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68화 (451/730)

〈 468화 〉 468. 신수 기린(2)

* * *

“괜찮네. 배 속의 아기도 건강한 듯 보여.”

리오드의 저택에서 만삭에 가까운 임산부인 테레지아의 진찰에 대한 소견은 굉장히 긍정적이었다.

“고맙다.”

진찰을 마친 은현에게 리오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오히려 지금 많이 불편하신 건 후작 부인이십니다. 아, 이제는 공작 부인이라고 불러 드려야할까요?”

“후후, 아직 제대로 취임식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이미 디아네 왕비로부터 승작을 결정받은 이상, 올리비온 후작 가문이 곧 공작 가문으로 불리게 되는 날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은현님도 저에게 말을 놓아주셨으면 해요. 남편에게도 하지 않는 존대를 저에게 해주시는 것은,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부담스럽답니다.”

“뭐 그건 그렇지만….”

은현은 슬쩍 리오드의 표정을 살폈다.

사실 리오드와는 20년 전에 죽기 전부터 알고지냈던 사이였기에 지금도 그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갑작스레 생겨버린 그의 아내인 테레지아는 은현의 입장에서는 아직 낯선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은현이 페르니아스 왕국을 찾아오고 리오드와 다시 재회하면서 알고 지낸 시간이 약 2년을 넘겼으니,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굴 시간도 아니긴 하다.

“이미 남편에게 들어서, 은현님의 비밀에 대한 건 알고 있습니다.”

“…….”

“400살이 넘으신 분에 저에게 존대를 해주신다니. 너무 부담스러워요.”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비밀을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다니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리오드 부부에게는 예외적이다.

다행인 점은 아직 에이라에게는 말하지 않은 듯 보인 것이다.

“그럼…그러도록 할게.”

“네.”

테레지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찰의 시간을 마치고, 세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은현과 리오드는 시녀가 타준 홍차를 마셨지만, 테레지아의 경우에는 임신한 이후로 그 향이 잘 맞지 않았는지 밀크티를 타 마시고 있었다.

“언니 쪽은 어떠신가요?”

“일리아나? 잘 지내고 있지.”

“…흐음?”

생각보다 담백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은현의 대꾸에 테레지아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이내 아직 일리아나가 은현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작게 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

“후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

은현은 테레지아의 반응이 조금 미심쩍었지만 굳이 캐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아쉽겠어. 공작위계 승작의 축하연을 직접 준비하지 못하니까.”

이번 흡혈귀 소탕 작전의 공훈으로 승작된 리오드의 축하 연회를 개최해야하는 것은 당연히 올리비온 가문의 안사람인 테레지아의 역할이다.

하지만 만삭의 상태로 거동이 불편한 지금 그 준비를 할 수 없는 테레지아는 굉장히 아쉬울터였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렇기는커녕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하여 그 역할을 할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건 이쪽에 놓아주세요. 그리고 연회에서 진열될 메뉴들은….”

저택의 밖에서 한창 테이블의 세팅과 연회 때 선보일 메뉴들의 선정, 등 다양한 준비를 해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에이라였다.

“제 역할은 제 딸이 제대로 해주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조촐하게 해도 되는데.”

반면 리오드는 자신의 승작을 축하는 이 연회의 준비가 매우 못마땅한 듯 보였다.

“당신을 축하하는 자리잖아요. 그냥 넘길 수는 없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 테레지아 뿐만이 아니다.

새 생명을 품고 있는 것으로 거동이 불편한 테레지아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이어받은 에이라는 매우 의욕적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자랑스러운 자신의 아버지를 축하하는 자리이다.

절대로 부실하거나 조촐하게 진행할 생각 따위는 두 모녀에겐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 행사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소요되는 모든 자금은 은현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너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되는 것 같은데.”

“짐은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마워서 하는 거지.”

은현은 피식 웃으며 리오드의 말을 반박했다.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부탁을 하는 등, 서로를 돕는 친구 사이의 둘에게는 빚이나 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차 잘 마셨어.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밀크티를 모두 마신 은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오늘도 진찰 고맙다.”

“승작 축하 연회 날 다시 올게.”

“알았다.”

◆ ◆ ◆

집으로 도착하자마자 입구로 은현의 마중을 나온 것은 릴리였다.

“오셨어요?”

“응.”

“별 일은 없었어?”

“별일….”

릴리는 은현의 물음에 그 단어를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살짝 굳어서 머뭇거리는 릴리의 태도를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굳이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일까.

“무슨 일 있었어?”

릴리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은현이 직접 릴리에게 물었다.

“저어, 주인님….”

릴리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표정과 어투로 은현을 불렀다.

“응.”

어떻게 이 사실을 전해야드려할까 고민을 한참이나 했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제라드님이…신수님께 청혼을 하셨다는데요?”

“…….”

생각보다 심각한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이야기에 은현은 살짝 두통을 느껴야만 했다.

“곧바로 사당으로 갈게.”

“네. 다녀오세요.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시간 맞춰서 에린을 데리고 올게. 연락만 해줘.”

“알겠어요.”

은현은 릴리의 배웅을 뒤로하고 곧바로 집을 나와 사당을 향했다.

문고리에 손을 얹어 사당의 문을 열려던 순간,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밀도 높은 마력에 멈칫했다.

