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9화 〉 459. 남자의 아침
* * *
시련을 마치자마자 전이된 은현을 맞이해준 것은 그를 전이시킨 베르단디였다.
[아이야! 괜찮느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은현에게 달려와 그의 몸 상태를 살피는 베르단디의 얼굴에서는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네.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혹시나 정신에 대한 후유증은….]
“베르단디님.”
시련을 받았던 자신보다도 더욱 허둥대고 있는 베르단디의 양팔을 붙잡고 은현은 자신의 여신을 달랬다.
“저 정말로 괜찮아요.”
[…….]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은현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베르단디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이내 주먹을 쥐어 은현의 가슴을 두들기고는 입을 열었다.
[아이는 도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걱정을 시킬 생각인 것이냐? 그렇게나 나한테 걱정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냐?]
“하하….”
[뭘 잘했다고 웃는 것이냐. 정말 아이가 밉구나.]
은현이 뭐라 돌려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애석한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있자, 베르단디의 잔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죄송해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만큼 은현에게 부여된 세 가지의 시련은 자신에게 있어 반드시 경험해야만 했던, 꼭 필요한 일이었다.
신격을 갖추기 위해서 뿐 만이 아니라, 특히나 시에테와의 교전은 명확히 은현에게 앞으로의 길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베르단디로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고된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걸리더라도, 더 쉬운 길이 있었을 텐데….]
“베르단디님. 하계의 상황 아시잖아요.”
은현을 매개로 직접 하계에 현현할 수 있는 베르단디는 다른 신들보다 하계의 사정을 더욱 빨리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은현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했다.
“아마도…. 저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을 겁니다.”
레이넌이 악마와 손을 잡았고, 게다가 이전에 죽였음에도 메디아에 의해 다시 소생된 사령술사 마리우스가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
“멀리 돌아갈 여유 같은 건 없습니다.”
은현이 불완전한 자신의 권능인 열쇠를 강화할 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불카누스에게 조언을 구했던 것도, 유피테르의 시련을 받아들일 결심을 했던 것도, 모두 하계를 위협하는 이 요소들로부터 대처하기 위함이다.
미리 준비를 해둬도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있을까 말까 한 현 상황에서 자신의 신격을 강화할 수 있는 이번 일은 은현에게 아주 큰 기회였다.
[…너무 아이가 혼자만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아서, 나는 굉장히 마음이 아프구나.]
“이게 제 일인걸요. 게다가…. 이번엔 저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이미 어느 정도 하계에도 준비는 마쳐놓은 상태였다.
혼란스러웠던 페르니아스 왕국 내부의 정치 상황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고, 왕국의 머리인 왕가도 이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은현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었다.
전 군무장관이었던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
왕국 최고의 전력 중 하나인 아르티아 기사단의 단장이며, 이번 흡혈귀 소탕 작전의 공훈을 인정받아 두 번째 공작의 작위로 승작이 결정된 리오드.
두 공작 가문의 세력을 업고 있는 은현의 현재 지위는 왕가의 지위에 미치지는 못할지언정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세를 가지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저를 도와주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베르단디는 은현이 이제는 더는 뒤에서 혼자 움직이며 행동하는 방식을 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의 그는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짊어지며 행동하는 또 한 명의 영웅이기도 하다.
“베르단디님의 얼굴을 다시 뵈니까 피곤이 조금 가셨습니다. 그럼 저는 다시….”
은현이 다시 점점 성장하고 있는 자신의 신격을 기반으로 열쇠를 강화하기 위해 베르단디에게 불카누스가 있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하려 했지만.
[안 된다.]
베르단디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은현의 부탁을 거절했다.
“네?”
은현이 당황하며 묻자, 베르단디는 은현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이끌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새하얀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물감이 풀어지듯이 선명한 배경을 구축해나간다.
구현된 장소는 다름 아닌 은현과 아내들이 잠을 자는 침실.
베르단디는 곧바로 은현을 침대 위에 밀쳐버리고는 뒤척이며 몸을 일으키려는 은현의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며 은현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베, 베르단디님?”
느닷없이 침대 위에 누워서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고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여신의 애정 공세에 은현은 당황했다.
자신의 얼굴을 파묻는 커다랗고 부드럽기 짝이 없는 풍만한 맨살의 감촉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이는 조금 쉬어야 한다.”
“하지만 저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아이의 신격은 지금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상태다. 굳이 지금 바로 가서 대기하지 않아도, 완성된 이후에 작업을 진행해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지금은 조금이라도 아이가 쉬어줬으면 좋겠구나.”
수백 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피폐해진 정신 상태의 후유증을 걱정하면서도, 거의 일 중독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는 은현에 대한 베르단디의 강압적인 조치였다.
“아, 알겠습니다. 쉴게요. 쉬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떨어져 주시면….”
기시감이 들었던 은현은 이 원흉을 깨달았다.
보나 마나 그 커다란 가슴 속에 얼굴을 묻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겠지.
어째서 지금 유피테르의 말이 떠오르는 걸까.
그것은 그저 유피테르의 사심이 가득한 말장난에 불과했던 발언이다.
베르단디의 얼굴을 보고 싶었고, 고생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마음은 사실이었지만, 이런 육감적인 포상까지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유피테르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이 자존심이 몹시 상했기 때문이었지만, 베르단디는 은현의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나와 붙어있는 것이 싫은 것이냐?”
