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1화 〉 451. 스승의 그림자(2)
* * *
[놀랐잖아! X끼야!]
멀쩡하게 몸을 일으킨 은현의 모습을 확인한 브류나크가 바닥 위에서 창대를 펄쩍이며 외쳤다.
은현이 그대로 검에 심장을 관통당해 절명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품었던 브류나크는 안도와 동시에 짜증을 느꼈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던가!]
세 번째 시련 속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추가적인 부가 효과를 사전에 알았다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나도 몰랐는데.”
자신조차도 세 번째 시련의 조건을 제대로 들은 것이 없었던 은현은 살짝 억울한 기분을 느끼며 곤란함이 담긴 쓴웃음을 지었다.
손을 내뻗어 브류나크를 자신의 손으로 복귀시킨 은현은 브류나크를 지지대 삼아 바닥에서 일어났다.
“…….”
가만히 서 있는 시에테의 그림자를 응시하며, 은현은 생각에 잠겼다.
이 시련은 자신이 시에테의 무위를 뛰어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도 하계와는 전혀 다른 흐름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제한 시간도 없다.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전투 능력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베르단디가 하사해준 여신의 권능은 사용하지 못한다.
‘시간 가속’과 ‘사고 가속’은 이미 제한을 당한 상태.
은현은 주어진 정보들을 종합하며 시련의 클리어 조건을 추측했다.
아마도 세 번째 시련의 정확한 클리어 조건은.
“‘순수한 육체의 스펙으로 스승님을 뛰어넘어라.’인가….”
스스로 생각을 해보고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 난이도를 자신이 클리어할 수가 있을까?’라는 문제를 앞에 두고, 앞으로, 뒤로, 옆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각도기를 들이밀고 성공의 가능성을 가늠해보아도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유피테르가 설정한 ‘여신의 권능’의 제한과 ‘클리어 조건’은 악독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뭘 실실 쪼개고 있냐?]
은현은 그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냥. 꼭 이 시련을 클리어하고 싶어졌거든.”
극악의 난이도나 다름이 없는 시련이었지만, 은현의 입장에서는 이 시련 자체가 기회나 마찬가지다.
다시 한번 스승의 무위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보고, 그녀의 뒤를 따라잡을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
시간의 제한 또한 없다.
죽음을 맞이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마련된 안배였다.
이것은 은현에게 있어 정말로 놓치고 싶지 않은 좋은 기회였다.
[…근데 표정이 왜 그러냐?]
입꼬리는 올라가 미소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은현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미소와 연동되는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브류나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은현은 웃고 있었지만 기뻐한다기보다 짜증과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저런 도발을 들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시련을 통과하기 전까지, 기회는 얼마든지 주도록 하지.
포기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너의 여신을 불러 그곳에서 꺼내 달라고 하면 된다.
즉, 유피테르는 은현이 이 시련을 쉽게 클리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스스로는 꺼내줄 생각이 없으며 필요하다면 베르단디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된다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굴욕적인 선택지까지 제시했다.
이 도발을 받고도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반드시 통과해주겠어.”
[…아, 그래.]
브류나크는 한심하다는 생각을 품으며 체념했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널 쓰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시련은…. 검을 쓰고 싶어.”
[그래. 이해한다.]
은현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새하얀 공간의 바닥에 브류나크의 창날을 박아넣고, 자신의 무기에게 양해를 구했다.
브류나크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긴 했지만, 은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검을 가르친 스승의 잔재가 눈앞에 존재하고, 그 잔재를 뛰어넘는 것이 시련이라면, 사용해야 할 무기는 당연히 창이 아니라 검이어야만 한다.
은현은 자신의 손에 한 자루의 검을 소환했다.
과거의 현실에 존재했던 하계의 물건을 소환시키는 우르드의 권능은 아직 제한당하지 않았다.
은현은 굳이 열쇠를 사용하여 브류나크처럼 역사를 가진 검을 소환하지 않았다.
