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92화 (475/730)

〈 492화 〉 492. 여우의 과거(3)

* * *

오르타스의 권유로 결계를 해제하고 바깥으로 나온 구미호는 물끄러미 하늘을 응시했다.

“…….”

그동안 동면에 들어가 오직 힘의 회복 만을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굉장히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온 것치고는 체감상으로는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끼지 않았다.

“…많이 변했군.”

하지만 두 눈에 들어온 바깥의 풍경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자신의 사당은 녹색의 자연이 가득한 숲의 중심에 있었다.

거대한 폭포수에서 들려오는 청량한 물소리와 자연의 풍요가 가득한 풍경은 사라져버리고 칙칙한 늪지대가 형성된 이곳은 매우 고요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있는데, 구미호는 눈앞의 이 풍경을 보고 자신이 잠이 든 이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일단 내가 사는 곳으로 너를 안내할게.”

구미호의 협력을 얻을 수 있게 된 오르타스는 앞으로의 계획을 구미호에게 설명했다.

먼저 그녀에게 신분이라는 것을 취득시키고, 군대에 입대시켜 자신의 파트너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손을 써둘 것이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찰대에 소속되어 전선에서 마수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군대라는 것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지인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건가?”

왕국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군데인데, 첩자일 가능성도 존재하는 타지에서 온 외지인을 그렇게 내부로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 사회에 대해서 잘 아네?”

“알기는 알지.”

애초에 구미호는 자연의 마나뿐 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정기를 흡수하며 요력을 축적하는 특성을 지닌 존재.

그 대상이 되는 인간들의 습성이나 사회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까 말했던 대로 내가 손을 써둘 거니까.”

“너는 그 군대라는 곳에서도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건가?”

“낮지는 않지. 적어도 동행하게 된 지인의 신분을 보증할 정도는 돼.”

오르타스는 자신이 속해있는 왕국 정찰대 내부에서도 실력 있는 에이스로 알려져 있으며 나름대로 지위도 가지고 있었다.

구미호의 신분을 어떻게든 얼버무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평범한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의 조건이 성립할 경우지만.

“그보다 그…혹시 그 모습 바꿀 수 있을까?”

“흠? 아, 그렇군.”

구미호는 자신의 행색을 보고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수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여우귀는 그렇다 쳐도, 뒤에서 살랑이고 있는 은백색의 풍성한 아홉 꼬리는 너무 눈에 띈다.

물이 빠지듯 검은색으로 변모하는 머리카락과 형체 없이 사라지는 꼬리들을 보며 오르타스는 놀란 표정을 보였다.

지금 구미호의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 여성의 모습 그 자체다.

“…….”

하지만 어깨의 살결을 그대로 드러내는 오프 숄더 형태의 상의를 슬쩍 보고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흐음?”

“크, 크흠….”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는 오르타스의 모습을 본 구미호는 그의 내면에 있는 감정을 읽어 들이며 피식 웃어 보였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요력은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는 매혹의 성질이 존재하는 특수한 힘이다.

특히나 건장한 나이대의 청년에게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 감정을 참아내기는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맨살을 강하게 의식하면서도 그 본심을 얼버무리고 억지로 숨기려 하는 이유는 그가 구미호 자신을 욕망의 대상보다도 협력 관계를 더욱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미호는 마수의 토벌을 돕고, 오르타스는 그에 대한 대가로 그녀에게 양질의 마력을 제공하는 관계를 중시하고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그의 노력이 꽤 귀엽게까지 보였다.

그동안 이 요력에 홀려 자신을 저속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다른 인간 남성들과는 다른 반응과 대우에 구미호는 흥미를 품었다.

‘조금은 여흥으로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구미호가 오르타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순전히 그가 가지고 있는 양질의 마력이 탐나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오르타스라는 개인의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구미호는 오르타스의 배려와 준비로 왕국군 군대에 신분을 숨기고 입대를 할 수 있었고, 오르타스의 추천으로 그의 파트너로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마수의 위협을 넘길 수 있었다.

약 5년의 세월이 지나 많은 공적을 쌓으며 군대 내부에서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결과.

하지만 오르타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영웅의 대접을 받고 지위와 명성이 올라가고 있음에도 전선에서 활동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너는 어째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지?”

구미호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생각해보면 오르타스는 처음부터 그랬다.

사적인 감정과 욕구보다도, 군인으로서 마수를 토벌하는 임무를 더욱 중시하며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아무리 평범한 인간보다 압도적인 마력을 보유하고 있고, 젊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육체를 혹사하고 전선에서 입은 상처들이 누적되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육체는 너무나도 쉽게 망가지게 마련이다.

군 내부에서도 압도적인 공훈을 쌓으며 영웅의 대접을 받는 오르타스 또한 그와 같은 전철을 밟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오르타스의 육체는 점점 더 노쇠해져 목숨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구미호는 물은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본인의 목숨을 깎아내며 계속 싸움을 고집하고 있는지.

오르타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구미호의 물음에 답했다.

“사람들을 지키고 싶으니까.”

그저 그것뿐이다.

