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5화 〉 485. 약속의 때(2)
* * *
“국왕 폐하의 서거 소식은 현재 궁정 내부에서도 일부밖에 모르는 극비 사안이에요.”
그러니 이 이야기는 외부로 발설하지 말아 달라는 유리아의 당부는 당연했다.
하지만 그 중대한 사실을 이 자리에서 밝혀도 되는 것일까.
“왕녀님. 그건…이 자리에서 언급해도 되는 사안도 아닌 것 같습니다.”
국왕의 서거 소식은 왕국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어떠한 파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외부인에게 이 사실을 발설할 리는 없겠지만, 왕녀라고는 해도 유리아 개인이 이 사실을 발설해도 좋다는 이야기는 또 아니다.
한마디로 매우 성가시다.
피가 이어진 아버지의 죽음이라고 가볍게 볼 수가 없는 국왕의 서거는 복잡한, 정치적인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유리아가 모를 리가 없을 터.
“당연하죠. 하지만 이번에는….”
이번에 유리아는 단순히 개인으로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품에서 작은 서신을 꺼내 은현에게 건넸다.
“흐음?”
유리아의 행동과 내민 손에 쥐어져 있는 서신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 은현에게 이 서신을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극비리에 밝혀지지 않은 국왕의 서거 사실을 공유하고 있고, 유리아를 중간으로 거쳐 은현에게 어떠한 부탁을 할 만한 인물은 그렇지 적지 않다.
은현은 이내 어떤 인물을 떠올렸다.
“디아네 왕비께서?”
“…맞아요.”
은현의 추측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에게 당신을 만나 이 서신을 전달하라는 부탁을 해온 건 디아네 왕비님입니다.”
“의외네요.”
“저도 그래요….”
작게 한숨을 쉬는 유리아도 심경이 복잡한 것은 마찬가지다.
디아네 왕비와 헬레나 후비는 정실과 첩의 관계로, 각자의 아들인 데미안과 에반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을 해오는 관계에 가까웠다.
말이 좋아 경쟁이지, 사이가 엄청 나빴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었던 디아네 왕비가 견원지간인 헬레나 후비의 딸, 유리아에게 부탁을 해왔다는 것은 그만큼 굉장한 일이다.
그래서 유리아 또한 매우 당혹스럽고 복잡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그만큼 왕비께서도 급하다는 뜻이겠죠.”
“…그렇군.”
담담하게 내뱉은 은현의 추측에 알렉스도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 디아네 왕비가 어떻게 해서든 의지를 하고 싶은 상대가 은현이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은현은 유리아가 건넨 디아네 왕비의 밀서를 펼쳐 그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흠….”
밀서의 내용을 읽은 은현은 생각에 잠겼다.
“무슨 내용이지?”
“국왕의 시신을 안장하는데, 호위를 부탁하고 싶다는 내용.”
“…그걸 굳이 너에게?”
리오드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네. 그리고 아르티아 기사단에도 호위를 맡길 예정이라고 쓰여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크라시르 기사단이 아닌, 아르티아 기사단에 국왕의 장례 행사에 대한 호위를 맡기고, 그 구성원의 일부로서 은현에게도 호위를 맡기고 싶다는 내용이다.
“…크라시르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리오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보통 왕족이 서거하게 된다면, 왕족의 시신을 안장하는 묘까지 다른 왕족들을 호위하는 역할은 왕가를 수호하는 근위기사단의 역할이다.
아무리 크라시르 기사단이 인맥과 재력을 이용하여 단원들을 부정 입단시켰다는 비리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 기사단의 역할과 임무는 왕가의 수호.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디아네 왕비는 본인의 이전 대부터 전해져 내려왔던 전통을 깨는 행동을 한 것이다.
사실상 왕가를 수호한다는 명예로운 일을 다른 기사단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크라시르라는 기사단의 존재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이야기.
확실히 명분도 있고, 겉보기에는 그럴 수 있다는 선택지이기도 했지만, 그다지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왕비께선 어째서 이런 선택을….”
