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6화 〉 486.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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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주일 뒤.
페르니아스 왕국의 현 국왕,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서거 소식이 왕국 전체에 퍼졌다.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은 그 소식으로 인해 어두운 분위기를 맞이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병환으로 인해 오랫동안 앓아누워 국정을 왕비에게 맡겨야만 했던 암울한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변화를 맞이하는 시작점이다.
그 여파로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뒤를 이을, 공식적인 차대 국왕이 누구로 결정을 짓느냐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파벌 싸움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많은 비리 귀족들이 척결되면서 청소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그만큼 왕국 내부의 주요 인사들이 부재중의 상태로 국정 운영이 제대로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왕의 서거로 1왕자인 데미안과 2왕자인 에반 중 누가 왕세자로 책봉을 받는지에 관한 결정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디아네 왕비의 아들인 1왕자의 것으로 돌아갔다.
경쟁 상대였던 파벌의 주요 인사인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은 이미 군무장관의 자리를 사퇴하고 궁정귀족의 자리를 포기했으며, 아직 미성년자인 에반 왕자와 달리, 적자에 해당하는 디아네 왕비가 대리청정을 통해 정권을 쥐고 있는 이상 당연한 결과다.
그리고 지금은 현 국왕의 시신이 담겨 있는 관을 운송하여, 다수의 고위 귀족들과 왕족들이 국왕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대거의 마차 행렬을 잇고 있었다.
“그럼…저희와 공작 가문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역대 페르니아스의 왕족들이 안장되는 장소를 목적지로, 대규모의 인원을 수용한 다수의 마차 안.
행렬의 끝쪽에서 뒤따라 달리는 작은 마차의 안은 리오드와 유리아, 다른 이들의 다양한 배려로 은현과 엘레노아, 에린을 제외하고는 동석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인지 제법 쾌적했다.
에린은 옆에 앉아 있던 엘레노아에게서 현재 왕국의 내부 정치 상황을 듣고 있던 에린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야기의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이 2왕자인 에반을 왕세자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에린도 알고 있었다.
맥락상, 원했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데미안이 차기 국왕으로 내정이 되었으니 이것은 사실상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이 졌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에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엘레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네?”
에린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어떠한 보복이나 견제를 예상하고, 그에 대해 대비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엘레노아의 생각은 다른 듯 보였다.
“에린. 어째서 우리가 헬레나 후비님 쪽의 파벌인 에반 왕자님을 지원했는지는 알고 있지?”
“네. 나쁜 사람들이 백성들을 착취하지 못하도록 그 왕자님을 왕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잖아요?”
“맞아.”
표현이 조금 단순하긴 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의 본질과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디아네 왕비와 그녀의 파벌 귀족들은 도를 넘어선 착취를 통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왕비를 앞세워두고, 뒤에서는 마치 자기 것인 양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억압하고 짓눌러, 이익을 착취한다.
무력하게 피해를 본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다.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전 가주였던 아브로스는 그런 귀족들을 견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리석은 우책을 범해야만 했다.
“우리도 떳떳하지는 못하지.”
엘레노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읊조렸다.
이 힘없는 백성 중에는 다름 아닌 에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권력에 취하고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여 국가 예산을 횡령하고 있었던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가문 사람이다.
이제는 가문에서 폐적되어 버려진 애슈턴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는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을 저질렀고, 고위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선민사상에 잔뜩 감화된 인물이었다.
아브로스는 그 잘못을 저지른 애슈턴을 곧바로 잘라내지 못했다.
피붙이인 자식의 정이라는 것은 그만큼 쉽게 잘라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도가 너무나도 지나쳐서 에린에게도 피해를 줬던 것을 생각하면, 엘레노아는 가끔가다 에린에게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에, 엘레노아님…. 저 이제 진짜로 괜찮은데….”
스스로 책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엘레노아를 보고 에린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엘레노아를 위로했다.
“아니야. 에린. 이건 네가 괜찮고, 안 괜찮고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확실한 우리 잘못이잖아.”
“그건….”
딱히 부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에린은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침체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에린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 그래서요? 에반 왕자님을 공작 가문에서 지원했던 이유는 저도 아는데, 결국 에반 왕자님은 왕세자가 되지 못했잖아요. 그러면 문제 아닌가요?”
