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93화 (476/730)

〈 493화 〉 493. 여우의 과거(4)

* * *

마수들과의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무책임한 왕족과 수뇌부들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해서, 그 땅 위에 건국된 새로운 왕국이 평화를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페르니아스는 건국 시점부터 위태위태했으며 주위의 상황도 페르니아스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통치에 대한 개념 자체가 전무했던 오르타스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만 했다.

정찰대의 군인들을 이끄는 것과 정치를 통해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문제다.

이후로도 페르니아스는 식량 문제, 인구 문제, 다른 국가와의 간섭 등 많은 문제를 직면해야만 했다.

가장 성가셨던 것은 다른 국가와의 외교 문제다.

마수들의 침공을 가장 전방에서 받아야만 했던 전 왕국 영토는 전쟁의 여파로 토지는 황폐해지고 인구는 날이 갈수록 감소하는 약소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 왕국을 버리고 도망쳤던 왕족과 수뇌부들이 중앙의 강대국의 위세를 등에 업고 다시 페르니아스를 찾아왔다.

“이곳은 나의 왕국이다! 감히 내 왕국을 차지하다니!”

“한 번 버리고 도망친 주제에, 잘도 그딴 주장을…!”

당연히 오르타스와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은 분개했다.

나라와 영토를 버리고 도망을 쳤던 주제에, 전쟁이 끝나고 기적적인 승리를 취하고 나서야 그것들을 다시 차지하러 온 그들의 심보가 너무나도 고약하고 악랄했다.

하지만 전 왕국의 왕족과 함께 도망쳤던 수뇌부들만이라면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중앙 강대국의 대규모 병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힘겹게 마수와의 싸움을 종결시킨 오르타스의 페르니아스 왕국은 이어서 같은 인간들을 대적해야만 했다.

“어째서….”

어째서 또 싸워야만 하는 걸까.

마수들의 위협 속에서 찾아낸 평화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에 펼쳐진 것은 같은 인간끼리 죽이고 죽는 참극뿐이다.

모두가 다 같이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 걸까.

싸우지 않고 서로의 역할에 충실히 임하며 평화를 공유하는 오르타스의 염원은 끝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약소국에 불과한 페르니아스와 중앙 강대국의 전쟁이 누구의 승리로 돌아갈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간단히 결론이 나왔다.

“어째서 강대국은….”

어째서 중앙 강대국은 이득을 볼 것도 없는 도망친 왕족들을 옹호하며 이 땅을 다시 빼앗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걸까.

“아마도 거래를 한 거겠지.”

평화에 취할 틈도 없이 국가 간의 전쟁을 한창 이어나가던 때, 구미호가 오르타스의 의문에 대해 자신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거래?”

“나라를 되찾게 해주겠다면, 앞으로도 무엇이든 하겠다는 약속. 예를 들어 속국이 된다 거나.”

매년 일정 금액을 상납한다거나, 그에 따르는 식량이나 자재들도 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백성 또한 그 예가 될 수도 있다.

애초에 강대국의 압력을 버티지 못한 주위의 약소국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거나 연명하는 것이 다반사다.

거세게 저항하는 오르타스와 페르니아스 쪽이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폐하! 도망치십시오!”

페르니아스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끝까지 오르타스의 곁에 남아 함께 싸웠던 신하가 오르타스에게 외쳤다.

도망치라고.

하지만 그것은 고를 수 없는 선택지나 마찬가지다.

“나 보고…. 지금 그때의 그것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라고?”

나라를 버리고, 영토를 버리고 자신 혼자만이 살아남아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페르니아스의 수뇌부들은 모두 초대 국왕인 오르타스가 살아남는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르타스를 피신시키고, 그들은 모두 마수들과 최후의 싸움을 벌였던 때처럼 결사 항전을 결심하며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고집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자신만이 도망치는 선택지를 오르타스는 고를 수 없었다.

“어째서 우리는 계속 이렇게….”

몇 번이고 계속 들면서도 전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다.

마수들과 싸움에서도, 국가 간의 싸움에서도, 자신이 세운 나라는 평화를 맞이할 수 없는 걸까.

그토록 노력했고, 그토록 염원했음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르타스는 뒤늦게 그 이유를 깨달았다.

페르니아스가 이렇게 고난을 겪는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약소국이라서….”

약해서, 힘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지극히 불합리한 이치에 해당하는 힘의 논리에 오르타스는 주먹을 꽉 쥐며 분함을 표현했다.

“그래. 약하다면…. 약해서 당할 수밖에 없는 거라면….”

강해지면 된다.

이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불합리한 힘의 논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약함이라는 것을 버리고 강해지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

페르니아스는 결사 항전으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결국 강대국의 무력에 힘이 다해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

이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힐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르타스는 상대에게는 없고, 자신들에게는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가 생각에 미친 것은 자신을 따라 속세로 나온 영험한 신수의 존재다.

자신의 몸을 회복시키고 강대한 힘을 부여하여, 나아가서는 인간으로서 수명의 한계를 초월시킨 장생의 삶은 선사해주었던 신수의 힘이라면.

“오르타스.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저 신하의 말대로 지금은….”

푸욱.

“……?”

오르타스를 설득하여 그를 피신시키려 했던 구미호는 뒤에서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무언가를 느끼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크…윽!?”

이윽고 뒤늦게 전신으로 퍼지는 고통을 시작으로 숨이 가팔라지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맨손으로 자신의 등을 시작으로 가슴을 관통시킨 오르타스의 얼굴을 본 구미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미안해. 미호.”

