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57화 (440/730)

〈 457화 〉 457. 제자의 시련(3)

* * *

“스…승님…?”

은현은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으며 굳어있었다.

머릿속에 들려온 아주 그리운 목소리는 400년 동안 은현이 그리워했던 스승의 목소리다.

곧이어 흔들리는 두 눈동자에 들어온 한 여성의 모습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왔다.

이제는 다시는 듣지 못하리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 모습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지금껏 꾹 참아왔던 어떤 감정들이 은현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까앙!

검을 꽉 쥐고 있던 손이 시련이 끝나자마자 방전되듯 힘이 풀려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검이 거친 금속음을 냄과 동시에, 은현의 몸도 맥이 탁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도 자신의 눈앞에 당도한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은현은 다시 한번 물었다.

“스승님…?”

“그래.”

은현의 부름에 시에테가 담담히 대답했다.

생전에 자주 보여주지 않았던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짓고 있는 시에테의 모습을, 자신의 두 눈을 몇 번이고 비비며 재차 확인한 은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미 죽음을 확인했으며, 데스나이트로서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버린 그녀를 해방한 것은 은현이다.

시에테는 천천히 은현이 말문을 트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은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장난치지 마시죠.”

“…뭐?”

인상을 찡그리며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표현하는 은현의 반응은 시에테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

시에테의 되물음을 듣지 못한 은현이 허공을 응시하며 외쳤다.

“이게 무슨 장난입니까? 아무리 신이라고 하셔도, 고인(?人)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정도껏 하셔야죠!”

그것은 시에테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시련을 부과한 유피테르에게 하는 말일 터.

은현은 두 눈앞에 그림자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시에테를 보고도, 그녀의 현현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시련이 끝났음에도 자신을 동요시키기 위한 유피테르의 심술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화를 내는 것일 터.

사제 간의 사이에서, 생전의 시에테가 제자였던 은현에게 가르쳐 준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뒤에도 은현이 잊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검술을 연마해주었다거나, 자신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있는 그 모습이 기분이 그렇게 썩 나쁘지는 않았다.

‘녀석. 그렇게나 나를 생각해주고 있었….’

“하다못해 재현하실 거였으면, 좀 제대로 하셨어야죠!”

“……?”

근 400년 만에 다시 대화할 수 있게 된 제자에게 천천히 다가가려는 순간, 시에테는 은현의 말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제 스승님은 저렇게 웃지 않으십니다! 아니, 생전에도 단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으셨다고요!”

“…….”

“어떻게 저런 가짜를 재현해놓고 뻔뻔하게 제 스승님을 모욕하는….”

퍼억!

“커헉!”

더는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듯 시에테가 은현에게 달려들어, 바닥에 무릎을 꿇어 주저앉은 은현의 얼굴에 주먹을 후려갈겼다.

싸움이 끝나고 육체도 정신도 녹초에 가까웠던 은현은 시에테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

“지금 날 모욕하고 있는 건 바로 네 녀석이다! 이 한심한 녀석아!”

노기를 띤 시에테의 호통을 들은 은현은 오랜만에 겪어보는 귓가를 때리는 음성에 어깨를 떨어야 했다.

몇 번이고 혼날 때마다 들어야만 했던 스승의 호통은 근 400년간 잊혀져 있던 그리운 감각을 일깨웠다.

정통으로 주먹을 후려 처맞은 뺨의 얼얼한 감각을 느낄 새도 없이, 은현은 자신의 그리운 감각을 일깨우는 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정말…. 스승님…. 이십니까?”

“흥.”

시에테는 대답하지 않고 팔짱을 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미 기분이 잔뜩 상해버린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검술을 연마하고 단련해왔던 기특한 은현을 칭찬해줄 마음은 싹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

기분이 단단히 꼬여버린 시에테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보며 관찰했던 은현은 점점 안색을 굳혔다.

좌우에서, 정면에서 살펴보고 다시 보면 볼수록, 자신의 스승이었다.

저 얼굴과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이나 감정들은 400년 전, 자신에게 검을 가르쳤던 그녀라는 사실을 은현의 머릿속에 깊이 박아넣기 시작했고.

‘…큰일 났다.’

은현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고개를 홱 돌리며 콧방귀를 뀌고 있는 시에테의 저 태도는 현재 그녀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제자로서 검을 배우면서, 한 지붕 아래에서 갖은 수발을 다 들었던 은현이기에,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이 경험은 아주 두고두고 자신의 바가지를 긁어댈 게 뻔하다.

“스승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정말로….”

“흥. 너는 가짜로 재현된 환상에게도 말을 거는구나. 정말로 재주도 좋아.”

“…….”

진짜로 화가 나도, 단단히 화가 났다.

이것은 은현의 실수가 부른 대참사였다.

400년 동안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과거의 스승을 이렇게 우연히 다시 볼 기회가 생길 줄 누가 알았을까.

엘프의 숲에서 데스나이트로 전락해버린 그녀와 검을 겨룬 것도 그러했지만, 이런 경우를 전혀 상정하지 못한 것에 은현은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가.

영웅들 사이에서도 가장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일리아나에게 시달리면서도 전혀 굴하지 않았던 것이 은현이다.

은현은 잔뜩 심통이 나 있는 시에테의 철벽을 공략하기 위해 다시 말을 걸었다.

“스승님. 제가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

하지만 시에테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개를 돌려 은현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시에테의 태도에 은현은 근 400년 만에 어떠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그리움과 함께 은현의 가슴 속을 채우는 억울함이다.

“솔직히 스승님도 잘못하셨어요.”

“…뭐라고?”

