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5화 〉 495. 재회의 순간(2)
* * *
대기가 진동하는 포효를 들으며, 누군가는 그 위압에 신체를 경직시켰고, 누군가는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칼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떨었다.
그 찰나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구미호뿐이다.
이 난리 통 속에서 구미호 이외에 행동을 개시한 것은 총 세 명뿐.
노기를 띤 표정으로 데미안 왕자의 몸을 차지한 오르타스를 향해 돌진해오는 구미호의 빠른 움직임에, 리오드가 뒤늦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런 리오드의 행동을 감지한 은현과 제라드 또한 움직인다.
분노를 표출하여 미친 듯이 뛰어오는 구미호의 앞을 가로막아 그녀의 목표 대상이나 다름이 없는 왕족들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잡는다.
구미호와 초대 국왕인 오르타스에 대한 과거의 사연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아르티아 기사단 단장이며 이번 원정에서 자신의 역할은 왕족의 경호다.
리오드는 자신의 역할의 본분을 다해야만 했다.
곧바로 허리춤에 찬 검을 뽑으며 구미호의 돌진을 막아내려 했지만, 그가 대치하게 된 것은 이형환위를 사용하여 환상처럼 나타난 그의 옛 동료들이다.
그 구미호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앞으로 다가와 자신을 막아선 은현과 제라드를 보고, 리오드는 순간 주저했다.
자신에 부여된 임무에 대한 결심이 흔들리는 아주 짧은 순간, 리오드와 은현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
은현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리오드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음에도 은현의 그 눈짓과 행동이 ‘막지 마라.’라는 뜻을 알아차리고 더욱 고민에 빠졌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을 마친 리오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풀었다.
자신의 임무와 은현의 말 속에서 그는 은현을 믿기로 한 것이다.
그의 계획과 행동에는 언제나 이유와 대의가 존재했고, 자신을 배려하여 알리지 않고서 이 상황을 만들어 주도했던 그의 생각을 믿어 보기로 했다.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은현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하고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분노를 가득히 표출하고 있던 구미호와 눈이 마주친 은현이 리오드의 뒤편에 존재하는 데미안 왕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가시죠.’
‘…능글맞은 놈.’
구미호는 은현에 대한 짧은 생각을 마치고 다리에 힘을 실어 힘차게 점프했다.
은현과 제라드와 함께 리오드를 뛰어넘어 포물선을 그리고 착지하곤 또다시 질주한다.
“마, 막아!”
아르티아의 한 기사단원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급하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외쳤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오는 구미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의 압박을 받은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데미안 왕자는 물론 주위의 왕족들을 보호하는 형태의 진을 쳤다.
“멈춰라!”
경고가 담긴 기사의 외침에도 구미호는 멈추지 않았고, 경호하고 있는 인원들 이외의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구미호에게 검을 휘둘렀다.
“흥!”
구미호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기사들의 검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허리를 비틀고 상체를 낮추며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치는 날카로운 칼날을 피하면서 구미호는 감속하기는커녕 더욱 빠른 속도로 가속하여 기사들을 제쳤다.
그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시선의 주인인 데미안 왕자.
정확히는 그의 몸을 차지한 오르타스다.
“젠장…!”
계속해서 공격들을 피해내며 요리조리 포위망을 뚫고 나기는 날렵한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는 구미호를 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런 기사들이 귀찮았던 것은 구미호 또한 마찬가지다.
‘귀찮군.’
평소였다면 자신을 방해해오는 이들이라면 가차 없이 힘으로 찍어눌러 쓸어버렸겠지만, 이번만큼은 구미호는 그러지 못했다.
알겠지. 미호야? 절대로 그 사람들 다치게 하면 안 돼! 기사님들 모두 리오드님의 소중한 부하분들이란 말이야! 특히나 에이라 언니 다치게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 진짜로 화낼 거야!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알겠어!?
“…쯧.”
몇 번이나 경고하며 신신당부를 늘어놓는 에린의 으름장을 떠올리고 구미호는 혀를 찼다.
20살의 어린 나이밖에 먹지 않은 새파랗게 어린 것이 감히 누구에게 경고를 늘어놓는 건지 가소롭기 짝이 없었으나, 에린의 그 신신당부를 못 들은 척 넘기지 못했다.
게다가 이 상황을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은현이다.
‘…능글맞은 놈.’
구미호는 다시 한번 은현에 대한 험담을 속으로 늘어놓았다.
