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7화 〉 447. 부여 받은 시련(3)
* * *
“…설마 싶었지만.”
어째서 싫은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을까.
스스로 생각해봐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품으며, 은현은 자신이 전이한 두 번째 시련 장소가 어디인지를 깨닫고 인상을 찌푸렸다.
“꺄아악!”
“끄아아!”
대지가 쪼개지고, 불태워지며 점점 멸망에 가까워지고, 허무하게 목숨이 사라지는 사람들의 비명들로 가득한 이곳은 은현의 고향이자, 이제는 멸망해버린 ‘지구’다.
이윽고 지구로 넘어와 이 세상을 종말로 이끌던 절대자 중 하나의 목소리가 은현의 귀를 때렸다.
[하하하하하!]
콰아앙!
붉은 용을 타고 하늘 위를 누비며 흩뿌려지는 폭염이 대지를 적시고 땅 위의 존재들을 가리지 않고 불살라버리는 광경은 재앙이라는 말을 초월한 종말 그 자체다.
“살려줘어어어어!”
“X발! 저딴 걸 어떻게 이기라고오!”
지구 위에서 몬스터, 또는 마수와 악마의 침략과 동시에 마나를 각성한 지구의 인간들은 차원의 너머 저편에서 들어오는 인외의 재앙들에 맞서 싸우는 헌터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몇 톤이 넘는 쇳덩이를 간단하게 들어 올리는 근력을 가지고, 불이나 바람 등의 원소를 이용한 마법을 사용하는 등, 마나라는 특별한 힘을 각성한 존재들.
하지만 그런 헌터들의 눈앞에 나타난 적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인간들의 목숨을 짓밟고 불태워버리는 불합리한 광경을 연출했다.
“난…. 난 도망치겠어!”
자신들의 무기를 버리고 대적하기를 포기하여 도망을 선택하는 헌터들이 있는가 하면.
“맞서 싸워! 이곳이 무너지면 뒷선에 있는 내 가족들이 위험하다고!”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선을 유지하려는 헌터들도 있었으며.
“무리야…. 무리라고! 우리는…다 죽고 말 거야!”
주어진 현실에 주저앉아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에 절망하여 무릎을 꿇는 이도 존재했으며.
“하, 하하…. 하하하하하!”
아예 이성을 놓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눈앞의 종말에 절망하는 사람들의 표현 방식은 100명이 있다면, 100개가 존재할 만큼 다양했지만, 그들이 직면한 미래는 모두 공평했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를 누비고 있는 레드 드래곤이 자신의 고개를 뒤로 크게 젖히며 크게 부풀어 오른다.
이윽고 입을 크게 벌리며 전방을 향해 내뿜어지는 거대한 폭염의 브레스가 지면을 덮쳤다.
단 한 번의 브레스로 비명 한 번을 지르지 못하고 전신이 불태워지는 헌터들이 사망한 숫자는 가히 몇백을 넘어 천이라는 숫자에 달할 수준.
“…젠장.”
그 압도적인 종말의 현장을 400년 만에 다시 체험한 은현은 전신을 떨었다.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공기마저도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
사람들의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의 비명.
더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이 땅의 모습.
촉각이, 청각이, 시각이 과거에 경험했던 그 종말을 다시 상기시킨다.
이것은 그저 자신의 과거를 재현한 ‘시련’의 일부로서 가상의 공간에 불과했지만, 이미 이곳을 한 번 경험해보았던 전적이 존재했던 은현의 피부와 양쪽 귀, 두 눈은 이곳을 현실이라고 인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 시련은 너무나도 리얼하다.
쿵!
은현은 다리를 한번 세게 차고는 몸의 떨림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바깥에서 자신의 시련을 지그시 관람하고 있을 존재를 생각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의도인지 알겠습니다.”
이것은 유피테르에게 하는 말이다.
“이 감정을 이겨내라는 말씀이겠지요.”
이때 당시, 은현이 느꼈던 감정은 다양했다.
많은 사람이 악마는 물론 몬스터의 공격에 무참히 소멸당하면서, 그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 무력한 자신을 탓하며 생겨났던 죄책감.
지구의, 하계의 멸망을 막지 못하고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지구의 종말이라는 경험은 20살 당시의 나약했던 은현이 경험한 ‘실패만 하며 만들어낸 성공’중 하나였다.
계속해서 살아남고, 성장하고, 또 혼자서 살아남고, 또 성장하여 결국엔 악마들을 공허의 저편에 존재하는 마계로 몰아냈다.
결과적으로 하계의 멸망을 막아내는 것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악마와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되었던 지구는 멸망했다.
신의 사도로서 여신의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죽어간 인간들의 숫자를 생각한다면 은현은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유피테르가 부여한 시련의 내용은 간단하다.
20살의 한없이 나약했던 과거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책과 무력감을 이겨내라는 것.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은현은 유피테르가 준비해준 시련에 인상을 굳혔다.
그때의 그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재현된 시련이라는 것이, 하필이면 자신이 경험했던 악마와의 교전 중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아스타로스’와의 교전이라니.
아무리 시련이라지만 유피테르의 악취미가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후우.”
하지만 투덜거려봐야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내 은현은 결의를 다진 얼굴로 하늘을 누비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그 위에 타고 있는 거대한 악마를 응시했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번 시련에서는 작은 어드벤티지를 하나 주셨으면 합니다.”
강하게 요구해오는 은현의 말에 이 난리 속에서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은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 혼자서는 이 시련을 클리어할 수 없습니다.”
은현은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능력적으로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기도 했다.
“…이 시련을 함께 클리어하고 싶은 동료가 있습니다. 허락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로 그때의 무력감과 자책을 떨쳐버리는 것이 이 시련의 클리어 조건이라면.