여러 번의 회차를 거듭해야 하는 이번 시련에서는 막대한 신력을 소환하는 열쇠의 사용은 득보다 실이 더 많다.
“이거면 충분해.”
은현의 목적은 세 번째 시련의 클리어가 아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결과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은현은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다.
제일 먼저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정체되어 있던 기술의 향상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은현은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던 시에테의 그림자를 응시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아까 기습을 당해 선공을 빼앗겼던 것과는 반대로, 이번엔 은현 쪽이 선공을 취했다.
[주현성 극원류]
[이형환위]
은현은 잔상을 남길 정도의 고속 이동을 선보이며 시에테의 그림자에게 돌진했다.
그대로 시에테의 그림자의 목을 베기 위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자신에게 검술의 기초를 가르치고 키워준 스승의 잔재나 다름이 없는 시에테의 그림자를 향해 공격하는 것을, 은현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이 시련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바탕으로 재현된 시에테의 그림자는 본인이 아니었으며, 지금의 잔재는 은현이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산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아앙!
정말로 그녀의 무위가 재현된 존재라면, 이 정도의 공격이 통할 리도 없다.
빠르고 깔끔하면서도 정교한 은현의 검술은 하계의 어떠한 검사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의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지만, 자신에게 이 검술의 기초를 가르친 스승은 그 완성도조차도 초월한다.
시에테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목을 베기 위해 깔끔한 일섬을 그어오는 은현의 검을 튕겨냈다.
그저 막아내는 것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공격을 전환해 힘을 흘려내는 ‘패링’.
시에테의 그림자가 보여준 패링은 타이밍도, 힘의 유도도 너무나 완벽했다.
패링으로 인해 튕겨내어 위로 올려 쳐지는 은현의 검이 허공으로 떠올라 발생시킨 경직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으로 따져봐야 1초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의 빈틈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 급소를 위협해 온다.
“크…으!”
이번에는 복부의 정중앙.
그림자의 칼날은 복부를 관통하고는 은현의 왼쪽 허리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나와 새하얀 바닥을 적시고, 장기가, 허리의 한쪽이 끊어진 은현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흐읍!?”
약 5초의 텀을 두고, 또다시 복부의 상처가 복구되어 리셋된 은현은 재빠르게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시에테의 그림자와 교전을 재개했다.
이전과 똑같은 구도와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공격을 감행했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은현의 대응이다.
카아앙!
시에테의 패링에 전처럼 은현의 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감과 동시에, 은현은 자신의 몸을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켜 경직되어 있던 자신의 신체를 억지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이윽고 허공에 잔류하던 은현의 검이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실린 힘으로 그림자의 허리 부근을 노린다.
시에테의 그림자는 강렬한 회전이 실린 그 일격에 맞서는 것보다, 회피를 선택했다.
몸을 살짝 뒤로 빼내어 아슬아슬한 거리로 은현의 두 번째 연격을 피해내고, 곧바로 은현의 품으로 파고 들어온다.
카아앙!
날카로운 검격을 받아 쳐내는가 싶으면, 있을 수 없는 방향에서 추가타로 날아오기까지.
반격할 새도 없이, 차례차례 밀어 붙여오는 시에테의 맹공을 대처하느라 바쁨에도, 은현의 몸에는 차근차근 상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리치는 종베기를 막아내자마자 다리를 베이고, 허리를 끊기 위해 중앙을 베어오는 횡베기를 대처하면 어느샌가 어깨를 검날로 관통 당한다.
오감으로 인식하기에도 바쁜 맹공들을 모두 대처하기 위해, 머릿속의 사고가 육체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윽고 한쪽 다리를 잘려나감과 동시에, 균형을 잃고 자세가 무너지는 은현의 목에 그림자의 칼날이 박혔다.
“크흑!”
목에서 피를 쏟아내며 은현은 또 한 번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또 5초 뒤.
만신창이의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던 은현의 몸이 상처를 입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오고, 다시 교전이 시작됐다.