“…….”

이것은 에린의 힘도, 구미호의 힘도 아니다.

농밀한 마력의 밀도는 이전에 자신이 느껴본 적이 있었던 제라드의 몸 속에 있던 기린의 마력이다.

“벌써 제어하기 시작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면 꽤 빠른 편이 아닌가.

적어도 몇 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놀라운 성과다.

은현은 사당의 내부로 들어가 훈련에 임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찾았다.

조용히 마루바닥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는 제라드와 에린의 몸에서 정갈한 기운이 흘러나와 사당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그 기운들은 어느 쪽이 우세한지를 겨루듯 서로 뒤엉키며 상대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기세다.

정말 의외로 밀리고 있는 쪽은 에린이다.

“왔군.”

“수고하십니다.”

멀찍이서 둘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던 구미호가 은현을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왔다.

제라드의 불미스러운 만행을 들었기에 혹시라도 구미호가 그를 내쫓아버리진 않았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그를 가르치는 수행 자체는 거부하지 않았다.

은현은 그 점을 떠올리며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부탁을 받아 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도 있어야지.”

구미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흘끗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부활시킨 은현 일행에게 받은 은혜를 모른 척 할 정도로 몰상식하지도 않다.

구미호의 시선을 따라 몸 안의 거친 마력을 제어하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는 제라드에게로 시선을 옮긴 은현이 물었다.

“제라드는 좀 어떻습니까?”

“…정말로 놀랍게도 재능은 있다.”

인성이나 행동거지 등의 여러 요소를 제외하고 오로지 마력을 다루는 분야만을 중점으로 두고 생각을 해본다면, 제라드는 훌륭한 인재다.

하지만 그가 보유하고 있는 재능은 순전히 선천적으로 가지고 타고난 것이 아니다.

마력의 보유량은 에린에 비해 한없이 뒤처지지만, 그것을 순환시키고 정갈하게 가꾸어 자신의 것으로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은 한없이 훌륭하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재능이 아니다.

먼저 배우기 시작한 에린보다도 뛰어난 성취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제라드가 가지고 있는 연륜의 차이이다.

“아마도…반평생을 가까이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겠지.”

은현에게 교육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성장해나가며 영웅으로서 불리고, 은현이 죽고 전쟁이 끝났음에도 제라드는 자신의 실력을 꾸준히 키워왔다.

에린과 제라드의 사이에는 약 2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가 존재했다.

그것은 아무리 에린이 특출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는 없는 큰 격차다.

“네가 저 녀석을 만들어낸 것이지?”

구미호는 제라드를 훌륭한 원석으로 만들어낸 것이 은현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저는 그저 길을 제시해줬을 뿐입니다. 따라온 저 녀석이 대단한 거죠.”

“흥. 그 길을 제시하는 네 놈도 정상은 아니지.”

구미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인간의 몸으로 신수의 힘을 집어삼키겠다는 생각의 발상 자체가 굉장히 비상식적이다.

기린의 마력은 구미호의 마력과는 성질 자체부터가 틀리다.

구미호의 마력은 천년을 가까이 수행하며 깨끗한 정기를 가득 모아 더욱 정갈하게 가꾸어 만들어진 순수한 마력의 집합체.

반면 기린의 마력은 자연의 뇌전을 응집시켜, 닿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거칠고 난폭함이 가득하다.

그런 기린의 마력을 인간의 육체 속에 담아내어 제어한다는 발상은 말 그대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과도 같다.

선택은 제라드의 몫이었지만, 그 선택지를 현실로 만들어주었던 은현의 노력과 아이디어도 제정신으로 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앞으로도 제라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거절한다면?”

“솔직히…. 거절은 매우 곤란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신수님이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

구미호는 계속해서 기운을 정갈함게 다듬고 있는 제라드의 모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구미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놀라운 있이었지만, 누구도 그 부분을 지적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재능은 있다. 저 미숙한 것과는 달리, 가르치는 맛도 있어.’

그런데도 제라드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광적일 정도로 자신에게 보이고 있는 호의 때문이다.

제라드의 일방적인 구애는 구미호의 입장에서는 몇백 년 만에 경험해보는 아주 당혹스러운 순수한 감정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절대로 끊을 수 없는 중독이다.

한 번 알아버리기 시작하면 절대로 멈출 수 없다.

400년 전의 자신은 그렇게 한 인간을 사랑했고, 그렇기에 배신을 당했다.

그 배신의 상처가 너무나도 쓰라려서, 지금도 가슴 속 한 부분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차라리 더러운 욕망을 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가차없이 그 혀를 뽑아버리고 머리를 깨부쉈을 것이다.

자신을 보고 흑심을 품고 있다면 그 괘씸함에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니면 은현처럼 기브 앤드 테이크가 오가는 철저한 비즈니스의 관계가 편하다.

하지만 구미호가 읽은, 제라드가 품고 있는 감정은 동경과 연심으로 가득한 순수한 감정 그 자체다.

그렇기에 구미호는 부활한 이래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미 한 번 정을 주었다가 쓰라린 배신이라는 것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생각해보지.”

은현의 부탁과 복잡한 자신의 마음 속에서 구미호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류했다.

“알겠습니다.”

구미호가 거절의 의사를 바로 보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은현에게는 다행이었다.

은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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