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화 〉 454. 다른 분기점의 가능성(2)
* * *
카아앙!
은현과 그림자의 검과 검이 충돌하고, 치열한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한 번의 검격을 맞부딪친 여파는 강력한 충격파를 흩뿌리며 주위의 공기를 떨리게 만들고 찢어버리는 살벌함.
검격은 첫 번째 충돌로 끝나지 않고 물이 흐르는 듯한 유려한 움직임을 통해 다음의 동작으로 이어진다.
카아앙!
두 번째 충돌에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까지, 살벌한 공격의 연속이 이어진다.
그림자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은현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숨이 안 쉬어져.’
연속으로 자신의 급소를 정확히 공략해오는 그림자의 검을 모조리 쳐내는 은현은 숨을 고를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잔상을 남기며 쇄도해오는 시에테의 검은 정말로 날카롭고 정밀하다.
쉴 새 없이 공격해오고 상대방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 그 연속 공격에 은현이 얼마나 많은 죽음을 맞이했던가.
하지만 지금의 은현은 그림자의 공격을 모두 대응해냈다.
카아앙!
시에테의 잔재인 그녀의 그림자를 따라잡기 위해 많은 죽음을 경험하여 그 움직임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던 은현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이게…나의 미래?’
필사적으로 그림자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아내듯, 그 공격 패턴에 맞는 해답을 찾아 대응했던 자신과는 다르다.
은현은 약 400년 뒤의 자신의 미래에 대해 낯섬을 느꼈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고 분석하여, 들어올 공격을 예측하는 사고의 흐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방의 미세한 동작의 차이를 알아보고,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것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예측하고 흐름 속에 몸을 맡겨 움직인다.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그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것처럼, 명확한 문제와 정답이 존재했지만, 정답에 도달하는 풀이 과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몸이, 본능이 기억을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면서 몸과 본능에 새겨진 전투의 기억은 주인인 은현의 몸을 정답으로 이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면서, 자신이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시에테의 잔재로 재현된 그녀의 그림자와의 교전에서 은현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신보다 더한 400년 뒤의 미래에 존재하는 800살의 은현의 기억이다.
카아앙!
‘…대단해.’
시에테의 그림자가 펼치는 연격에 차분히 대응하는 자신의 미래 기억에 감탄했다.
은현은 아직도 자신의 육체가 이 미래의 기억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정말로 분하지만, 이 깨끗하고 유려한 동작으로 시에테의 검을 모조리 흘려내는 이 기술의 정수가, 너무나도 대단하고 경이롭게 느껴진다.
‘도달하고 싶다.’
이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심이 은현의 마음속에 깃들기 시작한다.
저것을 달성한 존재가 다름 아닌 미래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더더욱 은현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이것은 희망이다.
‘나도 할 수 있구나.’
400년을 가까이 살아오며 많은 경험을 축적하여 지금까지 살아왔음에도, 전혀 시에테의 발끝도 따라잡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있던 은현을 끌어올려 주는 한 줄기의 희망의 빛.
‘빠짐없이 모조리 배워야 해.’
은현은 자신의 몸을 강제로 이끌며 그림자와 교전하고 있는 이 감각을, 이 사고의 흐름을 하나하나 느끼며 집중했다.
베르단디의 권능인 ‘시간 가속’과 ‘사고 가속’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은현의 머릿속은 피폐해졌던 아까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시에테 검성술]
[앵화(?花)의 춤]
시에테의 그림자 주위로 일어나는 미약한 선풍이 그림자와 그림자의 검을 감싸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림자의 다리가 하나의 춤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동작으로 스텝을 밟으며 은현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과는 달리, 춤을 추는 주체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검의 움직임은 심상치가 않다.
시에테의 앵화의 춤이라는 기술은 벚꽃 나무의 아래에서 봄바람을 맞아떨어지는 벚꽃의 꽃잎들을 모조리 베어내는 것에서 시작된 초신속의 연격이다.
약 5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극한의 검속을 끌어올려 수십의 참격을 퍼부어 대상의 신체를 조각내는 흉악한 기술의 정점 그 자체.
