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4화 〉 484. 약속의 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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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함이 가득한 야외의 연회장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이건…대단하네요.”
준비된 뷔페식의 음식들부터 잘 가꾸어진 정원의 외관이나, 잔잔한 협주곡을 연주하는 악사들까지, 굉장히 정석적인 준비들이지만 준비된 요소들 하나하나가 매우 수준이 높다.
“후작 부인께서는…. 아니, 공작부인께서는 현재 임신 중이시라, 연회의 준비는 에이라가 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이 규모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수준이다.
귀족 가문에서 여는 연회는 매년 특별한 날에 왕가에서 열리는 연회와 비교해보았을 때, 그 수준도 규모도 절대로 비교할 수 없다.
왕가에서 주최하는 연회는 보통 특별한 공훈을 쌓은 누군가를 치하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속내는 왕국의 건재함을 널리 알리고 그 위용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도 숨겨져 있다.
‘자신들의 나라는 이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의 소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한 속뜻이 담겨 있는 과시는 곧 타국에서 보이는 자국의 국력에도 어떠한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일리아나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현재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대륙의 여섯 영웅 중 한 명인 리오드.
대륙에 열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곱 자릿수의 고위 마법사 사이먼이라는 최강전력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일리아나가 페르니아스 왕국의 소속이 된다면 왕국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진다.
이야기를 되돌려서, 왕가에서 주최하는 연회와 마찬가지로, 가문에서 주최하는 연회도 이와 비슷한 의도를 품고 주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이 정도의 연회를 열 수 있는 올리비온 가문에 대해서 많은 귀족이 다양한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접근해올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지만, 국왕파와 귀족파의 파벌로 나뉘어 혼란했던 페르니아스 왕국의 정치판 안에서도 그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꿋꿋이 중립을 지켜왔던 리오드의 입지는 현재 왕국 내부에서 크게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장 안 좋은 전개는…. 역시 몇몇 귀족들이 그분을 부추겨 큰일이 벌어지는 건데….’
최근 먼 타국인 렌디르 왕국의 소식을 얼핏 들었기 때문인지, 유리아의 마음속 불안은 괜히 싱숭생숭해져만 갔다.
최근까지 왕국 내부에서도 디아네 왕비의 사적인 감정으로 영웅의 취급을 받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유리아로서도 예측할 수 없었다.
특히나 이전 비리 적발 사건에서도 살아남은 귀족들은 괜히 리오드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이 나라의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해보았을 때, 그것은 좋은 흐름이 아니다.
왕국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왕족보다도, 왕족의 신하인 기사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위태위태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나 다수의 귀족이 비리가 적발되어 작위를 몰수당하고 처형당하여 파벌 싸움이 의미가 없어진 지금, 대리청정 중인 디아네 왕비와 왕가는 힘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로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유리아는 왕족의 일원으로서 짊어진 책임보다, 자신의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을 비롯한 가족의 안위가 우선이다.
공작 가문에 몸을 의탁하게 되면서 안위가 보장된 유리아는 더는 무언가를 바랄 생각은 없었다.
단지 리오드를 앞세워 누군가가 다시 권력투쟁의 불씨를 지필지도 모른다는 것이 걱정될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올리비온 가문의 연회를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던 유리아에게 알렉스가 물었다.
“그냥…. 이 앞날을 생각했을 뿐이에요.”
“…….”
알렉스는 유리아의 의미심장한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 또한 아버지의 가문을 이어받아 정치를 하는 몸이다.
이 연회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아챌 수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 녀석이 함께 있을 테니까요.”
알렉스의 입에서 언급된 ‘그 녀석’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여동생인 엘레노아와 결혼하여, 공식적으로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사위가 된 은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죠.”
납득이 간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페르니아스 왕국에는 리오드를 부추겨 더 커다란 권력을 쟁취하려고 욕심을 부리는 어리석은 야심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계략을 꾸밀만한 이들은 이미 이전 왕국의 비리 사건 때 적발되면서 모두 처벌을 받은지 오래다.
지금 살아남은 귀족들은 그 상황을 누가 주도하여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이 왕가보다 리오드를 더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무력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그와 친분이 있으며 일리아나의 남편이기도 한 은현의 존재 때문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요.”
그런 은현이 리오드의 뒤에 있는데, 누가 리오드의 귀에 바람을 넣는단 말인가.
본인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였다.
“이만 가죠. 알렉스.”
“네.”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리아는 살짝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권유가 기쁜 나머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던 알렉스는 곧바로 답했다.
“왕녀님의 분부대로.”
스스로 한쪽 팔을 내주어 알렉스의 팔짱을 낀 두 사람이 연회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유리아 왕녀님께서….”
“아르미타스 소공작과 함께?”
연회를 즐기고 있던 귀족들의 시선을 모으게 된 것은 순식간이다.
현재 크게 발전하고 있는 영지를 관리하는 장본인인 알렉스와 이 나라의 왕녀인 유리아가 팔짱을 끼고 함께 등장하는 것이 주목받지 않을 리가 없다.
최근 아르미타스 령에 헬레나 후비와 유리아 왕녀, 에반 왕자가 몸을 의탁했다는 소식을 접했던 이들에게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왕녀님. 그리고 아르미타스 소공작님.”