자신의 기운을 차리게 해주기 위한 질문에 엘레노아는 쓰게 웃으면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이제는 그 귀족들을 견제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어? 없어져요? 왜요?”
“그야 이제 그런 딴생각을 품는 귀족들은 모조리 파면당했잖아. 지난 아르티아 기사단의 수사로.”
“…아.”
은현이 리오드를 통해서 아르티아 기사단에 페르니아스 왕국의 다수 귀족이 저지른 비리들을 제보하면서, 그들은 파면, 작위 몰수, 처형 등의 가혹한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현재의 페르니아스는 큰 파란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귀족 중에서는 딴생각을 품을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부실해진 내실을 다지고 다시 체제를 정비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다 쳐도, 나중에는 문제가 또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호랑이가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여유가 생긴다면, 다시 흑심을 품고 이전의 다른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을 핍박하는 귀족들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확실히 설득력이 존재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서줬잖니.”
엘레노아는 계속해서 쓰게 웃으며 옆에 앉아 있는 은현을 흘끗 가리켰다.
“…현이가요?”
“에린도 같이 가지 않았니? 지난 네슬라라는 마피아들을 처리하러 갔을 때.”
“아.”
에린은 뒤늦게 엘레노아가 하고자하는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네슬라 마피아를 처리해버렸을 당시, 은현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떠올렸다.
마피아의 보스인 펠론이라는 남자의 한쪽 팔을 없애버렸고, 그리고 동시에 마피아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지방 영지의 소영주 또한 펠론과 마찬가지로 가차 없이 한쪽 팔을 없애버렸다.
그것은 확실히 은현치고는 굉장히 거친 행동이었다고 에린의 인상 속에는 남아있었다.
“이 사람은 경고한 거야. 부정을 저지르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직접 아르미타스 공작령에 손을 댄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일부러 강하게 보여주고 자신의 행적이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 궁정 내부에서 이 사람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아니?”
“…아니요?”
에린은 괜히 긴장하게 되어 엘레노아의 말을 천천히 기다렸다.
“‘일을 저지르면, 수은의 뱀이 찾아와 팔 한쪽을 앗아간다.’라는 소문이 자자해.”
“…….”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사위이면서, 왕국 최고의 기사인 아르티아의 기사단장과 친분이 있는 은현은 이제는 왕국 내부에서도 쉽게 손댈 수 없는 존재로 급부상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딴 마음을 품을 수가 있을까.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욕심과 야심도 자신의 몸이 안전해지고 여유가 있을 때야 생겨나는 법이다.
어떠한 보복이 들어올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데, 그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는 멍청이는 없다.
강경한 은현의 행동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현재 왕국 내부에서 큰 위상을 자랑하고 있는 은현과 리오드가 있는 한, 귀족들은 딴생각을 품지 못한다.
“그랬구나.”
에린은 새삼 다시 보았다는 듯 은현을 바라보았다.
“그냥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공작령을 건드린 마피아들을 개인적으로 응징하는 것과 동시에, 그때부터 이런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하고 있었다니.
에린은 역시 은현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뭐, 살짝 열이 뻗쳤던 것도 있기는 했지.”
솔직하게 부정하지 않는 은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코인 상단이라는 곳과 비트와 도지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짜증이 났던 것은 사실이다.
은현의 대꾸를 받은 엘레노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본래의 목적대로 에반 왕자님을 왕세자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근본적인 목적 자체는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어.”
지금 현재 페르니아스 왕국 내부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당한 이익을 뽑아 먹으려는 딴생각을 품는 귀족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걸렸을 때의 형벌이 무서워서라도 그 우책을 범하려는 이가 없다는 표현이 옳다.
“지금은 아주 힘든 시기지만…. 다시 내실을 쌓고 체제를 갖추면 분명 정세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것은 은현의 행동 때문에 강제적으로 조성된, 엘레노아가 가지고 있는 희망적인 관측일 뿐이었지만, 그 전망 자체는 굉장히 밝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을 때,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갑작스레 정지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하겠다고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마차를 몰던 마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이 대꾸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이른 저녁의 시간이었지만,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왔던 말들을 일제히 휴식을 시키면서 컨디션을 회복시켜주는 것은 장기 운행에서 꼭 신경 써야하는 요소 중 하나다.
