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0화 〉 470. 생애 첫 선물(2)
* * *
임신의 사실을 확인해보는 방법은 민간요법이나 의학적 지식을 근거로 한 검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은현 쪽의 경우에는 아주 확실한 방법이 존재한다.
“확실하구나.”
하계에 실체화한 베르단디가 일리아나의 복부를 어루만지며 자기 일인 양 기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녀 아이의 배 속에서, 새로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베르단디의 그 말은 지금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어 운명을 부여받고, 인생이라는 것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와, 와아….”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자마자 거실로 나온 에린이 일리아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나님! 정말인가요!?”
다다다 뛰어오며 일리아나에게 재차 확인하는 에린의 행동은 굉장히 들떠있고 소란스럽다.
“아가. 기뻐해 주는 건 고맙지만, 앞으로는 너무 소란스럽게 굴면 안 돼. 배 속에 아기가 놀랄 거야.”
“아, 그, 그렇죠…! 죄송해요.”
에린은 자신의 방정맞고 소란스러움을 반성하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일리아나의 복부를 향했다.
아직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조만간 그녀의 배는 테레지아처럼 부풀어 오르며 새 생명을 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축하드려요. 일리아나님.”
“후후. 고마워.”
일리아나는 자신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고 축하해주는 에린의 말에 답했다.
이윽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은현이 일리아나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였어?”
“전에 테레지아와 얘기를 하고 있을 때, 홍차의 향기가 좀 역하더라고.”
평소 즐겨 마시는 차였지만, 그날따라 매우 역했던 것을 보고 설마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시기를 계산해보니 아마도 그때인 것 같다고, 일리아나는 말했다.
“우리 엘프의 숲에서 며칠이고 시간하고 여유가 생기면 했잖아.”
그때는 몹시 배가 고픈 듯 적극적이었던 것은 일리아나였지만, 은현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끝을 모르고 서로의 몸을 탐하고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던 그 욕정의 시간을 보내왔는데, 새삼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이긴 했다.
게다가 아내의 욕구를 모두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자신의 선택이기도 했다.
“게다가 너 그것도 먹지 않았어?”
“…그랬지.”
은현은 일리아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되묻지 않더라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생명의 원천이라고도 불리는 세계수의 수액을 희석해 만든 포션은 아이가 잘 생기지 않은 엘프들 사이에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비전의 약이다.
“그렇다고 효과가 이렇게 직빵으로 나오냐고….”
아이를 생각하고 먹은 비약의 성능은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를 가지기 힘든 마녀에게도 통한다는 것이 훌륭하게 입증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은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애 아빠가 된다고?”
그런 미래를 아예 상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와 결혼을 하게 된 순간부터, 언젠가는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생활하는 그런 나날을 상상해보았지만, 현실로 이루어지는 날이 올지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더욱 큰 기쁨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축하한다. 아이야. 아주 큰 선물을 받았구나.”
“…감사합니다.”
선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은현은 생각했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400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그래서 두 사람도 이렇게 들떠있었구나.”
은현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가짓수의 음식들이 차려진 테이블을 보며 웃었다.
이것은 정말 말 그대로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냄새나 입덧은 괜찮아?”
“내가 먹을 건 릴리가 따로 만들어주고 있어.”
“네가 제일 축하받아야 할 자리인데, 정작 먹지를 못하니 애석하네.”
“나는 괜찮아. 그것보다 이 메뉴들 보여?”
은현은 일리아나의 물음에 차근차근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정력에 좋은 음식들 천지다.
“와아….”
에린은 굉장히 많은 종류의 음식들을 보며 입을 떡하니 벌려 말을 잇지 못했다.
고된 훈련을 마친 이후인지 허기진 배는 식사가 시작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일리아나의 임신 사실을 지금 막 접한 에린은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엘레노아와 릴리는 다르다.
릴리의 공들인 노력으로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엘레노아와 릴리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진심인지가 느껴졌다.
일리아나는 은현의 팔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사람도 네 아이를 가지고 싶나 봐.”
“…….”
“우리 남편 앞으로도 밤에는 힘내야겠지?”
“하하….”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해온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 ◆ ◆
다음 날, 은현은 이른 아침부터 오랜만에 아르미타스 영지의 내부를 걸었다.
“현아,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때마침 구미호의 훈련을 쉬게 된 에린이 딱히 할 것이 없어져 은현의 뒤를 따라왔다.
“지스의 상회에. 일리아나한테 먹일 재료를 구매하려고.”
“아하.”
에린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산부가 된 아내에게 먹일 건강식의 재료를 구하러 직접 발걸음을 옮기는 은현의 행동에 에린은 살짝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극정성으로 보살핌과 관심을 받게 되는 일리아나가 부러웠다.
이윽고 살짝 기대감을 담아서 은현에게 물었다.
“나도 배 속에 아기가 생기면 일리아나님처럼 보살펴 줄 거야?”
“…….”
자신의 한쪽 팔을 끌어안으며 물어오는 에린의 질문에 은현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치 주인의 관심이 매우 고픈 애완동물 같은 표정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에린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야!”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파!”
느닷없이 자신의 머리를 왜 때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에린의 하소연을 무시하고, 은현은 에린의 몸을 안아 들어 올렸다.
굉장히 가녀리고 가볍다.
“뭐, 뭐하는 거야!”
에린은 화들짝 놀라며 은현의 가슴을 두들겼다.
“내, 내려줘! 사람들이 보잖아…!”
길거리의 많은 사람의 이목이 자신과 은현에게 집중이 되자, 에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은 부끄러움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굳이 아기가 생기지 않아도, 나는 너를 소홀히 대하지 않을 거야.”
“아, 알아!”
