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화 〉 445. 부여 받은 시련(1)
* * *
[음?]
유피테르의 인도에 따라, 은현이 또 한 번 전이된 장소는 이 영역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자신에게 반가움을 표했던 불카누스의 공간이었다.
[자네가 나의 영역을 찾아와 주다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네.]
불카누스는 얼마 안 가 은현과 재회를 하게 된 것에 반가움을 표했다.
“…….”
하지만 은현은 자신의 앞에 불카누스가 모습을 드러내었음에도, 신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네만.]
“…아닙니다.”
은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보게. 그런 표정을 짓고 넘어간다면, 나 또한 찜찜하지 않나.]
흥미를 보이며 대답을 재촉하는 불카누스의 말에 은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유피테르님의 장난이…. 조금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그 무례한 질문을 ‘장난’이라고 순화하는 것도, 정말로 올바른 표현일까 은현이 고민했지만.
불카누스에게 있어서 상위신이나 다름없는 유피테르의 험담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결국 장난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찝찝한 표정으로 그 불쾌함을 최대한 순화하여 전달하는 은현의 말에, 불카누스는 은현과 유피테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흐음. 유피테르님의 나쁜 버릇이 자네의 기분을 언짢게 했나 보군.]
호색한의 이 여신, 저 여신에게 잘 집적거리기를 좋아하는 유피테르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카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사정을 이해했다.
[무슨 무례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아뇨. 사과는 받았습니다. 저는 단지….”
마치 동류를 보는듯한 눈으로 반가운 친근감을 보여주는 유피테르의 그 얼굴과 호의가 너무나도 싫었다.
차라리 자신이 인간으로서 대단한 존재며 훌륭한 업적을 세워 호의를 품는다면 거북하기는 해도 그쪽이 더 편하다.
하지만 ‘너도 나와 같은 바람둥이잖아?’라는 시선으로 건네오는 유피테르의 호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냥 짜증이 난다.
“후우, 아닙니다.”
[흐음?]
하지만 은현은 이 사실을 불카노스에게 털어놓아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이미 자신은 아내가 넷이나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여신에게까지 손을 댔다.
유피테르가 자신을 동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팩트가 너무나도 짜증이 났다.
‘하아, 베르단디님한테 위로나 받고 싶네.’
유피테르 때문에 상한 이 기분을 어떻게든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은현은 그 순간을 나중으로 미뤘다.
정말 싫은 유피테르의 도움으로 불카노스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분위기를 전환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불카누스를 응시했다.
[흐음. 나에게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건가?]
“…그렇습니다.”
[말해보게.]
“불카누스님께서 그러셨죠. 신의 무구라는 것은 신의 영혼에 각인된 권능을 형상화한 것이라고요.”
[그랬지.]
불카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직접 설명했던 말이다.
[그렇군. 자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어.]
불카누스는 은현이 정확한 용건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눈치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자네의 권능을 좀 더 다듬고 싶은 것인가?]
“맞습니다.”
불카누스의 추측은 정확했다.
“저는…이전에 ‘궁니르’를 재현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릴리와 에린, 에밀리아와 함께 릴리의 부모에 대한 행방을 찾으러 나갔던 여행을 했을 때.
은현은 자신의 권능인 ‘역사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를 이용하여 궁니르라는 신의 무구를 재현했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재현했다는 시도에는 성공했지만, 그 완성도는 정말로 볼품이 없는 수준.
궁니르의 형태만을 재현했을 뿐, 궁니르가 가진 능력을 모두 재현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신력의 크기를 더욱 키워가며 컨트롤도 능숙해진 은현은 과거에 자신의 파트너였던 애창, 브류나크를 다시 만들어내어 그 영혼도 똑같이 재현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신의 무구를 재현하는 것과 하계의 무기를 재현하는 것에는 아직도 엄연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은현의 목적은 간단했다.
“저는 자신의 권능으로 신의 무구를 재현하고 싶습니다.”
[…자네는 욕심이 과하군.]
불카누스는 확고한 의지를 다지고 표현해오는 은현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신의 무구를 재현한다는 것은 다른 신들에게조차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신 개인이 지니는 권능이며, 권능을 재현한다는 것은 그 신의 존재 자체를 재현한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현재 도데카테온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유피테르조차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완전한 신도 아니며, 인간 태생의 ‘반신(半?)’이 그것을 재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신들에게도 불가능한 그것을 실현하겠다고 단정하고 있는 은현의 표정은 굉장히 확고했다.
“제가 재현하려는 것은 정확히는 다른 신의 권능 그 자체가 아닙니다.”
