후의 계획은 은현에게 전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상황조차도 은현이 생각을 해두었을 것이라고 강하게 확신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간이 텔레포트 마법’이 각인된 아티팩트를 넘겨 오르타스와 단둘이서만 대치하도록 넘겼던 은현의 의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구미호는 확신하고 있다.

“오르타스. 너의 패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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