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58화 (441/730)

〈 458화 〉 458. 신격이란

* * *

시련이 종료되고 은현의 곁에 남아있었던 것은 그의 파트너였던 애창, 브류나크다.

[좀 진정됐냐?]

“…그래.”

프로세르피나를 따라 시에테가 명계로 복귀하면서 혼자만 남게 된 은현은 브류나크의 물음에 대답하며 바닥에 풀썩 드러누웠다.

“후우….”

녹초가 된 몸과 극한으로 내몰렸던 정신의 피로는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기분이 그렇게 썩 나쁘지는 않았다.

“하하.”

[…뭘 실실 쪼개고 있냐.]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워서 웃고 있는 은현의 모습을 보고 브류나크가 물었다.

“그냥. 기분이 좋네.”

40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스승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냥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급의 검사로 대우를 하겠다는 시에테의 그 말이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은현은 자신의 미래 기억을 강림시켰던 자신의 경험을 회상했다.

약 400년의 이후, 자신이 거머쥐게 되는 검성의 경지.

그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본 것은 매우 강렬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로 흘러가지 않고 저절로 움직여졌던 그 경험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특별함으로 은현의 머릿속에 강하게 박혔다.

“…….”

대단했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그 경험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은현은 생각에 잠긴 상태였다.

이윽고 자신과 시에테의 교전을 계속 지켜보았던 브류나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뭘 봐.]

“어땠어?”

[…….]

브류나크는 생각에 잠겼다.

은현의 질문은 자신과 시에테의 교전을 관전자의 입장에서 본 평가를 물어본 것이었다.

그 질문에 브류나크는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신창(??)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무기이면서 무(?)의 어떠한 분야에서 통달한 경지를 가지고 있는 브류나크조차도 둘의 싸움을 어떠한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창술의 정점에 통달해 있는 자신이 은현과 시에테의 검술을 평가한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적어도 둘이 겨루며 보여주었던 무위가 평범한 인간들이 선보일 수 있는 무위가 아니었다는 것은 브류나크도 알아볼 수 있었다.

[대단했지.]

브류나크는 고민 끝에 그냥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솔직히…. 이제 나 필요하냐?]

살짝 불안한 음정이 담겨 있는 브류나크의 질문에 은현이 피식 웃었다.

“왜? 너 이제 안 쓸까 봐 겁나냐?”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기어들어 가는 듯한 저자세로 나오는 브류나크의 태도는 소멸하기 전이었던 과거에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특별함이 있었다.

브류나크가 자신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 정도로, 은현이 보여주었던 검술은 아주 훌륭했다.

그 경지만을 놓고 본다면, 은현에게는 더 이상 검 이외에 무기는 필요치 않다.

설령 신창(??)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성능을 지닌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은현에게는 자신과 동급인 수준의 무기를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굳이 자신에게 고집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

은현은 손가락을 움직여 멀찍이 떨어져 있는 위치의 바닥에 박혀있던 브류나크를 자신 쪽으로 날아오도록 조작했다.

바닥에 박힌 창날이 뽑히며 허공에 부유한 브류나크가 은현을 향해 날아왔다.

착 감기는 그립감으로 손에 잡힌 창대를 꽉 움켜쥐며 은현이 말했다.

“방금 그건 솔직히 지금으로선 다시 할 수 있을지 엄두도 안 나니까.”

[뭔 소리냐. 그게?]

“아까 그건 그냥 미래의 나를 재현한 것에 불과했거든.”

자신의 몸이긴 했지만, 그 몸을 움직였던 것은 은현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고, 시에테와 검을 겨뤘던 것은 자신이 강림시킨 미래의 자신이다.

[…그게 가능하냐?]

브류나크가 하계에서 신창으로 불리는 무기이긴 했지만, 이쪽의 분야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아니다.

하계의 섭리에 묶여 하계에만 존재했던 브류나크에게는 신계나 여신의 권능 등의 분야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다 보니까 되더라. 그런데…. 솔직히 또 한번 하고 싶지는 않아.”

그것은 빌린 경험이지, 순전한 자신의 경험이 아니다.