궤도를 잃을 수가 없고, 빠르며 참격 하나하나가 매섭게 급소를 파고들어 온다.
은현은 그림자의 그 움직임에 맞춰, 자신도 기술을 사용했다.
[시에테 검성술]
[천화(?花)의 춤]
시에테가 기술을 사용한 것과 동시에, 은현 또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시에테의 그림자가 퍼붓는 수십의 참격에 대항한다.
‘이건 내 기술이 아니야.’
자신보다 400년에 가까운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며, 검의 극한을 추구하여 단련한 800살의 은현이 시에테의 기술을 견본으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도록 알맞게 개량하여 고안해낸 기술이다.
‘천화(?花)’란 ‘하늘에서 내리는 꽃’이라는 말로 겨울에 내리는 눈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수십 개의 벚꽃잎을 모조리 베어내는 참격이라는 기술의 이름에 호응하여, 800살의 은현은 자신이 개량한 기술이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카아앙!
은현과 시에테의 그림자, 두 존재의 각자를 중심으로 몰아치던 선풍은 두 존재의 충돌로 인해 어우러져 거친 돌풍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돌풍의 중심에서, 두 기술로 발현된 수십 개의 참격의 충돌이 점점 주변을 가득 메워 나갔다.
소리가 떨리고, 충격의 여파가 잔류하여 공간의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이 와중에도, 두 존재는 계속해서 참격을 주고받았다.
뒤를 보지 않는, 방어가 없는 극한의 공격들이 서로 맞부딪치면서도, 5초의 시간 동안 서른 번에 가까운 참격을 주고받았음에도 결정타는 나오지 않았다.
콰아앙!
극한으로 단련된 두 존재의 기술이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소리는 이미 금속과 금속의 충돌로 발생할 수 있는 소리의 수준이 아니다.
대기가 떨리고 공간을 통째로 분쇄시킬 것만 같은 강렬한 폭음.
그 살벌함이 멀찍이서 두 존재의 교전을 관전하고 있는 무기에게도 전달이 되었다.
[…미친.]
브류나크는 자신의 창대를 떨었다.
숨을 쉴 새도 없이, 몇 번이고 서로의 검을 부딪쳐 무위를 겨루는 저 광경에 경악한다.
[저게 인간이 들어설 수 있는 영역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시에테의 그림자는 처음부터 인간을 초월한 규격 외의 존재였지만, 브류나크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은현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번 199번째의 시련을 도전하는 은현은 지금까지와 확연히 다르다.
동작의 정밀도가 상승하고, 날카롭고 빠르게 상대방의 급소를 취하는 유려한 움직임을 선보인다는 표현도 적합하지 않다.
[저게…무(?)라고?]
검이라는 것은, 검술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살점과 뼈를 베어내고, 그 목숨을 절명시키는 기술의 집합체다.
브류나크는 검이 아니라 창이었지만, 무기라는 근본에서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단지 다른 형태로, 다른 기술과 방식을 정립하고 단련시켰을 뿐이지, 그 본질은 검술과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으며 같은 근본을 공유한다.
그 근본이 바로 무(?).
브류나크는 은현과 시에테의 그림자가 교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지금껏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의 일부가 깨부숴지는 신선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두 검술의 충돌은 살벌한 풍경의 연속이 연출되고 있었지만.
저 혼란의 중심 속에서 끊임없이 검을 부딪치는 두 존재의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서로의 무(?)를 한층 더 높은 격으로 끌어올려 주고 있는 것 같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검으로 표현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은현은 신이 부과한 과업을 달성하고 자신의 신격을 갖추기 위한 과정이라고, 이 시련을 설명했다.
[…진짜로 신 되는 거 아니야. 저 놈?]
그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콰아앙!
검과 검의 충돌로는 도저히 낼 수가 없는 살벌한 폭음을 연발시키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공간의 주위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두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게 기술의 연속을 퍼부었다.
그렇게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가던 와중, 은현은 자신의 가슴 속에 피어나는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
‘이건…. 기쁨?’
그 빈 자리를 가득 채운 것은 검사라면 당연히 가지게 되는, 상대방을 뛰어넘고 싶다는 승부욕이다.
