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9화 〉 489. 수문영지 티르니스(3)
* * *
짐을 풀어둔 호텔의 객실로 돌아오자, 객실 내부에서 은현과 엘레노아, 에린을 제라드가 맞이했다.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은현은 제라드의 인사를 받으며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왔군.”
팔짱을 끼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던 구미호가 은현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의 몸집보다도 거대한 아홉 꼬리가 침대 위에서 살랑거리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아주 좋다.”
호텔의 객실 내부에 미리 작동시켜둔 게이트를 통해 이곳으로 넘어온 구미호는 간단하게 자신의 마력을 방출시켜 보았다.
우우웅
객실 안을 가득 채우는 신수의 마력은 굉장한 밀도를 자랑하여 사람들에게 큰 압박감을 선사했다.
은현의 경우에는 신력을 방출하여, 엘레노아는 신성력으로, 제라드는 기린의 마력을 이용해, 에린 또한 마찬가지로 각자의 방법으로 구미호의 마력에 대항했다.
“으….”
평소 겪어보았던 수준이 아닌, 진짜 구미호의 힘 일부는 숨을 옥죄어올 정도로 밀도가 높다.
에린과 엘레노아는 작게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단련을 통해서 구미호의 힘 일부를 경험해보았다지만, 그것을 직접 직면하는 것은 아직 익숙지 않았다.
그것은 신성력을 다루는 엘레노아 또한 마찬가지.
유일하게 얼굴색을 바꾸지 않고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은현과 제라드뿐이다.
“대단하십니다.”
“흥. 얼굴색 하나도 바뀌지 않았으면서 빈말은.”
은현의 칭찬에도 구미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아닙니다. 미호님! 미호님의 힘은 현이 형님의 말씀대로 정말 대단하십니다!”
“…….”
열렬한 신봉자가 된 제라드의 격려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뚱한 표정을 보이는 구미호는 깔끔하게 제라드의 말을 무시하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굳이 번거롭게 이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느냐?”
구미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신수님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죠.”
“이 모습은 언제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데?”
방안을 가득 메운 신수의 마력을 거둬들이고, 살랑거렸던 아홉 꼬리와 여우 귀가 사라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평범한 인간 여성의 외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육체를 실체화시킬 이유도 없지.”
은현과 일리아나, 에린의 조력으로 인해 새롭게 제작된 여우 구슬 속에 들어가고, 그 구슬을 운반하기만 한다면 자신은 처음부터 은현 일행을 따라올 수 있었다.
굳이 지금까지 꼭꼭 숨겨 두고 있는 게이트라는 기술을 활용하여 구미호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필요도 없이, 그냥 처음부터 동행을 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말해라.”
“첫 번째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신수님의 정체가 혹시라도 탄로가 날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이제와서 내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자는…. 아니. 잠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반론하려 했지만, 은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구미호의 미간이 좁아져 갔다.
은현의 말을 이해한 구미호는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은현에게 되물었다.
“확실한 것이냐?”
“확신하고 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확신에 차 있는 은현의 표정을 본 구미호는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
이윽고 납득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번째 이유는?”
“신수님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구미호의 힘은 지구에 있을 적, 전성기 때와 비교를 하면 십 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 전력이다.
현재 던전 내부에 지어진 사당은 정기적으로 밀도 높은 양질의 마력을 주입받아, 그 기운을 한데 모아 응축시켜 갈무리함으로써 조금씩 과거의 힘을 회복시키기 위한 특별한 곳이다.
만약 여우 구슬 속에 들어간 상태로 정체를 숨기고 동행을 한다면 지금껏 회복시킨 마력을 보존시킬 수는 있어도, 더 많은 마력을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20보다 30, 40의 수치가 더 효율이 좋은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다.
“…즉, 나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네 녀석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은현은 국왕의 서거를 기점으로 그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이 원정 속에서 어떠한 싸움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확신에 가깝게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이 은현이 구미호와 나누었던 약속을 지키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것을 위해 은현은 구미호의 존재 자체를 지금까지 꼭꼭 숨겨 두고 있었다.
나중에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를 만들어내는 조커 카드로서.
“하하.”
인간을 초월한 영험한 존재인 자신, 신수를 이용하겠다는 은현의 생각은 평소였다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그의 의도와 행동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좋다. 네 의도와 계획을 말해라.”
이번만큼은 무작정 날뛰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계획에 따라주겠다는 구미호의 아량에, 은현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드립니다.”
◆ ◆ ◆
다음 날.
뒤늦게 합류하게 된 제라드는 이번 원정대에 자연스레 합류할 수 있었다.
아르티아의 기사단장인 리오드의 전우이자, 그와 함께 여섯 영웅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제라드의 합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무슨 의도로 이 원정대에 합류를 한 것인지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전 흡혈귀 소탕 작전에서도 함께 나서주며 큰 공훈을 쌓아주었던 그를 의심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디아네 왕비는 조금 수상쩍었지만, 뒤늦게 나타난 제라드의 합류를 받아들였다.
“우와아….”
티르니스령의 선착장에 준비된 거대한 범선을 올려다본 에린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경악을 토로했다.
태어나서 배라는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인데, 수백, 또는 천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배는 에린의 두 눈을 반짝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멋지다!”
선체도 선체지만, 위로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커다랗고 기다란 수십 개의 기둥과 그곳에 매달려 있는 돛들이 바닷바람에 휘날려 펄럭이고 있는 장면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럴 때 보면 신체적인 나이만 성숙해졌지, 내면은 아직도 어린애가 따로 없다.
