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66화 (449/730)

〈 466화 〉 466. 소영주의 결단(2)

* * *

“이것이…. 제가 제 영지를 버리고 영민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게 된 계기요.”

아르미타스 영지의 공작 저택 집무실에서 2개월 동안 이어진 장황한 자신의 피난에 관한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그렇군요.”

티즈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엘레노아는 그가 겪어야 했을 고난을 헤아리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오빠인 알렉스 또한 동생과 같은 의견이라는 듯 깊이 공감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극히 혹독한 환경 속에서 천 명이 넘는 자신의 영민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선택과 결단을 연속으로 내려야 했던 위정자로서의 심리적 압박감은 피난이 이어지는 약 2개월의 시간 동안 티즈에게 많은 심리적 압박감을 주었을 터다.

한 영지의 관리와 책임을 지고 있는 같은 귀족으로서 알렉스와 엘레노아는 티즈의 심정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작게 숨을 내쉬며 고르고 있는 티즈에게 엘레노아가 말을 걸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생각해두신 게 있나요?”

“솔직히…. 부끄럽게도 마땅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소.”

그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영지를 찾아와 자신과 영민들을 구한 흑랑단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여 아르미타스 공작령까지 오기는 했지만, 이곳의 환경이 어떠한지도 모르는데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소. 이제 나는 더는 한 영지의 영주가 아니니….”

영지를 버리고 피난을 온 자신이 어떻게 영주의 노릇을 할 수도 있을까.

자신에게는 이제 더는 지위도, 권력도, 토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급하게 처분하여서 나온 쥐꼬리만 한 재산뿐.

티즈는 오래된 피난 생활로 피로가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알렉스와 엘레노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제 영민이었던 이들을…. 제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이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고개를 숙이며 이런 비굴한 부탁을 하는 것뿐이다.

“고개를 들어주세요. 티즈님.”

엘레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티즈에게 말했다.

이윽고 알렉스에게로 시선을 옮겨 눈짓으로 그의 의중을 살폈다.

“그래.”

엘레노아의 눈짓의 의미를 파악한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가를 내리자, 엘레노아가 티즈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사실 저희는 티즈님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안이오?”

“네.”

눈부신 미소를 짓는 엘레노아의 대꾸에 티즈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엘레노아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저희 영지의 인근에는 아직 비어있는 농장지대의 소영지가 몇 군데 있습니다.”

현재 비어있는 소영지는 이전에 있었던 페르니아스 왕국 내부의 대규모 귀족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귀족들의 작위들이 몰수되면서 동시에 토지를 환수된 상태로 새로운 적임자를 찾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많은 권력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부패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옆과 뒤에 달라붙어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어먹고 있었던 약소귀족들까지 모두 처벌받은 여파로 인해 생겨버린 공석인 것이다.

“그건….”

티즈는 엘레노아가 하고자 하는 부탁의 내용을 짐작하고 얼굴을 굳혔다.

“부디 이 영지의 영주로 취임하여 관리를 맡아주실 수는 없을까요?”

“…….”

엘레노아의 부탁은 티즈에게 있어 굉장히 뜻밖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티즈는 엘레노아의 권유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요?”

“후후.”

티즈의 질문에 엘레노아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의 의문은 지당하다.

“나는…. 이방인에 불과하오.”

페르니아스 왕국의 백성도 아니며, 제대로 된 지위나 혈통, 검술이나 마법이나 지식들 등 무엇하나 특출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자신에게 작다지만 영지 하나를 맡기겠다니, 엘레노아와 알렉스의 선택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티즈님은 자격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저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오?”

“저는 릴리에게서 티즈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릴리는 저와 마찬가지로 같은 분을 남편으로 맞이했거든요.”

“아….”

티즈는 작게 몸을 떨었다.

귀족 가문의 여식인 엘레노아가 정실이고, 메이드이며 평민의 신분인 릴리가 첩이라는 뜻일까.

사실 은현의 정실에 위치한 것은 일리아나였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티즈는 머릿속으로 그렇게 추측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을 하고, 남편과 첩이 둘이서 여행을 가는 것을 허락해줄 정도면 두 아내의 사이는 매우 돈독해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 저희는 결정한 겁니다. 티즈님께 영지를 드리기로. 이건 순전히 인맥과 친분만으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티즈님이 훌륭한 인격자이며 영주의 자질이 있으시므로 부탁을 드리는 거죠.”

“…….”

사실 티즈는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평가하고 있었지만, 알렉스와 엘레노아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많은 영민을 생각하고 보살필 줄 아는 그 따뜻한 정이나 높은 책임감은 사람들의 위에 서 있는 위정자로서는 아주 훌륭한 덕목과도 같다.

게다가 불타버리면서 회생할 수 없게 되었다지만, 영민들 모두가 자신이 일구었던 터전을 버리고 영주인 티즈를 따라오기로 했다는 것은 영민들과 티즈의 사이에도 굉장히 굳건한 신뢰가 맺어져 있다는 것을 뜻했다.

주변 환경과 인맥이 이렇다 할 빼어난 부분이 없었지만,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면 아마도 날개를 달 듯 날아오를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사람을 소개해 주려 하셨던 게 아닐까.’

엘레노아는 사람을 보내어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까지 티즈와 그의 영민들을 공작령으로 데려오려 했던 의도를 추측했다.

릴리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로 인해 굉장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티즈와 이야기를 직접 나눠본 결과 흔쾌히 티즈에게 지방 소영주의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티즈님은 훌륭한 인격자입니다. 부디 이 제안을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어떻게….”

