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87화 (470/730)

〈 487화 〉 487. 수문영지 티르니스(1)

* * *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국물을 멍하니 응시하는 야영지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현재 왕족과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단 병력과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자리 잡은 은현의 야영지는 타닥타닥 들어가는 모닥불 속의 장작 소리와 냄비 속에서 끓는 라면의 소리만이 가득하다.

결국,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에린이 슬쩍 엘레노아에게 손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엘레노아님. 대체 저 음식이 뭔데 왕녀님이 저러시는 거예요?”

“글쎄….”

엘레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제로 지금 은현이 준비하고 있는 라면이라는 음식에 대해서는 엘레노아도 알고 있는 바가 전혀 없다.

엘레노아의 전생, 은현의 불멸자에 대한 비밀은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며, 에린은 아직 유리아가 전생에 지구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지구에서 살았다는 공통점을 이용하여, 나중에 유리아에게 제시할 수 있는 좋은 카드를 얻기 위해 밑밥을 깔아두려는 은현의 계획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설마 저 저렇게 광적인 반응을 보일 줄은 그녀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색깔만 보면 진짜 맛없게 생겼는데….”

에린은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라면을 응시하며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였다.

새빨간 국물 속에서 익어가고 있는 면발과 채소들을 보고 있자니, 그냥 외관만 보기에는 악마들이 먹는 음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비주얼이다.

“뭐, 이쪽에서는 이런 색깔의 국물은 흔하지 않으니까.”

페르니아스 왕국을 비롯한 아르케나 대륙 대부분의 기본적인 주식은 밀가루나 옥수수, 우유 등을 이용하여 만든 스프와 빵이다.

하얀색이나 그와 비슷한 밝은 계열의 스프들이 주가 이르는 만큼, 눈앞의 새빨간 스프에 대해서는 그만큼 낯설 수밖에 없다.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않아도 돼. 실제로 조금 매울 거야.”

엘레노아와 에린이 먹을 음식도 이미 따로 챙겨 원정을 나왔다.

이번에 개발한 라면 스프는 본래 페르니아스 왕국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타국의 매운 향이 강한 향신료다.

아마도 에린이나 엘레노아에게는 그다지 익숙지 않은 음식일 터.

은현이 이것을 이번 야영지에서 저녁 메뉴로 내놓은 목적은 순전히 유리아를 낚을 의도뿐이었다.

“으음…. 그래도 일단은 먹어볼래.”

요즘에는 릴리가 차려준 밥을 먹는 게 일상이 되었지만, 릴리가 오기 전에 집안에서 요리의 담당은 은현이었다.

그의 요리 실력을 알고 있는 만큼, 에린은 무작정 거부하지는 않았다.

비주얼 자체는 정말로 먹기 망설여지지만, 은현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인지, 사실 전혀 먹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요리에 대한 호기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직이에요? 다 된 것 같은데?”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며 익어가는 라면을 응시하고 있던 유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좀 더 익혀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에요! 라면은 완전히 익기 전에! 꼬들 거릴 때 먹어야 하잖아요!”

“그거야 개인 차이이지 않습니까.”

“저는, 저는 꼬들파에요!”

당장하게 자신의 취향을 밝히는 유리아의 태도에 은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는 그릇에 라면을 담아주어 유리아에게 건넸다.

“…….”

꿀꺽

그릇을 받은 유리아가 아래에서 올라오는 라면의 냄새에 침을 삼켰다.

이제는 다시 맡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그 냄새는 유리아의 머릿속에 아주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함께 받은 젓가락을 이용하여 면발을 집고는 곧바로 입안에 면을 집어넣었다.

“……! 읍!?”

뜨거운 면발에 배어있던 스프의 국물이 입안에 가득 퍼져, 유리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꼬들꼬들한 면발

그 반응이 너무나도 격하여 옆에 있던 에린이 독이라도 탄 게 아닐까 싶은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며 유리아의 반응을 기다렸다.

면을 이미 모두 삼켰음에도, 매콤한 양념의 향기가 계속 잔류하여 입안을 맴돌았다.

“아….”

유리아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맛에 작게 탄식하며 몸을 떨었다.

후릅!

멈칫했던 젓가락을 움직여 면발을 빨아들이며 식사를 재개했다.

후루릅!

그릇째로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대어 면을 모조리 먹고, 그것도 모자라 국물을 꿀꺽 마시는 그 모습에는 일국의 왕녀로서 교양과 기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추억의 식사를 재현하여 지구라는 과거의 시절에 있었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하며 라면을 흡입하는 데 열중했고.

“하아….”

유리아가 식사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면은 물론, 그릇 속의 국물까지 모조리 비운 유리아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미소를 짓는 유리아를 보고 에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왕녀님. 그렇게 맛있으셨어요?”

“…응.”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이내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근데 좀 덜 맵네요? 더 맵게는 할 수 없었나요?”

“그렇게 만들면 엘레노아와 에린은 못 먹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네요.”

유리아는 아쉽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재현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현의 말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말은 여기서 더 맵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렇긴 하죠.”

“…좋아요.”

라면은 이번 한 번만으로 끝이 아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또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후의 즐거움은 다음으로 미뤄두자고 생각을 하면서, 유리아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안에 맴도는 라면의 냄새가 가져다주는 여운을 즐겼다.

‘살아있길 잘했어.’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유리아의 눈가에 한줄기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왕녀님. 후비님께 보고를 드렸…. 왜 울고 계십니까?”

뒤늦게 다시 은현의 야영지를 찾아온 알렉스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지그시 감고 있는 유리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을 것을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엘레노아와 에린은 차마 ‘라면이 너무 맛있어서 울고 계신다.’라고는 말할 수가 없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 ◆ ◆

페르닌에서 출정한지 약 2주.

