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50화 (433/730)

〈 450화 〉 450. 스승의 그림자(1)

* * *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재현된 지구의 배경이 일그러지고, 다시 재구성된 배경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공간이다.

[…뭐야. 여긴?]

신계라는 곳을 처음 경험해보는 브류나크는 이 공허한 공간에 경계의 기색을 띄우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시련이 바로 시작되었다는데.”

은현은 자신의 영혼에 들려온 유피테르의 목소리를 설명해주며, 브류나크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나만 불안하냐?]

시련이랍시고 맞닥뜨린 것이 다름 아닌 아스타로스와의 교전의 재현이다.

다음의 시련이라면 그것과 동급이거나, 더욱 높은 난이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럼 쉽겠냐.”

브류나크의 물음에 은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신격을 갖추기 위해서 마련된 시련이라는 것이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았다.

첫 번째 시련인 제국 황궁에서 벌어진 마수 무리와의 사투는 물론, 두 번째 시련인 아스타로스와의 교전도 다시 경험해보라 한다면, 두 번 다시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정신 나간 짓거리였다는 것은 부정할 틈이 없다.

“오히려 두 번째 시련이었던 방금은 배려해주기까지 했지.”

유피테르는 첫 번째 시련에서는 금지당했던 자신의 권능과 신력의 일부를 사용해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브류나크를 소환하여 함께 불가능했던 과거의 결말을 넘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던 것은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유피테르의 호의 어린 배려였다.

“…….”

[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표정이 썩었냐?]

“그냥. 나랑 비슷하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정말 짜증 나는 영감인데, 이 호의를 거절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짜증 나서.”

[…뭔 소리냐?]

유피테르의 성격을 알지 못하는 브류나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보아하니 신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딴 식으로 무례하게 말해도 되는 거냐?]

“…들을 테면, 들으라지.”

분명히 위에서 재밌다는 미소를 지으며 은현의 반응을 즐기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한없이 무례한 태도와 언행이었지만, 이것은 은현의 작은 반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장했다고 간도 커졌냐? 뭐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 시련에 대해서 짐작 가는 거 있어?]

“…아니.”

은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리는 브류나크의 물음에 얼굴을 굳히곤 고개를 저었다.

세 번째 시련 또한 은현에게는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지만, 그 시련의 내용은 은현에게도 미지수다.

이윽고 앞서 진행되었던 첫 번째, 두 번째의 시련을 떠올리며 세 번째 시련이 어떤 것일지를 추측했다.

“아마도 과거의 나와 연관이 있었던 상황이 또 한 번 연출될….”

작은 정보라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차, 아무런 전조도,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한 검은색의 인영에 은현이 할 말을 잃었다.

눈이나 코, 입 등의 이목구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온통 검은색의 그림자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체.

맵시가 드러나는 곡선의 허리와 기다란 포니테일의 머리카락.

그림자가 검을 만들어내어 은현을 향해 겨누고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리운 누군가의 모습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기시감이 은현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설…마….”

은현은 작게 몸을 떨었다.

기다란 포니테일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검을 쥐고 있는 저 자세는 자신이 수년간 보아왔던 그녀의 자세다.

수도 없이 그리워했고, 지금도 저 자세를 견본으로 떠올리며 자기 단련을 멈추지 않아 왔다.

잊어버릴 수가 없는, 절대로 잘못 볼 수가 없는 그 자세를 취하는 그림자의 모습을 보고, 은현은 브류나크를 꽉 움켜쥐며 팔을 떨었다.

“설마 세 번째 시련이라는 게….”

은현이 머릿속으로 짐작한 추측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곧바로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은현의 영혼을 타고 들어왔다.

[스승을 뛰어넘어라.]

“…젠장.”

설마 싶었던 추측이 확실하게 직시시켜주자, 은현이 얼굴을 구겼다.

스승의 생전에, 단 한 번도 넘지 못했었던 스승의 존재를 뛰어넘으라는 이 시련의 난이도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시련도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두 시련보다 현저히 높아진 난이도를 생각하면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왜 그래?]

자신의 창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감지한 브류나크가 은현의 상태를 살폈다.

은현은 브류나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한 은현에게는 여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지랄 맞은 시련의 내용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어.”

[야! 온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없이, 세 번째 시련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크윽!?”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던 은현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은 브류나크의 거친 일갈이다.

뚫어지라 보고 있던 자신의 스승, 시에테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감춘 것은 순식간이었다.

은현이 반쯤 무의식으로 브류나크를 전방에 휘둘렀다.

그것은 머릿속에 울리는 격렬한 생존본능 때문.

위험하다.

당장 움직여라.

방어해야 한다.

눈으로, 귀로, 피부를 타고 전해져 오는 수많은 경고 신호들이 은현의 몸을 강제로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빠르게 대응을 하였음에도, 은현이 휘두른 브류나크는 허공을 베었다.

[시에테 검성술]

[매화참선(?花??)]

이윽고 은현은 허공을 가르는 브류나크를 쥐고 있던 자신의 팔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바닥에 툭 떨어지는 자신의 팔을 발견하고, 순식간에 자신의 팔이 잘려나갔다는 것에 얼굴을 구겼다.

상대방의 공격을 회피함과 동시에, 만들어진 빈틈을 비집고 파고들어 신체를 절단시키는 카운터 기술.

시에테에게서 배웠으며, 은현 또한 자주 애용하는 기술이다.

“젠…장!”