올리비온 후작 저택의 건물 안으로 들어온 유리아와 알렉스를 정중한 인사로 맞이한 것은 이번 연회를 기획한 에이라다.
“오랜만이야. 에이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왕녀님.”
“연회에 굉장히 힘을 줬던데?”
최대한 고급스러움을 연출하기 위해서 허영심의 끝을 달리는 극도의 사치스러움으로 치장된 연회는 그녀가 혼자서 기획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
에이라는 유리아의 물음에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도움을 받아서 이렇게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움?”
“아마 그 녀석이 도움을 줬겠죠.”
유리아를 에스코트하여 함께 저택으로 들어온 알렉스가 유리아를 대신하여 담담히 답했다.
“아르미타스 가문에서 도움을 줬다는 말인가요?”
확실히, 현재 큰 발전의 중심 속에서 많은 재력을 축적하고 있는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이 도움을 주었다면, 이런 사치스럽고 비싼 연회를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런 유리아의 추측을 단번에 부정했다.
“아뇨.”
“…그러면요?”
“어디까지나 그 녀석이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그 녀석도, 엘레노아도 저나 아버지에게 이 연회에 대한 도움은커녕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어요.”
“…….”
알렉스의 설명을 들은 유리아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많은 귀족이 참석한 야외 연회장을 응시했다.
알렉스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면…. 이것들을 모두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모두 그 남자가 개인적으로 제공한 돈이라는 건가요?”
“그렇겠죠?”
“…….”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는 알렉스의 말에 유리아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유리아의 얼굴을 본 에이라도 그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대로 써도 좋다고 해서 힘을 주어 이번 연회를 기획하기는 했지만, 이번 연회에 사용된 돈을 생각하면 기획한 본인으로서도 양심의 찔리는 수준의 금액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은현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건네준 금화 주머니의 무게들만 느껴도, ‘이 사람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
친구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한 플렉스 플레이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은 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에이라는 이윽고 저택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부탁할게.”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와 알렉스가 에이라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평소에 저택을 방문하는 손님을 대접하는 응접실이다.
“아버지. 왕녀님과 아르미타스 소공작께서 오셨어요.”
“그래.”
담담하면서도 짧은 리오드의 목소리에 에이라는 문을 열고, 두 사람에게 손짓하여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알렉스와 함께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에서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이 저택의 주인인 리오드와 백은발의 적안을 가진 남성, 은현이다.
“…오랜만이네요.”
“그렇네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전 안 반가운데요.”
빈말뿐인 인사였지만, 은현의 그 인사를 매몰차게 받아치는 유리아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그럼 저는 이만 가볼까요?”
넉살 좋게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유리아가 살짝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리오드의 공작 위계 축하연을 기회 삼아, 비밀리에 이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은현과 알렉스에게 요청한 것은 다름 아닌 유리아였다.
“너무 짓궂게 하지 마라.”
유리아가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하자 알렉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뭐, 미안. 그냥 기분이 너무 저조해 보이셔서.”
그래서 분위기 전환 겸 장난을 쳐보았지만, 근심이 있는 유리아에게는 그 농담이 통하지 않은 듯 보였다.
유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은현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에린은 없는 건가요?”
“아마 밖에서 뷔페 음식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요? 워낙 먹성이 좋은 아이라.”
은현은 구태여 에린의 위치를 물어보면서까지 확인하려는 그 의도를 생각해보았다.
에린이 없는 자리에서, 은현과 알렉스에게 상담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군요.”
“저는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이 문제 상담에서 리오드는 그저 장소를 제공해주었을 뿐, 부외자에 가까우리라 생각하여 자리를 비켜주려 했지만, 유리아는 사양했다.
“조만간…. 후작께도, 아니. 공작께도 왕가에서 이 문제로 명령을 내릴 거라 생각해요.”
즉, 리오드 또한 조만간 왕가의 명령으로 이 문제의 처리에 얽힐 예정이라는 뜻.
“그렇습니다.”
리오드는 소파에서 일으켰던 몸을 앉히며 유리아의 이야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아바마마께서…. 아니. 국왕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
그것은 너무나도 뜻밖의,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오랫동안 병환에 앓아누워 국정을 살피지 못하여 디아네 왕비가 앞에 나서서 대리청정하기 시작한 시간은 10년 이상이 넘는다.
사실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 누구나가 그 시간 동안 대외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국왕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음모론들을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왕족의 일원이었던 유리아조차도 아버지이자, 국왕에 대한 기억은 아주 어렸을 적에 남아있는 흐릿한 기억뿐이었다.
페르니아스 왕국 현 국왕의 건강 상태는 디아네 왕비나 헬레나 후비를 비롯한 왕족에게도 베일에 싸여있던 상태.
아직까지 비공식적으로 대외에 발표되지 않은 국왕의 서거는 알렉스는 물론 리오드마저도 당황시키기 충분했다.
“왕녀님. 그게 무슨….”
“…그렇구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보려던 알렉스와 달리, 현 국왕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죽음이라는 소식을 접한 은현의 얼굴은 매우 담담했다.
“슬슬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온 건가.”
은현은 머릿속으로 구미호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생각을 마치고는 처음의 능청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유리아를 응시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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