은현은 처음부터 오르타스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굳이 모든 것을 죽이고 빼앗는 것만이 복수의 전부는 아니라 했지?
네.
그렇다면 나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그 다른 방식의 복수. 너에게는 가능한 것이냐?
최선을 다해 오르타스에게 엿을 먹일 수 있는 상황을 준비해드리도록 하죠.
이것은 아주 예전, 소녀였던 에린의 몸을 빼앗아 페르니아스 왕국에게 복수를 하려 했던 때에 은현과 나눴던 대화와 약속이다.
은현은 그때부터 이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미호는 설마 오르타스 본인에게 직접 복수를 하게 해줄 생각이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르타스에게 배신을 당해 죽임을 당한 이후로, 유해는 땅속에 묻혔고 그 유해 속에 남아있던 마력 속의 잔재가 되어버린 사념체로 몇백 년의 시간을 보내왔다.
이후에 오르타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며 수명을 다해 죽어버렸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을 배신한 상대는 이미 죽어버렸고, 그가 남겨두고 간 것은 다름 아닌 이 나라다.
그래서 증오심으로 가득했던 구미호는 에린의 몸을 빼앗아버렸을 당시 페르니아스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려 했었지만, 그 시도는 은현의 중재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어째서 은현은 오르타스가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들의 몸을 빼앗아 지금까지도 불완전한 영생을 살고 있다고 곧바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당연하다.
그것을 알았다면 구미호는 곧바로 오르타스와 왕궁을 불태워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터.
이 왕국에 피해가 최소로 가는 방향으로 기회와 상황을 만들고 싶었던 은현에게는 악수나 다름이 없었다.
‘최고구나.’
구미호는 미소지었다.
그때 은현의 말을 듣고 언젠가 복수의 기회와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그의 약속을 믿고 꾹 참아왔던 시간이 보답을 받는 것만 같았다.
지금껏 억눌러 왔던 감정을 모조리 토해내듯 구미호는 지금껏 회복시켜왔던 마력을 일제히 방출하여 대기를 진동시켰다.
“크…윽!?”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흉흉한 마력의 기세는 구미호를 가로막고 있던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의 숨통을 옥죄었다.
구미호의 마력에 짓눌려 주춤하는 아르티아의 기사들을 뒤로하고,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원수와 거리가 좁혀졌다.
“오르타스으으으으!”
다시 한번 대기가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를 내지르는 구미호의 기백은 그 어떤 맹수와 비교를 해봐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위용을 자랑했다.
“아, 안 돼애애!”
무시무시한 살기를 흩뿌리는 신수에게서 자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디아네 왕비가 비명을 지르며 구미호와 데미안 왕자의 몸을 차지한 오르타스의 사이에 끼어들려 했다.
하지만 평범한 여성의 신체 능력에 불과한 그녀가 인간을 초월한 신수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처 디아네 왕비가 끼어들기도 전에, 구미호는 품속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어 오르타스의 가슴에 들이밀었다.
우우웅
신수의 마력을 받아 작동하기 시작하는 구슬이 작은 공명음을 일으킨다.
“데미아안!”
“…….”
절망이 어린 얼굴로 자기 아들을 부르는 디아네 왕비의 목소리는 세차게 떨렸지만, 어미의 부름에 자식은 답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를 빼앗은 오르타스는 오로지 과거에 자신이 연모했으나, 한차례 배신을 해버렸던 구미호에게만 시선이 꽂혀있었다.
오르타스는 구미호가 들이민 구슬이 자신의 가슴에 닿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대로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구슬로부터 방출된 마력이 구미호와 오르타스의 주위를 맴돌며 작은 마법진을 만들어냈고, 한 번 작동하기 시작한 아티팩트는 마법진의 중심에 서 있는 둘을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두 존재가 있던 자리를 응시한 디아네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아, 아아…! 데미안…! 데미안!”
◆ ◆ ◆
파지직!
스파크를 튀기며 하늘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구미호와 오르타스는 중력의 힘에 이끌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허공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동안, 구미호는 오르타스의 멱살을 꽉 움켜쥐며 단단히 고정했다.
“흐읍…!”
퍼억!
숨을 삼키며 있는 힘껏 힘을 끌어모으고 반대쪽 팔을 뒤로 당기고는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러 오르타스의 얼굴을 후려 갈긴다.
그리곤 거센 충격으로 고개가 세차게 꺾여나가는 오르타스의 멱살을 쥔 손을 내저어 그의 몸을 바닥에 내쳤다.