장기간에 걸친 왕가와 아르티아 기사단의 마차 행렬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끝을 맞이했다.

곧바로 검문을 받고 성문을 넘어서자마자 보인 광경에 에린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와아…!”

햇빛이 반사되어 비치는 푸른색의 파도가 치는 망망대해는 끝이 보이지 않아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보석과도 같다.

에린은 살면서 난생처음 보는 바다를 보며 감탄했다.

“에린은 바다 처음 보니?”

“네! 처음이에요!”

페르닌에서 태어나, 수도 밖으로 나가 생활하게 된 계기는 은현과 함께 이주했던 것이 시작점이다.

그 이전까지, 에린은 20살이 되어가면서 단 한 번도 바다라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모험가 일을 하면서 최근에야 곳곳을 탐험해본 경험은 있었지만, 에린에게 있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바다라는 광경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신세계와도 같았다.

“아쉽지만 이번에 이곳에 온 건 일 때문이니까. 관광은 나중에 하자.”

“으으. 그렇죠. 알겠어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엘레노아의 손길에 에린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꾹 참아야만 했다.

먼저 앞서 선행하고 있는 디아네 왕비의 마차 행렬은 현재 이 영지, ‘티르니스’를 관리하는 영주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티르니스….”

에린은 이 영지의 지명을 입으로 읊조리며 머릿속의 기억을 떠올렸다.

최근 엘레노아에게서 페르니아스 왕국의 역사나 지리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 영지의 지명도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분명 ‘수문영지(?門?)’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맞아. 기억하고 있구나?”

“그럼요. 엘레노아님이 가르쳐주셨잖아요.”

배운 지식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았기 때문인지, 에린의 표정은 매우 뿌듯해보였다.

“그럼 이 영지가 왜 ‘수문영지(?門?)’라고 불리고 있는지 기억하니?”

“어…. 아! 저 문! 저 문 때문이에요!”

에린은 계속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고는 마차 안에서 창 너머 바다와 영지의 경계에 설치된 두 개의 거대한 수문(?文)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열려있는 수문으로부터 흘러들어온 해수가 영지 내부에 설치된 거대한 수로를 타고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다른 곳에 설치된 수문을 통해 바닷물이 빠져나간다.

“저 수문이 보통 영지의 검문 역할을 한다고 들었어요.”

“맞아.”

엘레노아는 에린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니스령의 바다와 인접한 곳에 설치된 두 개의 수문은 항해를 통해 내부로 들어오거나 외부로 나가는 선박들을 관리하는 검문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영지의 내부에는 저 해수를 끌어다가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지대 또한 존재한다.

티르니스령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페르니아스 왕국의 주요 특산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은현이 라면을 개발하기 위해 사용했던 향신료들 또한 이곳으로 입국하는 상선들이 유통하는 주요 상품 중 하나.

티르니스령은 현재 타국과 비교를 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활발한 해상무역의 중심이이기도 하다.

“그럼 이 영지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역할에 대해서도 한번 말해 볼래?”

“어, 으음….”

기본적으로 영지란 영토 내에 속해있는 백성들, 영민들을 잘 보호하고 그들을 관리하는 행정구역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도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는 영지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페르니아스 왕국의 국경을 최전방에서 수호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모그라프 변경령이 그러하다.

마수를 비롯한 외적의 침입을 최전선에서 차단하는 특수한 역할을 부여받은 만큼,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서 가장 위험도가 높아, 가장 고생하는 영지라는 웃을 수 없는 오명도 있었다.

에린은 지난 마수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마수 범람 사태 때, 상처를 입은 많은 사람을 목격하면서 그 참상의 일부를 직접 체험해보았다.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모그라프 변경령처럼, 현재 방문한 이 영지 티르니스에도 어떤 특수한 역할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에린은 곧바로 이 영지의 지리적인 특성을 떠올렸고 자신의 추측을 입에 담았다.

“바다에서 오는 적들의 공세를 막는 건가요?”

모그라프 변경령이 산과 땅 위에서 몰려오는 외적들로부터 왕국을 수호한다면, 티르니스령은 바다에서 오는 외적들로부터 왕국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게 아닐까?

에린의 추측은 매우 단순했다.

“맞아. 그러면 또 하나는?”

아쉽게도 티르니스령에 부여된 역할은 영민들의 관리와 해상에서 오는 외적의 침입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존재했다.

“죄, 죄송해요…. 그 이외에는…. 헤헤.”

에린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애써 민망함을 숨기려 노력했다.

분명히 엘레노아가 설명해줬을 텐데, 자신의 머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힌트를 줄까?”

그런 에린을 도와주기 위해서,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현이 웃으며 나서주었다.

“힌트?”

“우리가 이곳에 왜 왔는지를 한 번 떠올려봐.”

“어…. 그러니까 분명 왕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어?”

머릿속에 생각이 미친 에린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엘레노아에게 물었다.

“왕국의 선대 국왕분들의 묘가…. 이곳에 있나요?”

“그건 아니야. 정확히는…. 이 영지는 그곳을 거쳐 가기 위한 중간지점에 불과해.”

이 영지를 거쳐 가야 하는 곳이라면, 떠오르는 곳은 당연히 육지가 아닌 바다 위다.

“그럼…. 설마…?”

“맞아. 페르니아스의 역대 국왕분들이 안장되어 계신 곳은 이 대륙에는 없어.”

엘레노아는 마차의 창 너머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티르니스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역대 왕족들이 안장되어 계신 섬. ‘오르비스’로 가기 위한 범선의 제조와 관리 보수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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