아무리 최근 부정 입단 문제로 큰 파란을 일으켰다지만, 알렉스도 본인이 왕이라면 이 안건에 대해서 크라시르를 제쳐두고 아르티아를 고르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궁정 내부에서 근위 기사단의 입지가 그렇게나 좋지 않습니까?”
“좋지 않다기보다는….”
유리아는 최근 영지의 경영으로 바빠 왕국 내부의 정치 상황이나 세력 구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알렉스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녀를 대신해서 알렉스의 질문에 답한 것은 은현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냥 믿을 사람이 있나 없나의 문제겠지.”
“…그게 무슨 말이지?”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여도, 지금 페르니아스 왕국의 내부는 꽤 위태위태하잖아.”
“…….”
이전에 은현이 뿌린 비리 제보로, 비리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다수의 귀족들이 처벌을 받은 사건 이후로 왕국의 내실은 현재 아주 허약하기 짝이 없다.
현재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은 대외적으로는 디아네 왕비의 노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를 뒷받침하는 이 나라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성실한 귀족들 소수의 노력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말 그대로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게 현재 왕비의 심정이 아닐까.”
비리에 가담했던 귀족들은 모조리 처벌되어 파면했다지만, 디아네 왕비는 사람이란 가슴 속에 비뚤어진 마음과 욕망을 품게 된다면 어디까지 어리석어지고 범법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리오드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그것을 거절당하면서 그 추한 감정을 발전시켜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 했던 그 행위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고 있다.
왕국의 비리 귀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양쪽의 지지기반 세력을 초토화시켜 파벌 싸움 자체가 사라져버리게 만든 은현의 수작으로 인해 디아네 왕비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바쳐 이루려 했던 아들의 왕세자 책봉보다, 위태위태한 왕국의 내실을 다지는 일에 집중하여 정신이 없는 상태.
“지금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은 다시 새로운 단원들을 모집하면서 훈련을 통해 다시 전력을 보강하는 중이지. 현실적으로도 왕가를 호위하기 위한 전력은 아직 부족한 게 맞아.”
전통이나 정치적인 부분을 따져본다면 크라시르 기사단 쪽의 반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을 설명한다면 그들도 강하게 나오지는 못한다.
만약 무리하게 인원을 차출하여 부족한 전력으로 호위를 했다가, 왕가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그 불상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생각한다면 이번 호위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맞다.
“리오드. 미리 준비해야겠는데?”
또한 이 밀서는 은현에게 보내는 것이지만, 반대로 리오드에게 정식으로 명령를 내리기 이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간접적인 이야기이기도 했다.
“…알았다.”
리오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는 아니고, 남의 일과 명예를 빼앗는 복잡한 형태였지만, 공작 위계로 승작하고 처음 받는 임무다.
허투루 준비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잘 알았습니다.”
은현은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리오드가 유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본의 아니게 제 연회에 초청이 되었지만, 부디 이 연회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고마워요. 올리비온…공작.”
◆ ◆ ◆
올리비온 저택을 나와 집을 향해 달려가는 레토나 안에서, 에린은 포만감으로 가득 차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히히.”
고풍스러운 원단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에린의 실실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은현도 피식 웃었다.
“좋아?”
“응. 많이 먹었어!”
원체 먹성이 좋은 에린의 밝은 모습은 집안에서도 귀엽다고 다른 아내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모습이다.
“그런데 현아. 어디에 가 있었어?”
“그냥. 리오드랑 일 얘기를 좀.”
“흐응. 그렇구나.”
에린은 연회동안 은현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굳이 깊게 캐묻지 않았다.
“에린.”
“응?”
“집에 가면 바로 장기간 여행 갈 준비해야 해.”
“여행?”
느닷없는 은현의 통보에 에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이라기엔 좀 애매한가.”
어차피 에린도 동행을 해야 하는 이야기라 사정을 설명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아직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엔 타이밍이 이르다.
에린이 어디 가서 떠벌릴 성격이 아니라는 건 은현도 잘 알고 있음에도, 페르니아스 왕국 국왕의 서거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
에린에게 알려주는 타이밍은 적어도 출발 전으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으음, 알았어. 준비할게.”
