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67화 (450/730)

〈 467화 〉 467. 신수 기린(1)

* * *

“현이한테 얘기 못 들었어요?”

“예. 에린 양이 안내해줄 것이라고만 들었습니다만.”

“…….”

아무래도 제라드는 구미호라는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아니, 생각해보면 자신이 사용하는 신수의 힘이 구미호에게서 받은 힘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터.

그저 사념체에 불과했던 구미호가 부활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어쩌지? 혹시 미호도 제라드님이 오신다는 걸 모르나?’

당연히 은현이 미호나 제라드 양측에 미리 의사를 전달해준 줄 알았는데, 최근 들어 매우 바빴던 은현은 이 부분을 빼먹은 듯 보였다.

에린은 구미호가 인간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구미호가 말을 해주지 않으니 자세한 사정은 에린도 몰랐지만, 은현은 과거에 인간에게 배신을 당했던 경험이 아주 큰 상처가 되어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만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새로운 여우 구슬을 제작하여 그것을 그릇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게 된 구미호가 그나마 경계를 풀고 있는 인간은 은현이나 그의 아내들 몇몇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나 자신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도운 일리아나나, 정기적으로 사당을 찾아와 식사를 차려주는 릴리의 노력으로 은혜를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 은현을 비롯한 그의 아내들에게는 나름대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어쩌지?’

하지만 제라드의 방문을 구미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에린도 예측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구미호가 제라드를 거부하며 내쫓으면 어쩌나 싶은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고민했다.

“에린 양?”

“…아니에요.”

에린은 제라드의 물음에 생각을 멈추고 대답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일단은 제라드를 구미호가 있는 사당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오….”

이윽고 구미호의 사당에 도착한 제라드는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기와와 목재로 건축된 사당의 외견은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양식을 보이며 제라드의 눈길을 끌었다.

“미호야. 나왔어.”

에린을 뒤따라 사당의 내부로 진입한 제라드는 자신의 눈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어버렸다.

“아….”

넓은 너비의 쿠션으로 가득한 소파의 위에 드러누워 단잠을 즐기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

제라드가 그 여성의 모습에 넋을 잃은 이유는 소파 위에서 잠들어있는 아름다운 곡선의 고운 자태도 자태지만, 쫑긋거리고 있는 한 쌍의 여우 귀와 살랑거리는 아홉 꼬리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웅장한 내부의 사당 안에서 단잠을 즐기고 있는 구미호의 모습은 예술의 극치를 표현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럴 여유도 아까워서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어휴. 또 자고 있…. 어…?”

에린은 빠르게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인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스륵

너무나도 빠르고 공기의 흔들림에 변화가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동 기술의 그 자체.

제라드가 선보인 이형환위의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에 에린이 경악할 틈도 없이, 상황은 너무나도 빠르게 급변했다.

“음…?”

갑자기 빠르게 접근해 와 자신의 앞을 드리우는 그림자에 단잠을 즐기고 있던 구미호가 두 눈을 뜨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으…음!?”

이내 제라드의 모습을 발견하고 구미호가 퍼뜩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렇게 근접한 거리를 허용했다고?’

빠른 속도로 접근을 해왔지만, 살기는 없었기 때문에 습격이 아니라는 것에 순간 반응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에린보다도 더욱 주위의 기척에 민감한 감각을 가진 자신이, 반응하지 못했을 정도로 흔적을 감추는 기술이 완벽에 가까운 보법이다.

구미호는 조심스레 고개를 올려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제라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은 한없이 딱딱한, 진지한 얼굴 그 자체다.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무거워서, 구미호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제라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습니다.”

“…뭐?”

제라드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구미호는 제라드의 그 작은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자 제라드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건한 자세로 구미호의 앞에 앉고는 순식간에 당황해서 어버버하고 있는 구미호의 한쪽 손을 붙잡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반했습니다.”

“…뭐라고?”

그것은 제라드의 말을 듣지 못해서 되물은 것이 아니다.

그 말이 이 상황에 너무나도 맥락이 맞지 않는 뜬금이 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물은 것이다.

하지만 제라드는 이 상황에 맞지 않는 그 말을 다시 한번 입에 담았다.