17번째.
은현은 한쪽 팔을 잘리고 가슴과 함께 심장이 절단되며 죽음을 맞이했다.
69번째.
은현은 상체와 하체가 절단되어 내부의 장기들을 바닥에 쏟아내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101번째.
은현은 검을 쥔 오른팔이 잘려나가자, 곧바로 반대쪽의 왼손에 검을 소환하여 반격했지만, 팔 한쪽을 잃어 무방비의 상태에 가까웠던 오른쪽을 공략당해 사망했다.
[…X발. 이게 대체 뭐야.]
은현과 시에테의 그림자가 펼치고 있는 교전을 멀찍이서 관전하던 브류나크는 경악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새하얀 바닥은 은현이 수백 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쏟아낸 피들로 새빨갛게 칠해졌다.
이것은 개인이 개인에게 벌이고 있는 일방적인 ‘학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놈의 스승이라고는 들어서 범상치 않을 거라고는 예상하였지만….]
브류나크는 무기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은현에게 창술을 직접 가르쳤을 정도로 뛰어난 무(?)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시에테의 그림자가 선보이고 있는 저 검술에 담겨 있는 무(?) 또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재능과 막대한 노력의 시간들이 어우러져 탄생한 무(?)의 정수는 감히 누가 따라 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저 놈은 항상 자기가 재능이 없다고 지껄였는데…. 이런 기만자 X끼.]
막상 견본을 보게 된 브류나크는 은현이 늘상 입에 달고 다녔던 ‘자신은 재능이 없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쫓아와 저 검술의 일부를 재현해낸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하계의 대륙에서 훌륭한 검사의 반열에 올라와 있었다.
남들에게는 불가능한 편법을 사용하였다고는 하지만,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오랜 시간을 공들여 은현이 노력과 집념으로 이루어낸 하나의 성과다.
[…제정신이 아니네.]
브류나크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그림자와 교전을 펼치고 있는 은현과 시에테를 그저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 훌륭한 무위를 재현하고 있는 스승의 잔재나, 수백 번이나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저 경지를 따라잡기 위해 계속 검을 휘두르는 제자나, 양 쪽 다 제정신이 아니다.
은현의 두 눈에 깃든 강한 집념은 도저히 평범한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집념을 넘어서 강한 집착이라고 표현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은현이 팔과 다리가 잘리고, 심장을 비롯한 내장과 목이 베이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강하게 열망하는 것은 단 한 번의 승리다.
수백 번의 패배를 쌓고 쌓으며 그 끝에 존재하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벌어지는 사투.
‘저 공격에서는 이렇게 대응하면 안 돼.’
한 번씩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은현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어째서 죽었는지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시간 가속으로 신체를 가속시킬 수 없고, 사고 가속으로 머릿속 사고의 흐름을 빠르게 회전시켜줄 수 있는 여신의 권능은 제한당했지만, 은현은 지금까지 자신이 이것에 너무 의존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사받은 여신의 권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이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도 좋은 기회다.
‘이 공격은 좀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서 막는다.’
시에테의 그림자가 선보이는 모든 기술과 움직임을 패턴으로 정형화시키고, 거기에 대응하는 공략 방법을 만든다.
100가지의 패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에 대응하는 100가지의 공략으로.
1000개가 넘는다면, 1000개의 공략을 준비해서라도.
그리고 그것은 시에테의 기술이 발현되는 동작의 이해로 연결되며, 시에테의 기술을 따라잡고 재현할 수 있는 발판이 될 터.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스승인 시에테를 뛰어넘기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이다.
‘할 수 있어.’
이 시련 속에 제한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은 은현에게 있어 무한한 죽음을 반복한다는 끔찍한 페널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은현은 이 상황을 정말로 형편 좋은 훌륭한 수련 장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수백 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한 걸음씩 성장해 나가는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낀다.
은현은 다시금 자신에게 스승의 기술을 재현해줄 스승의 잔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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