게다가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막대한 경험들을 받아들이면서 깨질 것만 같았던 두통을 느꼈던 그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베르단디에게서 부여받은 권능으로 사고 가속을 발동시켜 그 정보처리를 수월하게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필요할 때마다 그 번거로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게다가 감정적인 요인도 존재했다.

“…그 경지는 내 새로운 목표야.”

권능을 이용하여 그 기억을 현재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래의 그 경지로 쫓아가야만 한다.

미래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의 잔재는 아직도 은현의 몸에 남아있었다.

이 경험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소화하는 것이 미래에 검성이라는 경지에 도달한 자신을 따라잡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내 목표 중에는 검술뿐만이 아니야.”

자신의 무기이자, 파트너인 브류나크를 사용하는 창술 또한 마찬가지다.

틀림없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너도 분명히…. 지금보다 더욱 너를 잘 쓸 수 있는 미래가 있을 거야.”

또 다른 분기점에서 검성의 칭호를 거머쥐었던 800살의 은현이 있었듯이 분명히 창술사의 길을 걸으며 그 기술을 극도로 연마한 자신이 존재할 것이다.

몇천 분의, 몇만 분의, 아니, 몇억 분의 일이라는 확률일지라도, 그 미래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을, 이번 일을 계기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도 함께 하자.”

은현은 브류나크를 포기하는 길을 고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냐.]

그의 부탁은 무기인 브류나크의 입장에서 굉장히 기쁜 권유가 아닐 수가 없었다.

자신을 이용하여 창술을 계속해서 갈고 닦아 더욱 높은 경지로 도달하겠다는 그 포부가, 그 앞날에 자신이 함께 할 수 있다는 영광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윽고 은현이 바닥에 드러누웠던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노곤한 몸에는 아직도 나른함이 뒤섞인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계속 이곳에 드러누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다시 부를게.”

[그래. 알았다.]

역할을 마친 브류나크가 은현의 말에 동의하며 역소환이 되었고, 은현은 허공의 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시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은현의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신력이 한곳에 응집되며 한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에게 세 가지의 시련을 부과한 남신, 유피테르였다.

[너의 시련은 훌륭히 통과되었다.]

유피테르는 최종적으로 은현의 시련이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세 가지의 시련은 아직은 불완전한 ‘반신(半?)’의 은현이 제대로 된 ‘신격’을 갖추면서 제대로 된 신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통과의례.

시련은 성공적으로 통과했지만, 은현은 아직 자신의 몸에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음에 의아함을 느꼈다.

[신격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직 무언가가 남았습니까?”

[남았지.]

“그게 무엇입니까?”

설마 이렇게까지 생고생을 했는데, 도대체 또 뭐를 해야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던 은현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유피테르를 노려보았다.

존경과 위엄을 갖춰 대해도 모자랄 판인, 도데카테온의 왕인 자신에게 저런 게슴츠레한 사기꾼 같은 시선을 보내오는 은현을 보며, 유피테르는 끌끌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지.]

“시간…입니까?”

[너는 신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

은현은 유피테르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에 빠졌다.

이윽고 자신의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고 내린 결론을 입에 담았다.

“신격? 신력?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아니. 우리조차도 우리의 탄생과 기원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처음부터 존재해왔고, 신으로서 각자가 어떠한 역할을 부여받았을 뿐이지.]

마치 책 속에 존재하는, 처음부터 존재했었던 등장인물들처럼.

[하지만 인간 중에서는 정말로 드물게 특별함을 타고나서 신격을 거머쥐고 ‘반신(半?)’으로 성장한 사례가 존재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나의 아들인 헤라클레스지.]

현재의 하계가 아닌, 아주 먼 과거의 하계에 규율이 약했던 시절, 유피테르와 인간 여성의 사이에서 헤라클레스는 갓난아기 때부터 아주 뛰어난 근력과 단단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육체를 가졌으며, 훌륭한 영웅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춘 상태였다.

이후 성인이 된 그는 하계에서 12과업이라는 위업을 세우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반신(半?)’이 되었다.

[너와 내 아들, 헤라클레스의 공통점을 알겠는가?]

“…하계에서 세운…업적입니까?”