“예…?”
베르단디는 은현의 부탁에 묘하게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반발심리로 인해 은현의 머리를 더욱 강하게 껴안고는 은현을 추궁했다.
“아이야. 대답해라. 이제는 내가 싫어진 것이냐?”
“그, 그런 게…. 읍!?”
풍만한 볼륨 속에 얼굴이 파묻히자, 은현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대답하고 싶음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는 이 불합리한 상황에 은현이 몸부림을 쳤다.
억지로 파묻힌 가슴 속에서 얼굴을 빼내고는 얼굴을 붉히며 급히 답했다.
“후우!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면은?”
“그게….”
은현은 묘하게 민망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베르단디가 보내오는 추궁의 눈초리를 피했다.
“적어도 이번에 제 일이 다 마무리되면, 그때 칭찬을 받고 싶어서….”
“…….”
그때까지 마음속의 욕구를 꾹 참고 있었다는, 너무나도 순수한 자기 절제의 마음가짐에 베르단디는 할 말을 잃어버린 표정을 지었다.
“후후.”
너무나도 허무맹랑하면서도 순수한 이유에 베르단디는 서운한 마음이 단번에 풀어지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었다니 나도 기분이 좋구나. 하지만 지금은 잠을 자고 쉬도록 해라.”
베르단디는 침대 위에 누운 은현의 머리를 끌어 안아주었다.
상냥하게 머리를 토닥여주며 말하자, 지금껏 참아왔던 전신의 노곤한 피로가 단번에 은현의 몸을 덮쳐왔다.
시련은 끝났지만, 반복된 죽음 속에서 겪었던 그 참혹한 경험으로 인해 피폐해진 정신은 여신의 상냥한 배려를 거부하지 못했다.
“그럼…. 저는 조금만 잠을 자도록 하겠습니다.”
스르륵 두 눈이 감김과 동시에 은현은 졸음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래. 푹 쉬어라.”
상냥하게 내민 부드럽고 풍만한 감촉에서 흘러나오는 고운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노곤한 몸을 더욱 편하게 만들었다.
은현은 자신의 얼굴과 밀착한 가슴의 감촉과 냄새를 즐기며 깊은 잠에 빠졌다.
“정말로…. 정말로 고생 많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쓸어내리는 여신의 상냥함은 마치 자신의 아이에게 애정을 가득히 담아 표현해주는 모성이 가득했다.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없었던 게 아무것도 없어서 정말 슬프구나.”
자신이 부여한 권능을 제한당하고 시련에 임해야 했던 은현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던 베르단디는 작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은현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말을 이었다.
“나의 품에서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아이의 마음이 다시 회복되었으면 좋겠구나.”
베르단디는 은현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를 꼭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 ◆ ◆
“으음….”
정말로 깊은 잠에 빠졌던 은현은 푹신한 감촉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이윽고 꿈틀거리던 눈꺼풀이 떠지자마자, 은현의 시야에 보인 것은 여신의 풍만한 가슴이다.
“일어났느냐?”
은현이 시선을 위로 올리자, 자신을 끌어안은 상태로 내려다보고 있는 베르단디의 미소가 보였다.
“…제가 얼마나 잠을 잔 건가요?”
“그건 알 수가 없구나. 이곳은 하계와 전혀 다르게 흘러가니까 말이다.”
신계에는 초나 분, 시와 같은 시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서 몇 년의 시간을 보낸다 한들 하계에서는 단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니, 하계와 신계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틀리다.
“상태는 좀 어떻느냐?”
“…아주 좋습니다.”
은현은 베르단디의 물음에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마치 무거운 추가 전신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노곤한 감각은 사라졌고, 피폐했던 정신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상쾌하다.
여신과 함께 동침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 상태가 쾌적해질 수가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과 베르단디의 관계가 특별하기 때문일까.
얼마나 몸 상태가 호전되었는지, 은현의 몸은 매우 건강했다.
“…음?”
베르단디는 자신의 다리에 닿는 딱딱한 무언가를 느껴 은현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건강해진 은현의 하체를 발견한 베르단디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쳐다보았다.
“…아이야.”
“…이거 제 탓 아닙니다.”
은현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남자들은 모두 매일 아침에 이걸 겪는다고요.”
게다가 지금 자신은 풍만한 여신의 부드러운 피부에 둘러싸여 있는 상태.
이 순간에 반응하지 않을 남자가 없다.
“아이야.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네?”
“하고 싶으냐?”
“…….”
순간 머릿속에 다시 한번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보나 마나 그 커다란 가슴 속에 얼굴을 묻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겠지.
절대로 저 음란마귀가 가득한 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건만, 그의 의지와 달리 은현의 몸은 찰싹 달라붙은 여신의 살결에 자극을 당하고 있었다.
“아이가 원한다면…. 내가 해주마.”
허리에 두르고 있던 여신의 팔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베르단디는 다시 한번 은현에게 물었다.
“하고 싶으냐?”
은현은 살짝 자존심이 상한 듯 두 눈을 딱 감으며 이를 갈았다.
정말 유피테르의 말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는 것이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하고…싶습니다.”
은현은 자신의 욕정을 솔직히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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