은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니다.
이 기쁨과 승부욕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강제로 강림시킨 미래 기억의 일부가 느끼는 감정.
‘고마워.’
고작 기억의 일부뿐이지만, 훌륭한 대적의 상대가 존재하는 이곳에 검을 겨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는 사실에, 다른 분기점에 존재하는 800살의 은현의 기억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검에 담아 휘둘렀다.
심지어 준비해둔 대적이 상대가 800년 전 자신에게 검을 가르쳤던, 은현이 그토록 목표로서 따라잡고자 했던 시에테다.
비록 본인이 아닌, 그녀의 잔재로 이루어진 가상의 존재였지만, 그 사실은 800살의 은현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카아앙!
몇 초간 이어졌던, 주위를 초토화로 만드는 기술의 폭풍이 끝나고, 은현과 시에테의 그림자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몸을 뒤로 빼며 거리를 벌렸다.
“크….”
은현은 작게 신음했다.
극한으로 단련된 기술이 충돌하면서 벌어진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수십 번의 참격을 주고받았던 검은 이미 만신창이.
날카로웠던 날은 이미 이가 다 빠져버린 지 오래고, 금이 가버린 검신은 자신의 역할을 마치자마자 부러져버렸다.
이윽고 부러져버린 검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새로운 검을 소환하여 자세를 잡았다.
몇 번이고 검을 부딪쳤던 기술의 반동으로 양팔이 벌벌 떨리며 한계의 한계까지 쥐어짜 내어 움직였던 근육들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외상의 데미지는 전혀 없었지만, 무리한 움직임으로 그의 몸은 조금씩 삐걱거리며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시간 역행’을 통해서 몸의 상태를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
격렬한 움직임의 이후 몰려오는 피로와 격통에 검을 쥐고 있는 양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지만, 끝까지 자세를 풀지 않았다.
‘나의 800년을 확인해 볼 기회가 이렇게 주어졌다.’
은현의 몸에 동화한 은현의 미래 기억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80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단 한시도 시에테의 검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검술을 계승한 유일한 제자로서, 그녀의 뒤를 따라잡고 싶은 검사로서, 은현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단련을 거듭했다.
끝이라는 것을 정해두지 않고 검술을 연마한 끝에, 은현은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검성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지만, 은현에게는 부질없는 명예였다.
그토록 자신이 계승하고 싶었던 시에테의 칭호였지만, 은현이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아니라, 800년 전에 자신의 곁을 떠난 시에테다.
은현의 몸속에 동화된 은현의 미래 기억은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음에도,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이것은 기회다.
자신이 단련한 800년의 세월이 시에테에게 닿을 수 있는지, 자신은 제대로 스승의 뒤를 따라잡을 수 있었는지, 자신이 일궈온 노력이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받을 기회.
은현은 체내에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검속에 집중시켰다.
시에테의 그림자 또한 은현의 그 모습에 호응하여 자세를 잡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력을 응집시켜 한데 모으는 두 존재는 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서로에게 기술을 선보였다.
[시에테 검성술]
[칠성연참]
[은현 비기]
[백야절명참]
정면에서 동시에 가까운 타이밍으로 파고들어 오는 일곱 번의 참격에 대응하는 은현의 기술은 단 한 번의 참격이다.
사람의 몸과 검은 하나뿐이다.
동시에 가까운 타이밍일 뿐이지, 일곱 번의 참격이 0.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날아오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은현이 선택한 방법은 일곱 번의 참격 중 그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참격을 깨부수는 것.
오른쪽 어깨로부터 대각선 아래로 그으려는 그림자의 속검을 은현의 검이 일섬을 그었다.
서걱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그림자의 칼날이 바닥에 박혔다.
쩌저적
동시에 은현을 둘러싼 새하얀 공간이 금이 가기 시작하여 깨져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은현이 시련을 클리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끝난 건….”
“성장했구나.”
“……!”
마침내 시련을 마쳤다는 것에 안도했던 은현은 담담하게 자신을 칭찬하는 그리운 여성의 목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