본인이 스스로 자신이 해왔던 일들을 업적이라고 칭하는 것이 굉장히 낯부끄럽고 양심이 없는 일이었지만, 은현은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반은 맞았지만, 반은 틀렸지. 너와 헤라클레스의 공통점은 그 위업을 달성하면서 보여주었던 여정이며, 그 속에서 전개되었던 이야기다.]

은현이 임했던 시련은 어떤 의미로는 훌륭한 공적이 아니다.

그저 본인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했었던 시련은 은현의 개인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 결과는 은현에게만 도움이 되었을 뿐, 신계나 하계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은현에게 부여된 세 가지 시련은 정말로 말 그대로 ‘은현이 성장해나가는 이야기’였을 뿐이다.

[신격이란 것은 신의 격을 뜻하지. 그 격을 갖추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이야기를 쌓는 것을 의미한다. 즉, 네게 필요했던 것은 너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이야기. 바로 ‘신화’다.]

“저의…‘신화’…?”

[그렇다.]

은현이 지금까지 ‘반신(半?)’으로서 불완전했던 이유는 그에 걸맞는 ‘신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은현이 지금 부여받는 세 가지 시련은 그 신화를 쌓기 위한 통과의례였다는 뜻.

첫 번째 시련은 죽음을 맞이했던 과거에 직면하여 다른 결과를 끌어내는 것.

두 번째 시련은 자신의 무력함게 소중한 파트너를 희생시켜야 했던 과거를 떨쳐내는 것.

세 번째 시련은 다시 만나게 된 스승을 뛰어넘는 것.

그것은 모두 은현이 개인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한 계단씩 마련된 발판이었다.

[너는 훌륭하게 시련을 마쳤다. 곧 있으면 너의 신화를 인정하는 신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겠지.]

“…….”

은현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유피테르의 의미를 그제 서야 이해했다.

자신이 겪었던 시련과 지금까지 하계에서 해왔던 활동들을 ‘신화’로서 인정하는 것은 신계에 존재하는 다른 신들이다.

[이미 도데카테온에서는 불카누스와 베스타, 그리고 미네르바와 마르스를 비롯해서 다수의 신이 너의 과업들을 ‘신화’로 인정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던 신들은 이미 은현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

유피테르의 그 말이 끝나자, 은현은 신비로운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몸과 영혼이 정갈한 물로 가득 차오르는 것 같은 청량한 기운.

이전에 처음으로 불카누스의 망치와 아이기스를 자신의 영혼에 각인되었을 때보다 더 풍요롭고 깨끗한 기분이었다.

[더 많은 신들의 인정을 받고, 너의 신화가 완전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그동안 좀 쉬도록 해라.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지.]

“아,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라고?]

은현은 유피테르의 되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

시련이 진행되는 동안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고 포기한 끝에 꼭 보고 싶었던, 지금까지 꾹 참아왔던 여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베르단디님. 보고 싶습니다.’

[알았다.]

은현의 그 기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베르단디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제가 쉬어야 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거든요.”

기도를 받아들이자마자, 은현의 점점 반투명하게 희미해져 갔다.

[…부러운 놈.]

마치 커다란 숙제를 끝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은현을 보며 유피테르는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이 날아온 유피테르의 날이 선 목소리에 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보나 마나 그 커다란 가슴 속에 얼굴을 묻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겠지.]

은현과 베르단디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유피테르는 진심으로 부러운듯한, 짜증이 섞인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며 은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저 신은 진짜로 답이 없는 신이라는 것을 떠올린 은현이 할 말을 잃었다.

브레이크 없이 바로 들어오는 유피테르의 성희롱에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특별히 네 놈에게 걸맞은 신화를 하나 더 준비해주도록 하마. 하렘신 같은 건 어떠….]

“시끄럽습니다.”

은현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거칠게 유피테르의 말을 끊었다.

어떻게 저런 한심한 신에게 시련을 받을 생각을 했는지, 강하게 후회했다.

‘반신(半?)’에 불과한 은현이 보인 굉장히 무례하고 예의가 없는 행동과 태도였지만, 유피테르는 그런 은현의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돌아간다면 곧바로 제 여신께 항의하겠습니다.”

[부러운 놈….]

유피테르는 은현이 사라질 때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