하지만 은현의 눈에도 시에테의 그림자가 사용한 기술은 보이지 않았다.

속도도, 공격력도, 기술의 완성도도 자신이 사용하는 기술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에 복잡한 생각을 품으며 얼굴을 구긴 은현이 급하게 몸을 뒤로 빼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시에테의 그림자는 집요하게 은현을 따라붙었다.

‘빠르다.’

남다른 동체 시력과 반사신경을 기반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능숙한 대처를 보이는 은현조차도 제대로 따라잡기 힘든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은 확실히 자신의 스승인 시에테가 맞았다.

외형은 전혀 다르며, 그저 과거의 존재를 재현되었을지라도, 보여주는 기술과 움직임은 은현의 몸과 머리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집요하게 따라붙은 시에테의 그림자는 한쪽 팔을 잃어 무방비의 상태에 가까운 은현의 왼쪽 가슴에 그림자로 만들어진 칼날을 박아넣었다.

“커…헉!”

[야…! 은현!]

시에테의 공격으로 인해 절단된 팔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브류나크가 시에테의 그림자의 공격으로 왼쪽 가슴의 심장에 칼이 박혀 피를 토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경악하며 은현의 이름을 불렀다.

“크…윽!”

전신을 경련시키며 입가에서 피를 흘리던 은현이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은 시에테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명확한 이목구비도 존재하지 않아,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시에테의 그림자는 은현의 심장에 박힌 그림자 검을 뽑아냈다.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며 은현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야! 정신 차려! 시간 역행을 쓰라고!]

“…쿨럭!”

상체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져 바닥에 쓰러진 은현은 다급하게 말을 걸어오는 브류나크의 외침에 대꾸하지 못했다.

연신 피를 토하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오랜만에 맛보는 죽음의 주마등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쓸 수 있으면 진즉에 썼지.’

시에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세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음을 깨닫자마자,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려 했던 은현은 다시 자신의 권능을 제한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시련에서 소환시킨 브류나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권능인 열쇠는 제한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여신 중 베르단디가 하사한 시간의 권능만을 제한당했다는 뜻.

‘시간 역행’과 ‘시간 가속’, ‘사고 가속’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지금의 은현은 교전에서 많은 어드벤티지를 누릴 수 있었던 부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시련이 시작되자마자 동시에 시작된 시에테의 기습으로 자신의 권능 사용 여부를 미리 체크하지 못한 은현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패배했다.

“젠…장! 쿨럭!”

자신의 능력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며 큰 이점으로 작용하는 권능이 바로 베르단디의 권능이다.

이전 엘프의 숲에서 데스나이트가 되어버렸던 시에테와의 교전에서 간신히 우위를 점하여,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시간 가속’과 ‘사고 가속’, 그리고 신의 무구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 크다.

그것을 제한당하고 시에테를 뛰어넘으라니, 정말로 극악의 난이도 그 자체다.

‘유피테르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난이도를….’

하지만 그것도 이미 부질없는 짓.

은현은 점점 자신의 호흡이 멎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한탄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자신의 마지막 시련은 끝나는 것일까.

자신은 결국, 여기서 정체되고 마는 것일까.

점점 고통도 희미해지던 은현은 결국 바닥에서 눈을 감았다.

[야…! 야! 정신 차리라고! 이 X끼야!]

자신을 애타게 부르며 창대를 부르르 떨어, 달그락거리는 파트너의 목소리를 듣던 은현이 약 5초 뒤, 멈춰있던 호흡을 다시 시작했다.

“흐읍!?”

희미해져 있던 의식 속에서 은현을 다시 일깨운 것은 다름 아닌 은현의 심장이었다.

시에테의 그림자가 찔러넣은 칼날로 인해, 약 5초 동안 정지해있던 은현의 심장이 다시 맥박을 뛰기 시작했다.

정지해있던 것에 대한 반동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욱 거칠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의 박동에 놀라, 은현이 숨을 들이켜며 몸을 일으켰다.

은현은 곧바로 주위를 돌아보며, 이 새하얀 공간 속에 자신과 브류나크, 그리고 시에테의 그림자가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련이 끝나지 않았어?”

이윽고 칼에 찔렸을 터인 자신의 심장이 위치한 왼쪽 가슴 부근을 더듬으며 상태를 살핀 은현은 얼굴을 굳혔다.

“…멀쩡하다고?”

처음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멀쩡하다.

마치 은현 자신이 ‘시간 역행’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공격받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리셋을 시킨 것과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설마 이 시련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깨달은 은현은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은현의 그 표정에 답하듯, 이 시련을 은현에게 내린 존재의 목소리가 은현의 영혼에 울려퍼졌다.

[시련을 통과하기 전까지, 기회는 얼마든지 주도록 하지.]

“…….”

뒤늦게 알려주는 추가적인 설명에 은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차라리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이렇게 큰 상실감을 겪거나 한탄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짓이 굉장히 얄미웠다.

[포기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너의 여신을 불러 그곳에서 꺼내 달라고 하면 된다.]

적어도 유피테르는 은현을 이 시련 속에서 꺼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꼬우면 너네 엄마 부르던가.’라는 경박한 뉘앙스를 풍기며 은현을 도발하기까지.

은현은 유피테르가 이 시련을 위에서 지켜보며 즐기고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품었다.

“…좋습니다. 그 도발 넘어 가드리죠.”

은현은 다시 리셋된 자신의 몸을 일으키고 시에테의 그림자와 대치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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