이 전선이 뚫린다면, 그 뒤에 있는 민간인들은 무력하게 마수들의 이빨에 팔다리를 찢기고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

마수들과의 전쟁은 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아직도 지속하고 있었다.

많은 군인이 죽어 나갔고 보충되는 병력은 날이 갈수록 감소하는 추세.

이대로라면 전선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심지어 군대와 왕국의 수뇌부들은 이 전쟁이 가망이 없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수도를 버리고 도피까지 해버린 더 암울한 상황.

보급은 끊겼고 더불어 이 이상의 지원병력도 기대할 수 없었다.

왕국군과 마수들의 싸움은 마수들의 승리가 거의 확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르타스가 전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앞장서서 마수들의 토벌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재 전선에 남아있는 군인들 모두가, 자기 죽음을 직감했으면서 오르타스의 뜻에 동조하여 남아있었다.

그 이후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많은 생명이 마수들에 의해 짓밟히고 으스러져 무참하게 물어뜯기는 상황을 차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키고 싶었다.

“미호. 너와 나 사이에 맺었던 약속은 이제 끝났어.”

“…….”

오르타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구미호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제 무리하게 혹사한 그의 육체에는 더는 구미호에게 제공할 양질의 마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말라가는 육체는 계속해서 노쇠해져만 가고, 체내를 맴돌던 양질의 마력은 점점 줄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점점 자신의 끝을 조금씩 직감하고 있었다.

“즐거웠어.”

진심이 담겨있는 오르타스의 작별 인사를 들은 구미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과 작별을 결심하고 노쇠해진 몸을 이끌어 이곳에서 싸우다가 죽을 것을 결심하는 그의 마음가짐이, 그 마음속에 자신은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싸워왔으면서 느닷없이 자신과 작별하려 하다니, 그에게 있어 자신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다는 뜻이었을까.

“…누구 마음대로.”

이제는 정이 들어버렸달까,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구미호는 적어도 이런 식으로 그를 떠나보낼 생각이 없었다.

가까이 오르타스에게로 다가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구미호가 요력을 방출시켜 그의 몸속에 불어넣었다.

구미호의 고유능력인 ‘에너지 드레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그의 몸속에 양질의 마력을 불어 넣었다.

“미, 미호!?”

당황하는 것도 잠시, 오르타스는 자신의 몸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깜짝 놀라며 본인의 몸을 점검했다.

잃어버렸던 강대한 마력이 몸속을 누비며 점점 노쇠해져 갔던 육체를 본래의 건강한 상태로 되돌려놓고 있었다.

“이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오르타스의 시선을 받은 구미호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난 아직 약속을 깰 생각이 없다. 살아라. 계속…. 계속 살아서 나와 맺은 약속을 지켜라.”

“…….”

이런 식으로 본인의 마력을 소비하여 자신을 되살렸다 한들,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오르타스는 구미호의 말이 그저 자신의 몸 상태를 회복시키기 위한 변명과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미호는…. 솔직하지 못하네.”

“흥.”

“고마워.”

솔직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구한 구미호의 따뜻한 배려에 순수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다시 노쇠해져 갔던 육체를 회복한 오르타스는 구미호와 함께 다시 전선에 복귀하여 마수들을 토벌하면서 필사적으로 전선을 지켜나갔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마수와의 전쟁은 기적적으로 왕국군 측의 승리로 결정지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황폐해진 대지와 감소한 인구수, 도망친 수뇌부들이 버려버린 이 땅은 더는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미호. 나는 나라를 세울 생각이야.”

왕족들과 수뇌부들이 버리고 도망친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오르타스는 결심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나라.”

다행히도 이 전쟁 속에서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았으며, 그를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뜻을 한데 모았다.

오르타스가 원하는 나라는 아주 간단하다.

“악마나 마수들의 위험에서 안전한, 나의 백성들이 올바른 생을 맞이하고 막을 내리는 그런 나라를 만들 거야.”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마수들의 위협에 시달려 불안에 빠져 있던 백성들을 보고, 오르타스가 가슴 속에 품었던 염원이다.

더는 마수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맞이한 평화 속에서 천수를 누리며 끝을 맞이하는 그런 나라.

“아마도 굉장히 힘들 길이 되겠지. 그래도….”

오르타스는 구미호를 응시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와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흥.”

직설적인 그의 말에 구미호는 시선을 피하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런 그의 화법이 그렇게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자신에게 내민 손은 마치 처음 자신의 사당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던 5년 전의 그때 그 상황과 겹쳐 보이기까지 했다.

“앞으로도…평생 나와 함께 해줄 수는 없을까?”

구미호는 올곧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오르타스의 두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굳이 감정을 읽어 들이지 않아도 오르타스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의 육체를 부활시켜주었던 구미호의 호의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며 던진 오르타스의 도박수였다.

혹시라도 구미호가 거절하고 자신의 곁을 떠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상상을 하며 침을 삼키고 있을 때, 마침내 구미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스스로도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인간과 함께한다는 선택은 이전의 구미호였다면 절대로 고르지 않았을 선택지다.

지금도 제대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이 감정의 이끌림에 의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음에도, 구미호는 그리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구미호의 승낙을 들은 오르타스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이것이 새로운 나라, 페르니아스 건국의 시작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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