특히나 이렇게 약 백 명에 가까운 숫자를 수용한 마차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은현은 에린과 함께 각자 야영 도구가 든 배낭을 메어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고,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마지막으로 뛰어내린 엘레노아를 받았다.
“고마워요.”
은현의 품에 안겨 사뿐히 착지한 엘레노아를 내려주고, 세 사람은 능숙하게 야영 텐트를 설치했다.
멀찍이서 수십 명의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이 왕족들이 지내기 위한 천막을 설치하던 중, 두 사람이 은현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르티아 기사단과 같은 천막을 쓰지는 않으시는 건가요?”
유리아와 이번 원정에서 그녀의 전담 호위 역을 하게 된 알렉스였다.
기묘하게도 이제는 크라시르 기사단 소속이 아니었지만, 이전부터 전담 호위를 맡아왔던 알렉스는 이번 유리아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저희는 이게 편해서요.”
2년 동안 모험가 생활을 해오면서 야영에 익숙해진 에린이나, 그녀를 가르친 은현이나 편한 것은 이쪽이 당연했다.
은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천천히 조리도구들을 나열하고는 불을 지폈다.
“왕녀님께서는 어쩐 일로 저희를 찾아오셨나요?”
“…당신. 이번에 또 뭔가 꾸미고 있죠?”
“글쎄요.”
은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해오는 유리아의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무언가를 또 직감한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굉장히 수상쩍은 것을 대면한 것처럼 꺼림칙하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면 나도 뭔가 대응을…. 어?”
적어도 모종의 협력관계라면 정보를 공유 좀 하자고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유리아는 은현이 배낭 속에서 꺼낸 무언가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정성스레 빻은 듯 고운 주황색 가루가 가득한 용기.
그리고 함께 준비된 채소들.
마지막으로 딱딱한 정사각형으로 굳어, 물결치는 모양을 한 국수의 면.
지구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저게 뭔지, 왕녀님께서는 아십니까?”
저것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한 알렉스가 유리아에게 물었지만, 유리아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올곧이 주황색 스프와 딱딱하게 굳어있는 정사각형의 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 설마….”
이제는 하다하다 못해 라면까지 만들어 가져온 은현을 보며, 유리아가 기가 찬다는 시선을 보냈다.
유리아는 꽉 쥔 주먹을 부들거리더니 곧바로 은현에게 외쳤다.
“제 것도…. 저도 먹을래요! 그거!”
“예? 이거 말입니까? 그야 넉넉하게 준비해왔으니 상관은 없지만….”
은현은 곧바로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저녁 식사에 참여 의사를 밝혀온 유리아를 보고는 흘끗 그녀의 호위 역으로 동행한 알렉스의 표정을 살폈다.
“왕녀님. 헬레나 후비님과 에반 왕자님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게…! 라면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데…!”
“…라면?”
라면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알렉스로서는 갑작스러운 유리아의 변모가 매우 당혹스러웠다.
“…후우.”
왕족들이 사용하는 천막 안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이곳에서 밥을 먹겠다는 확고한 의사표시를 하는 유리아의 행동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비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
알렉스가 유리아의 돌발행동을 보고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지만, 유리아는 올곧이 은현의 손에 쥐어져 있는 라면과 스프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 내가 끓일까요?”
“…….”
에린은 살짝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왕녀의 돌발행동은 에린으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내면 감정을 읽어 들였기 때문인지 더더욱 당혹스럽다.
‘…흥분? 기대? 추억?’
은현은 쓴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왕녀님. 이거 끓여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네. 나중에 제 부탁 하나만….”
“좋아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 테니까 당장 끓여요. 지금 당장.”
유리아의 결정은 은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와 있었다.
마치 1분 1초라도 아깝다는 듯 빠르게 은현을 재촉했다.
유리아가 자신의 조건을 곧바로 승낙하자, 은현은 속으로 씩 웃었다.
‘좋아. 걸려들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