쿵!
평범한 여성의 외관을 하고 있다지만 신수의 힘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몸을 강화한 구미호의 신체 능력은 당연히 웬만한 기사들을 압도할 정도.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바닥에 내팽개쳐 내다 꽂아버린 오르타스의 몸 위에 올라타 마운트 포지션을 취한 구미호는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러 오르타스의 얼굴을 사정없이 구타했다.
퍽! 퍼억! 퍼억!
한 대가 아닌, 두 대, 네 대, 여덟 대의 배로 불어나는 구타의 연속으로 인해 그녀의 주먹은 오르타스의 피로 떡칠이 되었고, 주위로 튄 피들이 바닥과 풀을 더럽혔다.
“…….”
한껏 일방적인 폭력을 선사하던 도중, 구미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구타를 멈췄다.
그리곤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왜 반격을 하지 않지?’
입술이 찢어지고, 이빨이 깨지며 얼굴이 반죽이되어 있음에도 오르타스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뒤늦게 땅에서 올라온 익숙한 기운들이 오르타스를 감싸기 시작하자 구미호는 뒤로 점프하며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오르타스와 거리를 벌렸다.
“이 기운은….”
구미호는 지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의 정체를 알아채고 얼굴을 굳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오르타스의 반죽이 되어버린 얼굴이 천천히 본래의 형태를 되찾아 갔다.
피가 터지고 새빨갛게 부어오른 멍의 부기가 빠져나가고, 깨져버린 이빨들이 다시 돋아나 몸을 회복시키고 있는 것은 과거 자신의 힘이었던 신수의 힘이다.
신수의 힘 일부만이 잔재로 남아있었던 구미호의 유해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성장시켰던 ‘페르니아스의 신목’처럼, 이 섬의 전체가 신수의 힘을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구미호는 자신을 죽인 뒤, 오르타스가 자신의 여우 구슬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깨달았다.
“…이 땅에 내 여우 구슬을 묻었구나.”
“맞아.”
오르타스는 담담히 구미호의 추측을 긍정했다.
지금은 오르타스를 새로운 그릇이자 새로운 주인으로 받들고 있는 여우 구슬은 이 오르비스 섬의 유적에 묻혀있었다.
섬 오르비스는 오르타스가 구미호에게서 빼앗은 여우 구슬 속에 응축된 신수의 마력을 리스크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결과 만들어진 섬이다.
여우 구슬 자체를 인간의 맨몸으로 감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섬 전체를 신수의 힘을 품을 수 있는 매개체로 만들었다.
그동안 자신이 사용해왔던 역대 국왕들의 육체를 이곳에 매장함과 동시에, 새로운 자신의 육체에 신수의 힘을 가득 채움으로써 지금까지 불완전하지만, 영생의 삶을 살아왔다.
“미호.”
오르타스는 조용히 구미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 시작하자.”
“…뭐라고?”
구미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깔린 구미호의 얼굴을 마주하며 오르타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를 배신했던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우리는 너무나도 약했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내가 책임져야 했던 내 백성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을 테니까.”
“…….”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네가 부활해서 나는 정말로 기뻐.”
구미호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 말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오르타스라는 것에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다.
그를 믿었던 자신을 배신하고, 오랜 세월 동안 요력을 축적한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여우 구슬을 빼앗았던 존재라는 것이, 가증스럽고 증오스러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두 번 다시 너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확실하구나. 너는 망가졌어.”
자신을 배신하였던 그때를 기점으로, 오르타스는 망가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 티르니스 령의 호텔에서 구미호는 은현에게 한 가지 경고와도 같은 조언을 들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이미 망가져 버렸을 겁니다. 그러니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분노하지도 마세요. 신수님만 힘들 겁니다.
오르타스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구미호는 처음에는 은현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지금의 오르타스는 미쳐버렸다.
가질 수 있는 수명의 한계를 초월하여 주제를 넘는 불멸의 삶을 사는 인간이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 은현은 짧게나마 경고를 했다.
끓어오르는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찼던 구미호의 머릿속이 은현의 말을 떠올린 순간 차게 식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할 말은 끝났나?”
“…….”
구미호는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는 오르타스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오른 주먹을 쥐어 손등이 보이도록 들어 올리고, 가운뎃손가락만을 피며 오르타스를 비웃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지구식 욕’을 선보이며 구미호는 오르타스의 권유에 답했다.
“엿이나 먹어. 이 개자식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