특별한 공적을 세운 것도 아니고, 타국의 별 볼 일 없는 자신이 이 나라의 귀족이 될 수가 있을까.

“귀족의 작위에 대한 정당성이 걱정되시는 것이라면, 크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티즈님을 추천하도록 하죠.”

“그건…. 정말로 별문제가 없는 것이오?”

그것은 정말로 철저한 인맥 중심의 인사청탁으로 이어지는 부정부패가 아닌가.

“확실히 옳지 못한 방법이긴 합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 흡혈귀 소탕 작전에서 엘레노아와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이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으면서 내세울 수 있게 된 정당한 권리 때문이다.

이것은 아르미타스 공작가문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용인한다는 매우 특례적인 경우다.

자칫 잘못하면 왕국의 주인인 왕가보다도 더욱 세력이 커질 수도 있는 위험한 요소가 존재했지만, 왕가의 디아네 왕비는 이것을 허가했다.

그 공로로 왕가로부터 인정받은, 직접 귀족의 작위와 토지를 수여할 수 있게 된 권한을 행사하겠다는데.

그것에 불만을 품게 될지언정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

확신 어린 알렉스의 장담에 티즈는 할 말을 잃어버린 표정을 지었다.

이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엘레노아가 해준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는 저 마음도 황송하며 부담스럽지만, 두 사람이 보내오는 호의 어린 제안을 거절하는 건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당장 어떠한 성과를 내라는 부담과 세율을 부과하지는 않을 거예요. 티즈님과 티즈님의 영민들이 제대로 정착할 때까지, 최소한 1년은 지원을 해드릴 예정입니다.”

“…….”

간단한 옷도 주고, 먹여주며, 재워줄 공간도 제공해주겠다는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가는 전폭적인 지원에 관한 이야기는 티즈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동안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왔던가.

게다가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제대로 먹지 못해 앙상한 몸을 하고 있던 영민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민들에게도 주어지는 기회였다.

“알겠소. 잘…부탁드리겠소.”

“잘 생각하셨어요.”

고민 끝에 내린 티즈의 결정에, 엘레노아는 미소지으며 반겼다.

◆ ◆ ◆

“하아…. 끝났…따아….”

티즈와 함께 공작령으로 들어온 난민들을 임시로 마련된 판자촌의 거처로 인솔한 임무를 마친 에린은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난민들의 인솔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천 명이 넘는 숫자의 인솔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

엘빈이나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이 도와줘서 이 정도지, 에린은 몸에 쌓인 노곤한 피로에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이야.”

옆에 있던 엘빈이 크게 내쉬운 여동생의 한숨에 물었다.

“…나 이 다음에 미호한테 훈련받아야 해.”

“그렇게 힘든가?”

엘빈도 일단은 여동생을 신수의 후예로 만든 구미호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인간의 몸이 아닌 호문쿨루스의 가상 육체라도 위험 본능을 잔뜩 자극해와 확연한 격차를 느끼게 해주었던 아홉 꼬리가 달린 요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힘든 것도 힘든 건데, 굉장히 짜증나.”

에린은 오늘 밤에 받게 될 구미호의 훈련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틀리면 혼내. 그런데 뭐가 틀렸는지, 어떻게 고쳐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아.”

애초에 신수의 마력을 컨트롤하는 감각은 구미호가 천 년의 시간을 공들여 쌓아올리고 만들어낸 본인 만의 감각이다.

그것을 누구에게 가르친다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20살밖에 되지 않은 에린에게 그 경지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과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다.

은현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에린과 구미호 사이의 격차를 설명해주었지만, 납득을 할 수는 있더라도, 직접 훈련을 받는 에린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차라리 현이한테 훈련받을 때가 편했는데….”

몸은 진짜로 더럽게 힘들지만, 잘못 하나하나를 짚어주며 교육해주었던 은현의 방식이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를 에린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신수의 마력을 다루는 훈련 자체는 몸이 힘들 것이 전혀 없었지만, 정신적인 피로와 짜증은 극에 달한다.

“그렇군. 힘내라.”

엘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줄 뿐이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던전 주택 안으로 돌아온 두 남매는 곧바로 별채로 향했다.

같은 곳을 향했지만, 별채로 향하는 두 남매의 목적은 전혀 달랐다.

엘빈의 경우에는 아직 거동이 불편한 앨리스와 아내를 돌보기 위한 데르킨을 대신하여 에리스를 돌보기 위해서였고.

에린의 경우에는 앞으로 함께 신수의 힘을 다루는 법을 익히게 될 예정인 사람을 데리러 가기 위함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그래.”

엘빈과의 작별을 마친 에린은 곧바로 한 방문의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들어갈게요.”

“네. 들어오시죠.”

문을 열고 들어간 방안에는 스트레칭을 하며 간단히 몸을 풀고 있는 제라드가 있었다.

“제라드님.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하하, 조금 찌릿하기는 하지만, 많이 나아졌습니다. 역시 현이 형님의 처방은 대단하네요.”

은현이 조제한 약을 먹고 요양을 했던 제라드는 조금씩 몸 상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굉장히 건강해 보이는 듯한 그의 상태를 살피고, 에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게요.”

“네.”

제라드는 에린을 뒤따라 별채를 나와 던전의 심층부를 나란히 걸었다.

“그런데 에린 양. 저에게 신수의 힘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실 선생님이라는 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

에린은 뜻밖이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라드를 올려다보았다.

“현이한테 얘기 못 들었어요?”

“예. 에린 양이 안내해줄 것이라고만 들었습니다만.”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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