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83화 (466/730)

〈 483화 〉 483. 왕국 최고의 기사의 비밀

* * *

오늘도 구미호의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에린은 바로 욕탕 속에 몸을 던졌다.

“후아아….”

몸의 근육이 느슨해지고, 체내에 누적된 피로를 해소되어 기분 좋은 나른함이 물결처럼 전신에 퍼졌다.

“아…. 좋다아….”

수증기가 올라오는 따뜻한 물 속에 전신을 담그자 숨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에린은 순간 지하의 방에서 은현과 일리아나, 엘레노아와 릴리와 함께 살을 섞었던 광란의 시간을 떠올렸다.

“대단했지….”

은현과 둘이서만 밤을 보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어디까지 저속해질 수 있는지, 그 끝으로 향하는 길의 입구를 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냐고 묻는다면 너무 기분 좋았다고 스스로 자문자답을 내리는 에린은 실실 웃었다.

“히히.”

잔뜩 사랑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려 행복함을 느끼고 욕탕 안에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물기를 머금은 머리를 말리며 거실로 나온 에린은 아주 진귀한 광경을 목격했다.

“릴리 양? 그러면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양파를 채 썰어서 볶아주시고….”

“…….”

영웅이 자신이 사는 집의 메이드 언니에게 요리를 배우고 있다.

그것은 굉장히 언밸런스한 광경 그 자체다.

심지어 잘 단련된 체격의 남성이 고양이 모양이 수놓아진 핑크색의 앞치마를 착용하고 식칼을 쥐어 야채를 썰고 있다.

그 광경은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생각지 못한 상황이라, 에린은 할 말을 잃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제라드님…? 여기서 뭐 하세요…?”

“오? 에린 양. 오늘 훈련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근데 그건 제라드님도…?”

에린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구미호에게 신수의 힘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제라드가 이 던전 내부에 체류하게 되었고, 구미호의 사당에 눌어붙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에린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구미호는 갑작스레 자신의 사당에 동거인이 생겼다는 것에 굉장히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표출하여 제라드를 내쫓지는 않았다.

매너가 가득한 신사지만, 하는 짓은 영락없는 변태끼가 다분한 그가 악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한 구미호는 제라드를 내쫓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설명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도대체 뭐 하세요…?”

왜 제라드는 이 집의 거실에서 릴리에게 요리를 배우고 있는 것일까.

“하하, 이번에 요리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서 말입니다.”

제라드는 넉살 좋게 웃으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릴리가 아침과 점심, 저녁까지 언제나 시간이 되면 규칙적으로 구미호에게 식사를 가져다주었던 것이 계기다.

현재 구미호의 사당에 눌러앉게 되면서, 제라드는 구미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사당의 관리 역할을 자처했다.

마치 릴리처럼 가정부로 전락한 영웅의 모습에 에린이 기가 찬다는 시선을 보냈다.

“…….”

어쨌거나, 본인이 매우 적극적이고 만족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더 어이가 없다.

“…미호가 제라드님이 만들어주신 요리를 먹어요?”

“글쎄요. 한번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과연 구미호가 제라드의 요리를 먹을지, 에린은 의문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상상했다.

‘밥상을 뒤엎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제라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라드님. 많이 바쁘신 거 아니에요?”

“흐음? 아니요. 이제는 한가합니다.”

흑마법사들을 추적하기 위해 여러 곳을 방랑하는 생활을 보내왔던 제라드는 이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

그의 역할을 지금은 은현의 지휘 아래에 흑랑단이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실력 있는 모험가로서의 등급도 가지고 있는 제라드는 수중에 가진 재산도 그럭저럭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일하지 않고도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지금은 새롭게 얻은 신수의 힘을 다루기 위해 자기 수행의 시간을 보내는 한창.

그 과정에서 구미호에게 잘 보이기 위한 제라드의 속내는 거리낌이 없고 한없이 정직하다.

◆ ◆ ◆

연회가 시작된 올리비온 후작 저택의 정원은 화려함으로 가득하다.

초빙된 악사들의 연주로 가득 채운 야외 정원은 뷔페식으로 진열된 음식들의 향기와 외관으로 마음껏 공들인 티가 가득했다.

조달한 식재료부터, 가꾸어낸 환경과 실력 있는 악사들의 연주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이 모든 것을 계획했던 것은 리오드의 딸인 에이라다.

“…너무 화려하게 준비한 것 같은데.”

공작위계의 승작을 축하하는, 자신을 위한 연회라지만 리오드는 이 화려함과 사치로 가득한 연회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소하다기보다는 쓸데없는 낭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리오드의 성격상, 눈앞의 이 연회는 사치와 허영심으로만 가득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에 불과했다.

사실 승작의 축하연회 자체를 연다는 것부터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무슨 소리세요. 아버지. 이건 아버지의 위상을 이 나라의 모든 귀족과 백성들에게 알리는 자리에요. 허투루 준비할 리가 없잖아요.”

탐탁치 않아 하는 리오드의 말에도, 에이라의 태도는 단호했다.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올리비온 가문의 주인인 리오드의 딸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만큼, 리오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에이라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건 은현님의 호의로 준비된 자리이기도 하잖아요.”

“…음.”