은현이 겨우 바닥에 내려주자, 에린은 그의 한쪽 팔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이며 주위 사람들에게서 새빨개진 얼굴을 감췄다.
연인 사이인지, 부부 사이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꽁냥거리는 실랑이 속에서 보이는 새색시 같은 에린의 반응에 사람들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에린을 데리고 은현은 마침내 지스의 상회에 도달했다.
“와아…. 진짜 많이 커졌네….”
아까까지도 사람들의 흐뭇한 시선에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했던 에린은 도착한 지스의 상회 건물을 보며 감탄했다.
그저 포션이나 약초만을 판매하는 작은 잡화점에 불과했던 가게가 지금은 5층의 커다란 상회 건물로 변모했다.
은현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의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혼합되어 상회 안의 분위기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아니. 글쎄! 이 정도면 진짜 최상급이라니까!? 좀만 더 쳐줘!”
“몇 번을 말씀하셔도 안 된다니깐요!?”
마수를 잡고 갈무리한 소재를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값을 치러서 팔려는 모험가와 그것을 거부하는 상회의 직원의 실랑이.
“이 가격에는 못 팔아요!”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더 깎아주세요!”
질 좋은 무기나 방어구와 흥정을 시도하는 사람들이나.
반대로 손님이 가져온 좋은 상품을 어떻게든 매입하려는 직원 사이의 대화 등.
물건과 돈은 물론 무수히 많은 대화가 오가는 상회의 1층은 매우 시끌시끌했다.
이것은 그만큼 지스의 상회가 굉장히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상회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상회장이란 현재 이 상회의 장이자, 지스를 칭하는 말.
은현은 품에서 공작 가문의 휘장을 꺼내어 찾아온 용무를 묻는 접수 직원에게 제시했다.
“이, 이것은…!”
보통이라면 선약은 잡았는지 물으며 정해진 매뉴얼의 절차를 따르는 것이 기본적인 업무지만, 접수 직원은 이 영지의 관리자인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의 휘장을 본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 위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윽고 황급히 멍한 표정을 고치고 은현과 에린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응대하는 솜씨가 생각보다 마인드가 괜찮은 직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은현은 에린과 함께 접수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4층의 회장실 앞에 도착했지만, 접수 직원은 은현과 에린을 곧바로 회장실 안으로 들여보내지는 않았다.
“죄송하지만 지금 상회장님께서는 선약이 있어서 용무를 마치실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를….”
하지만 접수 직원이 모든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은현의 귀에 회장실 안으로부터 남자의 언성이 들려왔다.
“정말로 이러실 겁니까!?”
“몇 번을 물어보셔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장실의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방에서 나왔다.
“쯧. 어.”
두 남자 중 뒤따라 나오던 남자가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은현을 보고 곧바로 표정을 고쳤지만, 은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차던 남자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딴청을 피웠지만, 은현과 에린을 지나쳐 자신들끼리 속닥거리는 두 남자의 분위기는 명백히 이상했다.
“현아. 저 사람들….”
에린도 표정을 굳히며 은현의 팔을 붙잡았다.
타인의 감정을 읽어 들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에린은 자신을 지나친 두 남자에게서 불길한 그들의 속내를 읽어 들인 것이 분명했다.
“알아.”
“…응.”
에린은 은현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회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또 인가? 에휴. 들어 오라고 해.”
회장실 안에서 들려온 지스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아마도 불편안 안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듯 보였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접수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은현과 에린은 회장실안으로 들어갔다.
“나, 나으리!”
회장실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확인한 지스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앉으시면….”
“아니. 됐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급하게 소파의 정중앙, 가장 상석에 앉도록 권했지만, 은현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허례허식을 거절했다.
바지사장을 앞에 세워두고 본의 아니게 이 상회의 숨겨진 보스 취급을 받는 이 대우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다.
지스는 긴장을 풀지 않으며 은현에게 물었다.
“여,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이번에 안 사람이 아이를 가져서 말이야.”
그 안 사람이 정확히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스의 머릿속에는 일리아나와 엘레노아,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린은 둘째치더라도 그 두 사람은 지스가 반드시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마워. 그래서 이번엔 임산부에게 몸보신이 좋은 식재료나 약재를 매입하러 왔어.”
“아, 그렇군요! 곧바로 볼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지스는 소파의 옆 서랍에서 종을 꺼내 흔들었다.
맑은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비서가 들어왔다.
“지난번에 만들어두었던, 임산부에게 좋은 약재나 식자재들의 리스트를 추려서 가져와.”
“알겠습니다.”
먼저 아이를 가진 테레지아의 몸을 위해서 이미 이전에 만들어둔 리스트를 가져오라는 명을 받은 비서가 회장실을 나가자, 은현이 다시 지스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힘든 일이 있나 보지?”
“예. 뭐….”
지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이 방을 나간 남자 둘.”
“……!”
은현의 정확한 언급에 지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마치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잘못 엮여서 엿될지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나, 나으리. 저는….”
“알아. 들었어. 저쪽에서 무언가 제안을 해왔고, 너는 거절했다는 거.”
“…….”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작게 한숨을 쉰 지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 건을 거절했다는 것도 은현이 알고 있다면 전혀 거리낄 게 없다.
지스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한두 달 전부터…. 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저 두 남자가 끈질기게 저희 상회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비트’와 ‘도지’라고 하는데….”
“…‘비트’와 ‘도지’?”
“예? 예. 맞습니다. 아는 사람들이십니까?”
은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지스가 언급한 두 남자의 이름을 다시 한번 곱씹자, 지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이름이네.”
사정을 같이 듣고 있던 에린도 의아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모르는 사람들이야. 하지만….”
이름만 들었는데 그냥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이름들이다.
“잘 손절했어. 하마터면 물릴 뻔했네.”
“예? 그게 무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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