그것도 보다 자세하게,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담아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부디…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

구미호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들이 밀어진 제라드의 청혼에 답하지 않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려, 뒤에 있는 에린을 쳐다보았다.

“읏…!”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행동을 일으킨 제라드의 급발진을 막지도 못했고, 눈앞에 벌어진 사건 현장을 보고 땀을 삐질 흘리고 있었던 에린은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향해지는 구미호의 추궁어린 시선에 몸을 움찔 떨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라고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는 구미호의 시선을 받은 에린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구미호의 추궁 어린 시선을 피했다.

에린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것보다, 포기와 방관을 선택했다.

‘나, 나보고 어쩌라고….’

구미호의 저 사나운 눈초리를 뚫고 사정을 설명하자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떨어져라.”

구미호는 설명을 포기하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을 치려는 에린을 붙잡기 위해 낮은 음성을 읊조렸다.

“예? 부디 저의 청혼에 대답을….”

“에이이! 떨어져!”

구미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제라드의 가슴을 맨발로 걷어찼다.

안 그래도 타인의 감정을 읽어 들이는데 민감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제라드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름답다. 훌륭하다. 사랑스럽다. 매혹적이다.’

평소 다른 인간들이 자신을 보고 품는 더러운 욕정들이 아닌, 아주 순수한 매혹으로 발현된 감정.

몇백 년의,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감정에 구미호는 가슴 속 한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라드는 구미호의 거친 발길질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하! 굉장히 표현이 거치시군요!”

“…떨어지라고! 이 구제할 길이 없는 변태 녀석아!”

오히려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계속해서 적극적인 구애를 해오는 일방적인 제라드의 모습에 질린 것은 구미호 쪽이었다.

경멸의 시선으로 제라드를 내려다보며 발길질의 연속으로 어떻게든 제라드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구미호의 맨발을 맞은 제라드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보였다.

“저도 그런 거 아주 좋아합니다! 더 매도해주십시오!”

“이 미X 놈이 뭐라는 거냐! 누가 너 같은 변태 놈의 취향을 알고 싶다고!”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제라드의 취향을 들은 구미호와 일방적인 구애를 펼치고 있는 제라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싸움이 따로 없었다.

“…풉.”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에린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민감한 오감을 가지고 있는 구미호가 에린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제라드와 치열한 실랑이를 벌이던 와중, 매서운 눈빛으로 에린을 쏘아보았다.

“당장 이리 와라! 이 미숙한 것!”

“시, 싫어! 또 나 혼낼 거잖아!”

에린은 황급히 몸을 돌려 사당을 나가 구미호에게서 도망을 치려 했지만, 자기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도 간단히 구미호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신수의 마력을 개방하자마자 제라드를 떨쳐내고 에린에게 달려가 그녀의 도주를 원천 봉쇄시켰다.

“아야!”

구미호가 자신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자, 에린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파!”

울상을 지으며 구미호에게 원망을 토로했지만, 구미호는 노기를 띤 얼굴을 풀지 않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찔끔 흘리는 에린을 내버려 두고, 고개를 뒤로 돌려 제라드를 찾았다.

“너.”

“저 말씀입니까?”

“그래. 너.”

“예!”

“…….”

싸늘한 눈초리와 어조로 말을 건 것이 분명한데, 어쩐지 기뻐 보이는 제라드의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음을 느꼈다.

“장장 이 미숙한 것의 옆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라.”

“알겠습니다!”

에린과 제라드가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자, 구미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라.”

“네. 그러니까 저는 당신과 맺어지기 위해서 운명이 이곳으로 이끌린 게 틀림없….”

“네놈 말고!”

도저히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던 제라드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 그게…. 저분은 제라드님이라고…. 현이의 동료분이신데….”

구미호는 은현의 이름이 나오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그 놈의?”

“응.”

“…….”

구미호는 살짝 시선을 옆으로 옮겨 제라드의 행색을 다시 한번 살폈다.

옷 위로도 드러난 몸의 근육들은 생각보다 잘 잡혀있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 단련한 티가 나는 훌륭한 몸이다.

그리고 더욱 특별했던 것은 제라드가 몸 안에 품고 있는 기운이다.

“현이가 미호한테 부탁해서 제라드님이….”

“됐다. 무슨 사정인지 대강 파악했으니.”