리오드가 탐탁지 않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연회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마련된 자금 대부분이 바로 친구인 은현의 개인적인 주머니 안에서 나온 돈이라는 것 때문이다.

자신의 재산도 아닌 친구의 돈을 멋대로 끌어와 이런 낭비에 가까운 곳에 사용하다니, 마음이 굉장히 불편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했잖아.”

부녀의 대화에 난입한 것은 이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은현이다.

친구라지만 사적인 자리가 아닌, 친구의 승작을 축하해주기 위한 공적인 자리의 연회에 참석하게 된 은현이 한껏 꾸민 예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언니! 드레스 굉장히 예뻐요!”

은현의 팔짱을 끼고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에 함께 참석한 에린이 에이라의 드레스를 보고 두 눈을 반짝였다.

녹색 빛의 에메랄드가 박힌 고급스러운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에이라의 모습은 마치 한 나라의 공주님처럼 아름답고 고귀하다.

“응. 고마워. 에린도 드레스 굉장히 예쁘네.”

“저, 저는 언니에 비하면….”

에린은 자신의 외관을 칭찬해준 것이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아니야. 굉장히 예뻐. 드레스는 은현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셨니?”

“네!”

“그렇구나. 옷감도 굉장히 고급스럽네.”

드레스의 디자인이나 부드러운 옷감의 재질이 어우러진 드레스는 에린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헤헤. 그렇죠? 현이는 정말 대단해요!”

“응.”

자신을 칭찬했을 때는 쑥스러워하며 부정했던 것에 반해, 남편이 된 은현을 칭찬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다.

그런 에린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 에이라도 기분 좋은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은현에게로 시선을 옮겨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버지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의 준비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아니. 평소에 이쪽도 리오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것보다….”

은현은 저택의 정원에 준비된 많은 것들을 훑어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굉장히 거창하게 준비했구나.”

“네. 혹시 너무 많이 써버렸을까요?”

에이라는 그래도 이번 연회의 준비에서 쓴 금액을 생각하면서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좋을 대로 쓰라는 은현의 허락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양심에 아예 찔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니. 좋을 대로 하라는 건 내 말이었으니까. 오히려 굉장히 의욕이 가득 차 있어서 보기 좋아.”

“아버지를 위한 자리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선배님. 준비 끝났습니다.”

한창 대화를 이어나가던 와중, 차한성이 다가와 에이라를 불렀다.

“그래? 알았어. 곧 갈게. 그럼 은현님. 에린. 저는 이만….”

“그래.”

“현아. 나는 언니를 따라가도 돼?”

“응.”

“알았어! 언니! 제가 뭐 도울 게 있을까요?”

에이라는 에린의 호의에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린과 차한성과 함께 연회 준비의 마무리를 점검했다.

“저 사람도 준비를 도왔구나.”

은현은 오랜만에 보는 차한성의 얼굴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 녀석뿐만이 아니다. 단원들 모두가 도왔지.”

이번 연회의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에이라 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래에 있는 아르티아 기사단의 단원들 전원이 리오드의 승작을 축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기사단장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이, 자연스레 아르티아의 명예와 직결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단원들은 이례 없을 단합심을 보이며 이 연회의 준비를 도왔다.

“넌 정말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지휘관이네.”

“쓸데없는 소리.”

무감정하게 내뱉는 말투에 가까웠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던 은현은 재빨리 대답하는 그 반응 자체가 리오드가 쑥스러움에 못 이겨 억지로 얼버무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리아나는 안 왔나?”

“시끄러운 건 원래 안 좋아하잖아. 그리고 태교에도 안 좋다고 안 온다고 하더라고.”

“…그 녀석의 입에서 태교라니. 살다 보니 별일이군.”

리오드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여덟 자릿수의 고위 마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서 항상 자기 멋대로 행동을 해왔던 성격 더러운 막무가내 마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래도 미안하다고는 전해달래.”

쓴웃음으로 일리아나의 말을 전달하자, 리오드가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해한다.”

자신의 아내인 테레지아 또한 리오드의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미 만삭에 달해 출산을 앞둔 테레지아의 참석은 리오드 쪽에서도 극구 말렸었다.

이제 막 임신 초기이긴 하지만, 일리아나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연회 준비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는 은현의 속마음도 눈치챘다.

“승작 축하해.”

은현은 미소지으며 친구의 출세를 축하해주었다.

앞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은현의 손을, 리오드가 맞잡으며 대꾸했다.

“너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는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어.”

언제나 그랬다.

20년 전에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비롯한 많은 동료를 뒤에서 받쳐주고 앞에서 끌어주었던 은현이 없었다면, 이 대륙의 평화도, 지금의 이 행복한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리오드를 영웅이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그것은 은현이 노력하여 만들어낸 결과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들이다.

아마 제라드나, 아니에스나, 앨리스도, 일리아나도 리오드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

그들의 기준에서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나의 영웅이다.’

성미에 맞지 않아, 입 밖으로는 절대로 내뱉을 수 없는 그 말을, 리오드가 재차 자신의 가슴속에 새겼다.

나라에 소속된 몸이며, 왕가를 섬기는 가문과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충성을 다하는 곳은 사실 왕가가 아니다.

자신의 영웅, 개인에게 바치는 그 기사로서의 충성심.

그것은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리오드의 작은 비밀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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