그 모습을 본 은현과 엘레노아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국왕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과 함께 모든 왕족과 기사들, 병력이 탑승을 마치자, 티르니스 백작은 디아네 왕비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럼 출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디아네 왕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키를 잡은 티르니스 백작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출항이다!”
범선 전체에 울려 퍼지는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실려있는 그 한마디에, 범선에 탑승한 선원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와아…. 백작님이…. 직접 운행하시는 거야?”
“그야 사안이 사안인만큼, 그럴 수밖에 없겠지.”
에린의 질문에 은현이 담담히 답했다.
무려 국왕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항해다.
당연히 탑승한 승객들 또한 왕족들인데, 이 항해에서 어떻게 티르니스 백작 자신이 영지에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은현의 답에 이어서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는 것은 역시나 엘레노아였다.
“어제도 말했지만, 티르니스령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영민들의 보호와 영지의 운영 이외에도 또 하나의 역할이 존재해.”
그것은 페르니아스 왕국의 역대 왕족들의 묘가 안장된 섬, 오르비스로 가기 위한 범선의 제조와 관리디.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왕족들을 오르비스로 안내하는 것’까지 포함이 되어 있다.
페르니아스 왕국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왕족들을 모두 태운 범선의 항해가 혹시라도 어떠한 불상사와 직면하여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티르니스 가문이다.
“그래서 티르니스 백작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항해술을 익히고 있고,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오르비스로 항해를 하는 훈련을 해.”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의 사망은 미리 예측이나 예고를 할 수도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라도 왕가의 명령이 떨어지면 곧장 출항할 수 있는 선박과 선원들을 상시 대기시켜두는 것이 티르니스령의 주된 역할이다.
“여기 있는 선원분들 모두…. 이날을 위해서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왔다는 뜻이네요?”
“그렇지.”
엘레노아의 긍정을 들은 에린은 망설임 없이 분주히 움직여 맡은 바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선원들을 조용히 관찰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갑판 위를 뛰어다니고 물건을 운반하여 바쁜 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는 거침이 없다.
몇 번, 몇십 번을 반복한 움직임인지, 서로서로 움직임을 보조하고 맞추며 일을 처리해나가는 그 모습들은 마치 모험가 업계에서 몇 년을 동고동락하며 구른 베테랑 모험가들을 연상시켰다.
장소와 대상, 조건이 다를지언정 그들 또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고, 바다 위인 이곳은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현 국왕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오르비스로 향하는 항해는 출발했다.
항해 자체는 매우 순조로웠다.
순풍을 만난 범선은 더욱 가속하여 오르비스를 향해 거리를 좁혔으며, 몇 번이고 훈련을 거듭하면서 쌓인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된 베테랑 선원들과 선장의 지휘 아래에 설정된 항로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해양 마수라도 만나게 된다면 언제라도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는 선원들 사이에서 티르니스 범선의 항해는 큰 문제 없이 오르비스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생했어요. 티르니스 백작.”
항해를 마치고 하선한 디아네 왕비가 티르니스 백작의 노고를 치하했다.
티르니스 백작은 오른쪽 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왕족에게 보이는 최고의 예우를 보였다.
“제 대에서 왕가를 모실 수 있게 되어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번 일의 계기인 국왕의 서거 소식이 누군가에게는 명예로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티르니스 백작 가문에 있어서는 수백 년 동안 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오는 왕가의 안내역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복귀가 남았으니, 저희의 역할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닙니다.”
국왕의 장례를 모두 마치고 왕족과 승객들을 모두 무사히 수도 페르닌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끝까지 안내하는 것이 티르니스 백작가문의 역할이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티르니스 백작은 이 너머 역대 왕족의 묘까지 동행하지 않았다.
그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오르비스 섬까지의 안내역.
서거한 국왕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같은 왕족들과 그들을 보필하는 호위들의 몫이다.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네 명의 병사들이 들어 올리고, 디아네 왕비와 다른 왕족들의 선두로 이어진 기나긴 행렬의 끝에 존재했던 것은 거대한 유적이었다.
“…신전?”
마치 신전처럼 기품이 흘러나오는듯한 고대 유적의 외관에 에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게 페르니아스의 역대 국왕들의 묘가 안치된 장소. 오르비스 유적이야.”
“…….”
은현의 설명을 들은 에린은 물끄러미 오르비스 유적을 응시했다.
기묘했던 것은 그 유적의 겉면이다.
풍화된 흔적이나 이끼가 낀 흔적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마치 갓 지어진 새 건물처럼 보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호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껏 모험가 활동을 통해서 에린이 보아왔던 유적과는 명백히 이질적이다.
그 유적의 입구에 모두가 시선이 쏠려 뒤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은현은 다리에 힘을 싣고는 하늘 높이 점프했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은밀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순간, 그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은 몇 되지 않았다.
포착하였음에도 무언가 대응을 하기도 전에, 은현은 자신의 파트너인 한 자루의 창을 소환했다.
[신화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
[소환, 브류나크]
애용하는 무기 중 하나인 브류나크를 오른손에 꼭 거머쥐고 하늘 위에서 허리를 비틀어 창을 뒤로 끌어당겼다.
‘위력은 약하게.’
자칫 잘못하다간 다른 병사들까지 휘말릴 우려가 있어 위력을 최하 중의 최하로 조정한다.
팔에 힘을 실어두고 단단히 고정해두었던 허리를 다시 비틀어 있는 힘껏 브류나크를 집어던졌다.
[브류나크 창술]
[천벌]
하늘 위에서 대기를 가르고 아래로 떨어지는 한줄기의 섬광은 질량을 가지고 있는 벼락 그 자체다.
콰아앙!
은현이 조준한 목표물은 현 국왕인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시신이 담겨 있는 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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