어떻게든 시에테의 반응을 보기 위한 은현의 도박수에, 시에테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감히 자신에게 잘못을 따지다니, 괘씸하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저 진짜로 스승님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예전에는 저한테 칭찬 한 번 안 해주셨지 않습니까.”

은현이 시에테의 밑에서 검을 배운 것은 고작 몇 년밖에 되지 않는다.

재능이 없는 자신을 가르치는 시에테의 태도는 굉장히 엄격했다.

혹독하게 가르치면서 칭찬 한번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은현이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위를 노려보며 정진하도록 바랬기 때문.

안 그래도 성실한 노력파인 그가 돌변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은현이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하면서, 지극히 낮은 자기 평가의 원인은 시에테가 원인이기도 했다.

재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자기 평가를 교정시켜주지 않았다.

“…….”

본래라면 적반하장이라며 은현을 나무랐겠지만, 은현의 하소연을 들은 시에테는 반박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은현은 할 말을 잃어버린 시에테의 표정을 확인하고 두 눈을 치켜떴다.

‘됐다.’

이것은 기회였다.

“스승님. 어떻게 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조금씩 마음이 약해진 시에테는 어째서 이 신계에, 자신의 시련에 존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은현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건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갑작스레 스승과 제자의 사이에 난입한 것은 도데카테온의 신 중 하나인 프로세르피나였다.

은현은 시련을 마치자마자 자신과 시에테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여신의 모습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네요. 저와 남편이 하사한 무구는 아주 잘 사용하고 있는 것 같군요?]

눈웃음을 지으며 묻는 프로세르피나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은현은 민망한지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려 피했다.

프로세르피나가 은현에게 하사한 ‘코르누코피아’는 은현의 영혼에 막대한 신력을 생성시키는 신의 무구로서, 그 효능은 전반적인 신체 능력의 향상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신체 능력의 향상 속에는 스태미나의 향상도 포함되어 있으며, 은현의 밤일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부분을 프로세르피나가 짓궂게 짚어낸 것이다.

“…정말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은현은 여신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일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 민망한 화제를 먼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여신 쪽이다.

[그렇군요. 그것을 제공한 저희 쪽에서는 정말 좋은 소식이지요.]

정말로 다행히도, 프로세르피나는 이러한 화제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럼 본래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죠. 그대 스승의 영혼은 현재 명계에 잔류한 상태입니다.]

“명계에…잔류입니까?”

[네. 보통 하계에서 절명한 인간의 영혼은 명계에서 하계의 업적을 평가받아 천국행과 지옥행의 판결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대의 스승에게 제가 관리하는 명계에 잔류하는 것을 권했지요.]

그 결과, 시에테의 영혼은 기억을 잃지 않고 명계에 남아 계속해서 검술을 연마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은현은 프로세르피나의 의도를 눈치챘다.

시에테의 소망은 검술의 완성을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 소망을 이루기, 육체의 한계에 사로잡혀 있던 하계보다는, 육체의 노쇠나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명계라는 장소가 더욱 최적이 아닌가.

명계라는 곳의 규율이나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은현도 시에테가 받은 특혜가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것은 대강의 감으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은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신의 스승이 좋은 곳에서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숙원을 이루기 위해 계속 정진하고 있다는 소식은 제자인 은현에게 있어 굉장히 기쁜 소식이다.

[그대에게 고마움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대의 스승이 받아야 하는 정당한 보상이니까요.]

은현을 키워낸 스승이라는 점이 그 특혜를 받아야 하는 업적 중 하나였지만, 은현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럼 시련이 끝났으니, 그대의 스승은 다시 명계로 데려가도록 하죠.]

“아….”

은현은 작게 탄식했다.

400년 만에 만난 스승일진데, 제대로 된 대화 한번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후후, 그런 표정을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씀은?”

[조만간 정식으로 그대를 명계로 초대하도록 하죠. 그대의 스승과 나눌 해후는 그때로 미뤄두도록 하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이 사라지는 프로세르피나를 따라, 시에테의 몸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스승님. 저는….”

은현이 다급하게 시에테를 불렀지만, 이내 말문이 턱 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스승과의 재회에 제자의 마음속에 다양한 마음이 교차했다.

그런 은현에게 말을 먼저 말을 건 것은 시에테 쪽이었다.

“훌륭했다.”

“…네?”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었던 네 검. 아주 훌륭했다.”

“아….”

은현은 아주 작게 어깨를 떨었다.

시에테의 그 말이 은현의 가슴 속을 울렸다.

그것은 생전에 단 한 번도 받지 못했었던 스승의 칭찬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그 기술의 경지는 은현의 미래 기억을 일시적으로 강림시켜 재현해낸 것에 불과하다.

열쇠의 효과가 사라진 은현의 머릿속에 그 기억의 일부가 잔류하여 몸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경지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한다.

“스승님. 저는 아직 스승님께 가르침을….”

“아니.”

시에테는 조언을 구하려는 은현의 말을 끊었다.

“나는 이제 더는 너에게 검을 가르칠 수 없다. 네가 보여주었던 그 경지는 틀림없이 나의 검으로 거머쥔 경지가 아니야.”

견본으로 자신의 검을 참고했을 뿐, 그 검은 시에테 자신의 검이 아니라, 은현의 검이다.

“너는 이제 더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아….”

점차 사라져가는 시에테의 몸은 어느새 상체만이 남아 있었다.

사제 관계를 부정당했다는 사실은, 시에테가 이제는 은현을 한 명의 훌륭한 검사로서 인정했다는 뜻이다.

400년 만에 자신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시간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은현은 할 말을 잃고 몸을 떨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검사와 검사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사제 관계가 아닌, 검사와 검사로서.

그 말이 은현의 가슴 속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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