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3화 〉 453. 다른 분기점의 가능성(1)
* * *
[당장 저것을 멈추도록 하세요!]
[그럴 수 없다.]
베르단디의 거친 요구에 쥬노는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제 아이가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도데카테온의 신들은 제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요!]
얼굴을 붉히며, 단단히 노기를 띤 높은 언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무례한 태도다.
베르단디나 쥬노나 신계의 일원으로서 누구의 위계가 더 높냐는 등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쥬노는 도데카테온의 왕인 유피테르의 아내이며 그 무리의 안에서 여왕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하계의 재탄생을 주도한 일곱 여신 중 하나인 여신.
위로 떠받들지는 않더라도, 무례한 태도를 보이며 언성을 높여도 되는 여신이 아니다.
하지만 베르단디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미 은현과 영혼의 공명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상태로 그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은현의 정신이 더 망가지기 전에 저 시련이라는 것의 미친 짓을 당장이라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시련은 멈춰 줄 수 없다.]
[어째서인가요!]
[우리는 분명 길을 열어주었다. 포기하고 싶다면 언제라도 베르단디.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그것은 확실히 은현에게 전달한 사실이다.
유피테르는 은현에게 시련을 부과하면서 포기하고 싶다면, 그의 여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이 시련을 중단하라고.
은현의 입장에서는 도망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길을 제시했다.
[그대의 사도는 너에게 도움을 요청했나?]
[…크.]
베르단디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은현은 200번에 가까운 넘는 죽음을 맞이하며 이성이 망가지는 와중에도,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라는 시련에 대한 공략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그…렇습니다. 아이는 제게…도움을 요청하고 있지 않아요.]
쥬노는 계속해서 베르단디에게 말을 이었다.
[같은 자매 여신들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네가 혼자 왔다는 것은 너의 독단적인 행동이라는 뜻이겠지.]
[…으.]
정곡을 찔렸다는 듯 베르단디는 몸을 살짝 떨었다.
실제로 자신의 자매 여신인 우르드와 스쿨드는 시련의 중단을 보류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우르드는 아직까지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스쿨드는 은현의 정신이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을 우려하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은현이 스스로 포기하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시련을 중단시키는 것은 명분도 그렇고 너무 성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가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그렇게 시련의 중단을 보류했던 두 여신과는 달리, 베르단디가 이렇게 홀로 찾아와 쥬노에게 시련의 중단을 강력하게 요청했던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였다.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과 전신의 고통을 꾹 참아내고 계속해서 시련을 이행하는 은현의 모습.
그것은 ‘시련’이라는 이름을 빌린 ‘지옥’ 그 자체다.
베르단디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은현의 그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이것은 순전히 자신의 지극히 사적인 독단 행동이라는 것을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이 시련 속에서 제 권능이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다시 수정을….]
은현이 이 시련 속에서 이토록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베르단디가 부여한 권능인 ‘시간 가속’과 ‘사고 가속’을 쓸 수 없다는 점이 매우 컸다.
전투에서 자신의 권능이 은현에게 많은 어드벤티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베르단디 또한 알고 있었다.
베르단디가 이 시련을 은현에게 굉장히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유피테르가 은현에게 부여한 자신의 권능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주 훌륭한 무기를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며 큰 패널티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 또한 불허한다.]
쥬노는 아까 전부터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베르단디에게 물었다.
[이것은 저 인간은 너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갓난 아이인가?]
[…….]
[네가 저 인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그것은….]
베르단디는 쥬노가 자신과 은현 사이의 관계를 언급해오자 몸을 움찔 떨며 반응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싸고 돈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지.]
쥬노는 시련 속에서 시에테의 그림자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은현의 모습을 응시하며 말을 잇는다.
[정말로 저 인간이 소중하다면 잠자코 기다려라.]
[…제 아이가 성공할 수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너는 믿지 않는 건가?]
의외의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쥬노가 두 눈을 치켜뜨며 베르단디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선택한 아이입니다.]
베르단디는 은현이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여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은현에게 품고 있는 신뢰는 굳건하며, 그것은 여신과 사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남녀 간의 정사로 맺어진 신뢰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떨떠름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단지….]
저렇게까지 고통을 받으면서 성장을 할 필요가 있을까.
베르단디는 회의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저런 무모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힘든 길을 걸어가지 않더라도 성장할 방법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은현이 더는 고통을 받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르는 베르단디의 입장에서는 수백 번의 죽음을 반복하며 쌓는 성장이란, 전혀 탐탁지 않았다.
좀 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껴주고 자신의 도움을 받으며 차근차근 성장해나가 자신의 기대에 보답해주기를 바랐기에, 이런 힘든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이야….]
베르단디는 시련에 임하고 있는 은현을 응시하며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 ◆ ◆
어째서 이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행할 생각을 품었는지는 은현 본인 스스로도 잘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갑작스레 번뜩여 떠올랐던 스승의 조언은 은현의 머릿속에 어떠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성장하고 싶다면, 네 목표는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부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의 한계를 부술 방법은 도대체 뭐가 있을까.’
평소였다면 아무리 고민을 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을 답답한 난제였지만, 은현은 다른 이들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반신(半?)’이다.
