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6화 〉 446. 부여 받은 시련(2)
* * *
시작은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수만 마리의 마수들은 육체가 오염된 마나에 노출되어버리면서 변이가 되어버린 불쌍한 인간들의 말로.
20년 전 미르바빌라 제국의 황제에 의해서 완전히 타락해버린 제국의 백성들이다.
한번 오염으로 인해 인간의 몸에 변이가 진행되어버린다면, 오염된 마나는 인간의 몸을 좀먹는 것도 모자라 머릿속의 뇌를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오염이 진행된 인간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
오히려 그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마수의 숨통을 끊어주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구원이나 다름이 없다.
그 끔찍한 몰골의 마수들이 침을 흘리고는 은현을 향해 괴성을 내질렀다.
키애애애액!
갈라진 성대로부터 나오는 괴성은 이미 인간의 음성이 아니다.
일제히 은현을 향해 마수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염병.”
은현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어야만 했다.
넘지 못했던 그 문턱을, 이번에는 넘어보도록 해라. 그것이 너에게 주는 첫 번째 시련이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웠지만, 자신의 영혼에 울려오는 유피테르의 목소리는 굉장히 간결했다.
자신의 과거가 재현된 이 상황에서, 은현은 자신의 역할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해보자는 거죠. 지금?”
자신은 이때 죽었다.
한 번 죽음을 맞이했던 이때의 경험은 자신이 뛰어넘지 못한 장벽이기도 했다.
유피테르의 의도는 이것을 뛰어넘어 그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이 부여한 시련을 통과하고, 인간이지만 제대로 된 ‘반신(半?)’의 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넘어보라는 도발적인 의도가 섞여 있음을 간파했다.
키애애액!
상황을 파악하고 시련의 통과 조건도 파악하게 된 은현은 망설임 없이 행동을 옮겼다.
[역사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
[소환, 바탈타크와 모랄타크]
그렇게 자신의 열쇠를 사용하여 과거에 존재했던 전설의 무기를 소환하려 했지만.
양손에 쥐어진 검의 형상을 하고 있던 은색의 신성한 기운, 신력이 응집되던 도중 공기중에 녹아버리듯이 사라졌다.
“…뭐?”
키에에엑!
“큭!?”
갑작스러운 변수에 은현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했던 것도 잠시.
은현은 귓가를 때리는 마수들의 거친 괴성에 급하게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들이미는 마수의 턱을 주먹으로 올려치고, 은현은 뒤로 점프하여 마수들과 거리를 벌렸다.
큰 점프를 하여 벌린 거리를 마수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득달같이 쫓아오기 시작한다.
[은현 고유능력]
[사고 가속]
은현이 벌 수 있었던 시간은 겨우 몇 초에 불과했지만, 가슴 속에 생겨난 당황과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정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
생각을 마친 은현은 곧바로 양손을 쥐었다 폈다가를 반복했다.
이윽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능을 이용하여 검을 소환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지금껏 자신이 애용해왔던 장검이 소환되자, 은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하지만 자신의 열쇠가 아닌, 우르드의 권능을 이용해서 소환된 일반적인 장검을 응시하며 확신했다.
자신의 권능은 제한당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이것은 그때 넘지 못했던 벽을 넘어서야 하는 자신의 시련이다.
한 가지 덧붙여진 조건이 있다면, 그때와 같은 조건으로 뛰어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이후 최근에 만들어진 자신의 열쇠는 적어도 이 첫 번째 시련이 진행되는 동안은 사용할 수 없다.
은현은 자신이 이 시련을 너무 쉽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완전한 신격을 갖추기 위한 시련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시련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을 다시금 재수정했다.
‘권능의 사용 없이, 이 수만 마리의 마수 무리를 상대하여 살아남는 것.’
그것이 이 첫 번째 시련의 클리어 조건이다.
‘할 수 있을까?’
은현은 사고 가속으로 인해 몇십 배가 빨라진 의식의 흐름 속에서 순간 망설이며 고민에 빠졌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해야 해.’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는 것보다, 해야 하는 일이다.
시도하고, 성공해서, 결과를 보여야만 하는 그런 일.
키애애액!
서걱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달려온 마수의 머리에 검을 꽂아 넣고, 팔에 힘을 실어 그 마수의 머리와 몸통을 두 동강 냈다.
동시에 은현의 전신을 물어뜯기 위해 사방에서 달려든 마수들이 입을 벌리며 은현의 몸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키리릭!
마수들은 허공을 깨물며 자신의 이빨을 부딪쳤다.
[주현성 극원류]
[이형환위]
자신들이 물어뜯었던 것이 그저 허공에 남아 있는 잔상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시에테 검성술]
[천화(?花)의 바람]
하늘 위에 있던 은현이 아래로 강하하여, 자신의 검을 바닥에 내리찍는다.
콰아앙!
거칠게 뒤흔들리는 황궁의 바닥이 쪼개지고, 바닥에 꽂힌 검과 은현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돌풍이 마수들을 휩쓸어 거칠게 찢어발겼다.
은현의 공격을 인식하기는커녕 그의 잔상만을 쫓아 움직임마저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마수들은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허공을 날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시체가 조각조각 찢어발겨 진 마수들에게 은현은 눈길을 줄 여유도 없었다.
지금의 공격으로 수십의 마수를 순식간에 찢어버렸지만,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마수의 수는 수만에 가깝다.
“이걸로 0.01%는 채웠나.”
스스로 계산을 해보고도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때의 경험이 다시 재현되었음에도, 공포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당시 이곳에서 팔다리가 물어뜯기고 마수들에게 살점을 파먹히며 서서 목숨이 깎여나가는 와중에도, 은현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은현이 느꼈던 것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는 달성감과 긴 여행의 끝에 도달했다는 만족감으로 어우러진 어떠한 후련함이었다.