“어째서…!”

“이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정말로 미안해….”

오르타스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배신감으로 치를 떨고 있는 구미호의 시선을 외면했다.

자신과 약속을 맺고, 자신을 믿고 지금까지 따라와 준 존재를, 마음을 빼앗기고 동반자로까지 생각했던 구미호를 배신하는 것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크…윽!”

구미호는 자신의 등 뒤에서 허무하게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오르타스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은색의 구슬을 보고 신음했다.

인간의 기준으로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여 자신의 전신에 기운을 활성화하는 동력원, 여우 구슬을 오르타스에게 너무나도 허무하게 빼앗겨버렸다.

평소의 구미호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치명적인 실수다.

오르타스를 포함한 이 궁전의 신하들은 모두 마수들과의 마지막 결사 항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여 살아남은 동료들.

그 싸움 속에서 생겨난 신뢰를 굳게 믿으며 경계를 풀고 있던 만큼, 자신을 배신한 오르타스의 행동에 커다란 배신감이 치밀어올랐다.

“정말로…미안해.”

구미호는 그렇게 자신이 믿었던 남자에게 여우 구슬을 빼앗겼고,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 ◆ ◆

딱!

은현은 손가락을 튕기며 자신의 능력을 해제했다.

현실에 간섭하여 과거의 일부를 재현했던 ‘환상 세계’가 끝나고, 본래의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일제히 할 말을 잃어버린 표정을 지었다.

은현이 보인 마법과도 같은 신비한 능력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왕족들은 물론 그들을 호위하고 있던 아르티아의 기사들 또한 멍한 표정을 지으며 은현이 구현했던 환상 속의 과거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니아스 왕국 사람들 중,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은현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리오드가 유일했다.

“이게 페르니아스 왕국의 건국 초기에 있었던 사건의 실제입니다.”

은현은 천천히 입을 열어 그들을 상념 속에서 일깨웠다.

얼굴을 굳힌 유리아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읊었다.

“왕국 역사서에는…. 힘을 다하고 죽어가는 신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유해를 땅에 묻고 왕국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그 역사서를 믿든, 제가 재현한 환상을 믿든 그건 왕녀님의 자유겠지요.”

하지만 어느 쪽을 믿을지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유리아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그렇다.

책으로만 구술된 선조의 역사보다, 자신의 두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던 환상 세계의 이야기는 더더욱 현실성을 띄웠다.

은현은 여기에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초대 국왕 오르타스는 구미호에게서 빼앗은 여우 구슬을 자신의 몸 안에 집어넣었고 새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신수의 힘을 사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약소국에 불과했던 페르니아스는 전쟁에서 이긴 상대 강대국들을 무릎 꿇리고 그 영토를 빼앗았다.

힘에 의해 짓눌려 패배가 예정되었던 결과가 전혀 다른 반대의 결과로 이어진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이후엔 강대국의 영토를 자국의 영토로 삼아 승승장구한 성장세를 보이며 지금의 페르니아스 왕국으로 거듭나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문제는 생겼죠.”

“…문제라고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은현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리아만이 반문했다.

“네. 강력한 신수의 힘이 응축된 여우 구슬을 삼킨 초대 국왕, 오르타스의 몸에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신수의 힘은 평범한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힘이 아니다.

오르타스가 그 힘의 근원인 여우 구슬을 삼키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구미호로부터 한번 힘을 공급받아 체내에 내성이 생기고 적응의 발판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작스레 강대한 기운이 응축된 여우 구슬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내성이 생겼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르타스는 막대한 신수의 힘으로 인해 빠르게 수명이 깎여나가는 부작용을 해결하려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다른 육체에 자신의 영혼을 정착시키는 방법이었죠.”

“다른 육체로 영혼을 정착…. 그건…!”

유리아는 은현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빠르게 이해했다.

만약 초대 국왕인 오르타스가 사망하고, 그의 영혼만이 다른 육체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단이 존재했다면, 지금까지 오르타스가 살아있다는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의 영혼과 신수의 힘 일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육체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의 핏줄을 이어받아 세상에 태어난 왕족들이죠. 즉….”

은현은 자신이 밟고 있는 관을 발로 걷어차자, 안에 들어있는 현 국왕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으….”

은현의 투창으로 인해 머리가 으깨져 버려 심각하게 훼손된 시신의 몰골은 너무나도 끔찍하였으나, 그것을 뒤덮는 충격적인 사실이 유리아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현 국왕인 안드레아 페르니아스 또한 그 내면의 본질은 오르타스 페르니아스였다는 뜻이 됩니다.”

“무슨….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디아네 왕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은현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정했다.

“믿기지 않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왕비님은 또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불길한 상상을 하게 되실 테니까요.”

“으…!”

정곡을 찔린 듯 디아네 왕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그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상상은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 또한 어쩌면?’이라는 불길함을 낳는 씨앗이다.

아닐 거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처음부터 끝까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일관했던 자기 아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데미안…?”

“…….”

데미안 왕자는 어머니인 디아네 왕비의 간절한 부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오로지 은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런 아들의 태도에 디아네 왕비는 가슴 속의 불안감이 증폭되어가는 것을 얼버무리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들의 몸을 빼앗은 것이 아들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남편인 국왕, 심지어 그 본질이 머나먼 선조인 초대 국왕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지금까지 재현한 제 이야기에 틀린 부분이 있었나요. 데미안 왕자? 아니…. 초대 국왕 오르타스 페르니아스.”

은현은 몇백 년을 가까이 숨겨왔던 그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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