게다가 정말로 형편이 좋게도, 자신이 제한당한 권능은 베르단디가 하사한 권능뿐.
자신이 창조해낸 ‘열쇠’는 아직 존재했다.
은현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이번에 자신이 재현시키길 시도하는 역사는 조금 특별했다.
[역사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
[소환, 검성 은현]
과거의 역사가 아닌, 미래의 역사.
그리고 대상은 바로 은현, 자기 자신이다.
본래 역사라는 것은 인류의 사회 속에서 있었던 변천이나 흥망의 과정, 사건들을 후세의 인물들이 기록하는 것.
은현이 지금껏 재현해왔던 무기들은 모두 명확한 ‘개념’이나 ‘키워드’들이 전승됐던 과거의 유물들.
하지만 그가 지금 재현하려는 것은 조금 다르다.
존재하는지도 명확하게 확정되지도 않은, 알지도 못하는 미래의 역사.
‘검성 은현’이라는 미래의 어느 분기점에 존재하고 있을 바로 자기 자신의 미래다.
은현은 자신의 의식을 매개로, 미래에 존재하고 있을 자신의 기억을 의식 속에 강림시켰다.
“크…으!”
어떠한 분기점에서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미래.
검의 끝을 추구하다가 끝에는 절망하는 미래.
아내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맞이하여 이어나가는 미래.
머릿속으로 뒤죽박죽의 수많은 기억이 흘러들어와 의식을 혼란하게 어지럽힌다.
그 기억들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끔찍한 기억들도 있었으며, 그 미래 속에 취하여 행복함을 만끽하고 싶다는 달콤한 기억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의 은현에게 필요한 것은 끔찍한 기억들은 물론, 아내들과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는 행복한 기억도 아니다.
시에테의 가르침과 유지를 이어받아, 검의 길을 계속 추구하여 그 끝에 존재하는 극한에 달한 검성의 기억.
지금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 기억이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막대한 시간과 감정이 담겨 있는 그 기억들을 강림시키고, 지우며, 새로운 기억을 강림시켜 반복하는 작업이 절대로 쉬울 리가 없다.
특히나 지금의 은현은 ‘사고 가속’을 사용할 수가 없어 머릿속의 정보 처리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
평소의 습관으로 단련이 되었다지만, 여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가 없는 은현은 이전보다 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은현은 머릿속에 주입된 하나의 기억을 주시했다.
‘이건…?’
은현이 그 기억을 주시한 이유는 그 기억이 자신의 ‘현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기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미래는 특이했다.
일리아나나, 엘레노아, 릴리나, 에린, 심지어 베르단디와도 이어지지 않았고, 오랜 시간을 홀로 방황하는 그런 미래였다.
분명히 자신의 현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미래가 아닌, 자신의 과거에서 어떠한 분기점을 통해 만들어진 미래.
이것 또한 어떠한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런 식으로 분기점으로 운명이 갈릴 수가 있는 것인지, 신기한 감상을 품었던 것도 잠시, 은현은 그 미래의 기억을 읽어 들였다.
스승의 유지를 이어받아 검의 극한을 깨닫고, 시에테에 버금가는 검성으로서 성장한 그 기억은 은현이 찾았던 그 가능성을 지닌 미래다.
‘찾았다.’
은현은 곧바로 그 기억을 자신의 의식 속에 녹여내어 융화시켰다.
“쿨…럭!”
시에테의 그림자가 휘두른 칼날로 인해 몸이 두 동강이 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던 은현은 계속해서 검성이 된 자신의 미래 기억을 받아들이기에 바빴다.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
그 기억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 수련이, 시간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다.
100년, 아니 200년, 어쩌면 400년까지도 단련에 단련을 멈추지 않아 거머쥔 검성의 경지.
또 하나의 자신은 재능이 없는 자신의 몸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그 경지를 이루어냈다.
은현은 몇백 년의 시간 속에서 오직 전투와 수련에 대한 기억만을 골라내어 자신의 의식 속에 정착시켰고, 검성의 칭호를 거머쥐었던 또 하나의 자신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네가 나의 목표구나.’
은현은 확실히 깨달았다.
스승인 시에테의 말은 옳았다.
자신의 목표는 시에테가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깨부수고 검성이라는 칭호를 거머쥔 자신의 미래.
무능에 가까웠던 자신의 재능에 한탄하고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 절망의 감정 속에서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실낱과도 같은 아주 가는 희망이었지만, 자신에게도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것에, 망가져 가던 이성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마침내 5초라는 시간이 지나고, 두 동강 났던 은현의 몸이 다시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은현은 쥐고 있던 검으로 바닥을 지지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 딱 199번째인가….”
휘청거리던 몸을 일으켜 시에테의 그림자를 응시한 은현은 미소지었다.
눈빛이, 자세를 잡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세밀한 변화가 생겨 위화감이 가득했지만, 시에테의 그림자는 은현에게 검을 겨누며 199번째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200번을 채울 수는 없지.”
카아앙!
스승의 잔재와 수백 년 뒤 미래의 일부를 접한 제자의 검이 충돌했다.
불완전하다지만, 과거의 검성과 미래의 검성의 충돌은 이 시련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