구미호는 제라드가 품고 있는 기린의 힘을 곧바로 알아보았고, 은현이 어떠한 의도로 제라드를 자신에게 보냈는지 깨달았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제라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구미호 고유능력]

[에너지 드레인]

연약해 보이는 구미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한차례 제라드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이윽고 제라드는 몸의 기운이 빨려 나가는 듯한 피로를 느꼈다.

“크으…!?”

하지만 그 피로감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순간 휘청이던 제라드는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곧바로 눈치챘다.

“고통이…가셨어?”

갑자기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영문을 모르는 제라드는 당황할 뿐이었다.

“몸 안에서 상성이 전혀 맞지 않는 사나운 기운이 날뛰고 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너의 몸 안에 있는 신수의 마력을 내가 흡수하여 밖으로 배출시켰다.”

“아….”

작게 탄식하는 제라드의 몸 상태를 살피며 구미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기린인가….’

제라드가 품고 있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동급의 신수, 기린이 가지고 있던 마력이다.

그것도 정제되지 않은 날 것 상태의 사나운 기운.

‘그 기운을 삼켰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무슨 수를 썼는지 인간이 품을 수 있도록 중화를 시키긴 했다지만, 그런데도 부작용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고 조금씩 제라드의 몸을 내부에서 갉아 먹는 기이한 형태가 되었다.

은현의 조력과 제라드의 담력, 그리고 엘레노아의 ‘치천사의 날개’ 등 다양한 조건이 성립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탄생하지 않았을 돌연변이 그 자체.

에린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로 신수의 힘을 이어받은 후예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은현이 제라드를 이리로 보낸 것은 정답에 가까웠다.

신수의 힘이란 것은 은현으로서도 어떻게 조언을 해줄 수 없는 미지의 힘이며, 개체는 다르지만, 동급의 힘을 가지고 있는 구미호는 에린과 마찬가지로 제라드에게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 터.

‘어떻게 된 게 그놈 주변에는 정상적인 놈이 거의 없구나.’

은현 본인을 비롯한 자신을 부활시키는데 일조한 마녀 일리아나나, 차기 성녀인 엘레노아, 게다가 서큐버스인 릴리에, 자신의 힘을 이어받은 에린까지.

그림자의 인공 정령이 깃든 호문쿨루스나 엘프,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고 특별한 이들뿐이다.

그중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신수의 힘을 집어삼키며 살아남고, 기이한 돌연변이로 변모해버린 미친 인간, 제라드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고민을 마치고 작게 한숨을 내쉰 구미호는 입을 열었다.

“후우, 어쩔 수 없겠지.”

“…어? 화 안 내?”

에린은 구미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노기를 표출하지 않고, 생각보다 부드럽게 넘어가려 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놈의 의도가 섞여 있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허투루 쓸데없는 일을 벌일 놈도 아니니.”

“…….”

은현의 부탁이라면, 자신의 그릇인 여우 구슬을 부활시킨 은혜나 이렇게 사당을 지어 잃어버린 요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며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는데, 구미호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제라드에게 신수의 힘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건 나름대로 정당하고 합당한 이유가 존재했다.

“…미호는 은근히 현이한테 무르네. 나한테는 맨날 화만 내면서.”

에린은 조금만 집중을 흐트러뜨린다면 사정없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구미호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네 녀석이 그 녀석의 반만큼이나 나에게 공경심을 가지고 대한다면 나도 그렇게 해주지.”

“흥! 몰라!”

“아오. 저걸 그냥….”

구미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에린의 머리를 한 대 더 쥐어박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제라드에게 말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내일부터는 네 녀석도 이 미숙한 것과 함께 훈련에 참여해라. 알겠느냐?”

“그렇다면 저는 오늘부터 이곳에서 지내게 되는 것입니까?”

“…뭐라고?”

어떤 사고의 회로로 이 사당에서 먹고 자고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구미호는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물었다.

무언가 들뜬 듯한 표정을 짓던 제라드가 기대감이 어린 표정으로 구미호에게 다시 물었다.

“제가 훈련을 받게 된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요?”

“…….”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부디 이곳에서 미호님의 수발을 들 수 있게 해주십시오!”

당당하게 외치는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에린마저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구미호는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냐는 생각을 품으며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냥 꺼져버렸으면.”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