그것을 죽음으로써 느꼈다는 것이 매우 애석하긴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이 시련 속에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지금 은현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만으로 가득하다.
더 효율적으로, 더 빠르게 마수들을 처리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은현은 이윽고 행동을 개시했다.
[은현 고유능력]
[시간 가속]
자신의 육체의 시간을 가속시킨 은현은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더러운 침을 흘리고 있는 참혹한 몰골의 마수들의 무리 속으로 몸을 던졌다.
서걱
마수들의 목을, 몸통을, 팔과 다리를 차례차례 베어 쌓이는 시체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 수가 불어나, 순식간에 백이 되고, 천이 되며, 만이라는 숫자를 달성해가는 와중에도, 은현은 계속 움직였다.
시작부터 자신의 전력을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싸웠던 20년 전의 그때와는 전혀 다른 전략이다.
애초에 설정되었던 목표부터가 20년 전과는 다르다.
20년 전의 당시에는, 자신의 역할은 방패였다.
자신의 팀원이었던 여섯 명의 영웅들이 제국의 황제와 교전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단 한 마리의 마수도 보내지 않기 위해 수만의 마수들을 이 자리에서 붙잡아두는 역할.
하지만 지금의 은현은 다르다.
그때와 같은 상황이며 주어진 조건도 비슷했지만, 명확한 차이가 존재했다.
이미 삶을 포기했던 그때와 강하게 삶을 열망하여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의 차이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을까.
게다가 은현이 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들어낸 성과는 역사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라는 자신의 권능을 창조한 것만이 아니었다.
[시에테 검성술]
[매화참선(?花??)]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그 틈을 비집고 극한의 속도으로 카운터를 날려 대상의 목을 절단시키는 시에테의 기술.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빠른 검속으로 상대방을 베어내는 단일 대상에게 사용되는 단발 기술이지만, 시간 가속으로 몸의 움직임이 극한으로 끌어 올려진 은현은 기술의 연속 사용으로 수십 마리의 마수를 단 몇 초 만에 절단시켜버리는 기술의 극한을 선보였다.
그러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두 번 더 쓸 수 있었는데.’
근육의 피로로 인한 한계와 동작의 연계가 엇갈려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에 아쉬운 마음을 가졌다.
엘프의 숲에서 메디아의 농간으로인해 데스나이트로 전락한 자신의 스승에게서 받았던 검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자신의 검술로 만들어가던 은현은 그 이후로도 단 한 번도 단련을 빼먹지 않았다.
은현은 계속해서 성장해오고 있었다.
그것은 신의 권능에 포함된 것이 아닌, 은현이 하루를 바치고, 한 달을 바쳐, 한 해를 거듭하여 점점 쌓아 올린 기술의 극한.
키애액!
잔상조차도 쫓아오지 못하는 은현의 검에 사지를 절단당하는 마수들은 그저 비명을 지르며 속수무책으로 절명을 당해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성장을 해왔음에도, 은현은 점점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크…윽!”
무리한 시간 가속의 패널티는 여전히 은현의 몸을 갉아 먹는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운동량으로 전신의 근육은 비명을 지르고 관절은 삐걱거리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던 정밀한 움직임 속에 균열을 심기 시작했다.
아무리 성장을 했고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육체로는 그 한계가 존재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한계를 더 높일 수는 있어도, 한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은현은 이를 꽉 깨물고 마수의 무리를 응시했다.
지금 이 한계를 버티지 못했기 때문에, 은현은 죽음을 맞이했다.
신격을 갖추고 싶다면,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이 순간을 넘어서야만 한다.
자신을 위협했던 마수들의 숫자는 현재 반절도 남지 않았다.
20년 전보다도 매우 빠른 속도로, 더 많은 마수를 학살한 것은 은현이 성장했다는 틀림없는 증거다.
[은현 고유능력]
[시간 역행]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던 전신의 근육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격한 움직임으로 삐걱거리던 관절이 다시 손상되기 전으로 복구가 되어간다.
“빨리 끝내자. 니들 처리하고도 할 게 많거든.”
유피테르는 이것이 첫 번째 시련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은 하나가 아닌 복수라는 뜻.
은현은 앞으로도 자신이 겪어야 할 일들을 상상하며 마수들을 도륙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키애액!
비명이 가득한 황궁에는 마수들의 피와 시체로 가득 채워지며, 그 중심에 홀로 서 있던 은현은 마지막 마수의 몸을 발로 짓밟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바닥에 고정했다.
망설임 없이 마수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후…으….”
마지막 마수의 숨통을 끊어놓고, 은현은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려 했지만, 은현은 악착같이 버티며 다리를 움직였다.
저 마수 무리의 시체 안에서 주저앉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하아…. 여기 그냥 재현된 공간 아니야? 뭐가 이렇게 빡세.”
신의 시련으로서 자신의 과거를 재현시켰다지만, 전신의 근육통으로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이 고통은 현실처럼 진짜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을 입에 담으며 중얼거리자마자, 점차 주위의 세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하였음을 자각했다.
곧바로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조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굳혔다.
“쉬는 시간도 주시지 않고 바로 굴리시는 거 실화입니까?”
적어도 에린을 훈련했을 당시, 자신은 5분이라는 시간이라도 몸을 휴식시킬 수 있는 시간을 주었건만, 유피테르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에린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거나 그거나!’라며 억울한 항변을 늘어놓았을 투덜거림을 늘어놓으며 은현은 일그러지고 다시 재구성되는 세계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시련을 생각해보았을 때, 다음의 시련으로 무엇이 나올지 예측을 하던 은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그거는 아니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