그때 당시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이 시련을 클리어하고 싶은 은현의 작은 욕심이었다.
이윽고 은현의 의지에 반응하듯이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은현의 영혼 속으로 울리며 흘러들어왔다.
[허가한다.]
짧은 그 한마디에 은현은 씩 미소지었다.
곧바로 망설임 없이 자신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역사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
[소환, 브류나크]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은색의 신성한 기운이 하나로 응집되어 점점 창의 형태를 갖춰나갔다.
오른손을 뻗어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브류나크의 창대를 움켜쥐자, 창대가 살짝 떨리며 얼빵한 소리를 흘렸다.
[…엉?]
아직 주위가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아, 상황 파악이 안 된 브류나크는 자신의 몸을 쥐고 있는 은현에게 물었다.
[야. 이게 뭔 상황이냐?]
“주위를 잘 봐봐.”
은현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뒤늦게 주위를 인식하기 시작한 브류나크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쿠아아아아!
그리고 하늘 위에서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브레스를 흩뿌리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그 위에 올라타 있는 악마의 모습을 확인하고 창대를 살짝 떨었다.
[여기는 설마….]
브류나크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장소다.
무려 자신이 소멸을 맞이했던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우리 지금 시간여행이라고 하고 있냐?]
“그건 아니지만, 조금 비슷해. 과거가 재현됐거든.”
[뭔 소리야? 니 또 뭔 짓을 했길래 이딴 일이 벌어져?]
일전에 고대 마수를 사냥했을 당시, 은현에게 호되게 당한 탓인지 브류타크의 말투에서는 은현에 대한 깊은 불신이 느껴졌다.
“자세히 설명할 여유는 없어. 그래도 이번엔 날 믿고 한 번만 따라와 주면 안 되겠냐?”
[…….]
진지한 은현의 표정을 읽은 브류나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소멸한 이후 부활하자마자 보게 된 은현이 한껏 성숙해져 있는 모습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너 이제는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게 됐네.]
하긴 얼핏 자신이 소멸한 이후로 4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정을 듣기는 했으니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으리라.
[그래. 알았다. 뭔짓을 했는지는 나중에 설명하면 되지. 일단…. 저거 어떻게 할 건데?]
브류나크의 질문은 지금 하늘 위에서 날뛰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악마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은현의 대답은 대단히 간결했다.
“잡아야지.”
400년 전에 자신과 브류나크가 저 악마를 처리했던 것처럼.
[…이 X발놈이?]
그 대답을 들은 브류나크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야. 저 새끼 특성 까먹은 거 아니지?]
“알아. ‘소멸의 겁화’잖아.”
사람의 세배만 한 크기의 거구를 가지고 있는 아스타로트의 전신은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압도적인 외관을 지녔다.
손과 발은 물론, 얼굴과 머리까지도 마찬가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는 가까이 닿은 것만으로도 어떠한 사물이든 태워 버리는 강력한 특성을 가졌다.
아스타로트의 불꽃에 닿고도 버틸 수 있는 것은 최고의 화염 내성을 가지고 레드 드래곤 뿐이며, 아스타로트가 레드 드래곤을 애완용으로 부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래 신수와 비슷한 영험한 존재로 인간들의 편에 서서 악마들에게 대적했던 드래곤 중 악마에게 굴복한 끝에 타락한 말로를 보여주는 용족의 수치스러운 면이기도 했다.
[너 설마 저거랑 다시 싸우려고 날 부활시켰다거나, 그딴 개 같은 의도는 아니지?]
“그런 건 아닌데.”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브류나크는 이 싸움에서 아스타로트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몸이 소멸할 것을 각오하면서 은현의 무기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훌륭한 파트너였다.
자신은 또 한 번 파트너를 소멸시키기 위해, 자신의 파트너를 부활시키는 그런 악독한 인간이 아니다.
“이번엔 나 혼자가 아니라, 너랑 나, 둘 다 살아남는 결말을 맞이해 보고 싶었거든.”
그렇기에 이건 그저 은현의 욕심에 불과했다.
[…….]
은현의 생각을 들은 브류나크는 짧게 침묵했다.
400년 전, 이 싸움에서 자신은 소멸하고 살아남은 은현이 어떠한 생각을 품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파트너를 소멸시켜야만 살아남고 악마를 처리할 수 있었던 자신의 한계에 대한 무력감.
어쩌면 그 무력감이 지금의 이 상황을 다시 재현시켰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무기였던 신창, 브류나크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좋아. 해보자고.]
“고마워.”
[그래. 근데 이거 꼭 우리 둘이서 만 해야 하는 거냐? 그 젖통 큰 니 애인이 와주면 저 악마 상대하는 것도 쉬울 것 같은데.]
일리아나의 앞에서는 창대도 못 추리며 딱딱하게 굳어서는 벌벌 기었으면서, 그녀가 없을 때는 잘도 그 험담을 늘어놓는다고 은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인 자신의 앞에서.
“공교롭게도 우리 둘이서 해야 하는 시련이라서…. 아, 그리고.”
은현은 손날로 창대의 끝을 툭 건드리며 한 차례 경고했다.
“내 와이프 욕하지 마라. 다 일러바치기 전에.”
[아, 너 이 새끼야! 파트너보다 와이프가 더 중요하냐고! 그 젖통 큰 여자보다 내가 너보다 먼저 알고 지냈어!]
화들짝 놀라며 벌벌 떨고 있는 브류나크의 감정이 창대를 쥐고 있는 은현의 손으로 전해져 왔다.
“당연히 너나 와이프나 둘 다 중요하지. 근데 난 내 와이프가 더 무서워.”
[이 배신자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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