하지만 쓴웃음을 지으면서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은현의 옆얼굴을 보고, 에린은 이번 일에 대한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자신도 동행을 해야 하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서 그 사정을 설명하는 것은 이르다는 그의 심정을 헤아려준 것이다.
“중요한 일이야?”
“굳이 설명하자면 의뢰가 들어왔다고 이야기하면 될까?”
“아, 그렇구나.”
에린은 곧바로 이해했다.
모험가 측에서 의뢰로 장기간 원정을 떠나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자신이 챙겨야 할 짐과 무기들, 필요한 식량들을 계산하여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에린의 모습을 보고 은현이 미소지었다.
이제는 금위계에 걸맞은 훌륭한 모험가로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것은 그녀를 지금까지 키워 성장시켜온 스승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뿌듯하다.
“그리고 이번엔 특별히 챙겨야 하는 것도 있어.”
“그게 뭔데?”
“그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이것을 설명하려면 이번 원정을 가게 되는 사유와 복잡한 사연들을 모두 설명해야 한다.
에린은 이해했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운전을 마치고, 게이트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온 은현은 곧바로 짐을 미리 싸두려는 에린과 헤어지고 사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식객으로 함께 사는 제라드의 모습을 발견했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멈칫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
“음? 아, 형님. 오셨습니까?”
먼저 말을 건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제라드 쪽이다.
“제라드. 지금 뭐 하는 거야?”
“예? 청소하고 있는데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왜 청소를 하고 있냐고.”
“그야…. 바닥이 더러우니까요?”
“…….”
은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대화가 맞물리지 않는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그의 행색이다.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앞치마를 착용하고 마룻바닥을 닦으며 사당 내부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제라드의 행색은 명백히 이질적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구미호에게 추파를 던지고 막무가내식으로 이 사당에 식객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었다.
약 일주일 만에 만난 제라드는 완전히 전업주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네가 이곳을 찾아오다니, 무슨 용무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은현과 그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제라드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들고 있을 때, 그 짧은 침묵을 깬 것은 사당의 입구로 나온 구미호였다.
“…신수님.”
“…묻지 마라.”
은현이 어떠한 경위로 제라드가 전업주부가 되었는지 구미호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구미호도 그 의미를 알아채고 벌레를 씹은 표정을 지었다.
“미호님! 청소를 모두 끝냈습니다! 바로 저녁 식사를 준비해드릴까요?”
“…그래.”
별 해괴망측한 것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짓는 구미호의 반응은 매우 시큰둥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이형환위를 사용하여 잔상을 남기고 사라지는 제라드의 행동에 은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꽤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흥. 나는 강요한 적이 없다. 모두…. 저놈이 자처해서 하고 있을 뿐이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는 구미호의 새침한 태도는 자못 우스웠다.
어쩌면 이 자리에 에린이 있었다면, 자신을 혼만 내고 윽박지르는 평소에 보여주는 구미호의 태도와는 다른 이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원하신다면 내쫓으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정말로 싫었다면 제라드를 내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배신을 당해서 한때 증오심을 품어 페르니아스 왕국을 모조리 불태우려 했었던 신수가 지금은 인간을 자신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다니, 그녀의 심경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지 은현은 알지 못했다.
“…밥이 맛있다.”
“예?”
“저놈이 차리는 밥이 꽤 괜찮더군. 네 악마 종자가 가져다주는 밥보다 더.”
“…….”
구미호가 제라드를 받아들인 이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소한 이유였다.
순간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구미호가 다시 은현에게 물었다.
“그것보다, 찾아온 용건을 말해라.”
구미호는 은현이 아무런 용건도 없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필시 이번에도 자신에게 어떠한 부탁을 하기 위해서 찾아왔을 것이라 생각하고 은현의 대답을 담담히 기다렸다.
“예전에 제가 신수님께 약속드렸던 것. 기억하십니까?”
“……!”
은현의 물음을 들은 구미호는 움찔 떨며 자신의 아홉 꼬리를 곤두세웠다.
“잊을 수 없지. 그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구미호는 곧바로 은현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렇구나. 드디어 이날이 찾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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