[흐음?]
“제가 재현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역사’뿐입니다.”
은현이 열쇠를 이용하여 과거로부터 현재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다고 구전되어 전승된 역사다.
그 과정에서 현실에 구현하는 것은 그 역사가 있는 무기들.
자신이 과거에 소환한 전적이 있던 리딜도, 모랄타크와 바랄타크도, 사실은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던 이야기 속으로만 남은 전설의 무기들이며, 그 실체는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 여부도 모르는 공상의 산물이다.
모티브가 되는 전설과 역사 속의 무기들을 그대로 현실에 구현시키고, 그것의 특징까지도 정확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은현의 권능.
브류나크는 은현이 직접 사용했던 창으로 과거의 이미지가 명확하여 정확하게 재현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저는 신들의 역사가 담겨있는 ‘신화’까지는 재현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간을 초월하여 반신이 되면서 특별한 권능을 가지게 되었다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별개의 힘이다.
[…자네는 그 ‘신화’를 재현하여, 신의 무구에 근접한 공상의 무기를 만들어 내어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싶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
불카누스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지만, 이것을 생각해낸 은현은 자신의 영혼을 직접 권능으로 창조해내는 도박까지 했던 미친 자에 가깝다.
말로만 듣는 은현의 이론은 불가능보다는 가능 쪽이 더 우세했다.
그 어떤 신에게도 불가능한 위업이지만, 운명의 세 여신에게서 권능들을 부여받아, ‘과거’와 ‘현재’의 시간에 간섭할 수 있는 은현이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아니. ‘미래’ 또한, 이 자의 편인 건가.]
불카누스는 은현의 말에 어떠한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조용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은현의 얼굴을 응시했다.
자신이 건네준 망치로 훌륭하게 스스로 권능을 창조해낸 은현을 보고 대단함과 존경을 품었다.
신으로서 반신의 격밖에 갖추지 못한 인간에게 존경을 느낀다니 우스운 일이었지만.
불카누스가 은현에게 느낀 존경은 과감하게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다른 신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특별한 무기를 창조해낸 대장장이로서의 존경심이다.
은현이 달성한 그 위업의 초석에 자신의 망치가 관여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거기에 은현은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위로 올라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한 번 해보세.]
“…도와주실 수 있으신 겁니까?”
[나는 신이기도 하지만,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의 신일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별한 무기를 탄생시키려는 순간이 아닌가. 그 순간을 함께 할 기회를 자네가 주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신이기 이전에, 대장장이로서 불카누스는 이 순간이 매우 기쁜 듯했다.
“감사합니다.”
선뜻 도움을 주겠다는 불카누스의 의사를 확인한 은현도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불카누스는 곧바로 은현에게 설명했다.
[일단 자네의 권능을 한 단계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네.]
“무엇입니까?”
[자네의 격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지. 이전에 궁니르를 재현했음에도 그 완성도가 형편이 없었던 원인은 자네의 영혼이 반신의 격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자네가 말했던 신화를 재현하기엔 자네의 영혼이 아직 그에 걸맞지 않다는 것 때문일세.]
“…격.”
은현은 순간 ‘신격’을 갖춰 완전한 신이 되라는 유피테르의 말을 떠올렸다.
[영혼에 신격을 갖추는 것이 싫은가?]
“하지만 그건…. 인간의 틀을 벗어나 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저에겐…. 아직 하계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하하. 그건 조금 다르네. 신격을 갖추었다고 자네가 완전한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니.]
“예? 하지만 유피테르님은….”
[그거야 자네를 시험해본 것이 아니겠나. 자네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신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 또한 시험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은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애초에 나를 비롯한 다른 신들이 자네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규율을 깨고 하계에 직접 간섭을 할 수 없기 때문일세. 우리를 대신에서 하계에서 많은 일을 해주길 바라는 자네를 인간의 틀을 벗어나 하계에 있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확실히 그렇네요.”
그것은 거의 본말전도가 아닌가.
유피테르가 은현에게 신이 되는 것을 권유해본 이유는 은현이 사도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고 다른 마음을 품어 신이 되기를 바라는 흑심을 품고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의 대답을 들었기에 유피테르는 호탕하게 웃어 보이며 은현에게 더욱 호의를 내비친 것이다.
[유피테르님에게 부탁을 드려보게. 영혼의 질을 높여 신격을 갖추기 위해 시련을 내려달라고.]
“…알겠습니다.”
◆ ◆ ◆
[흐음. 시련을 말인가.]
불카누스의 조언과 배려로 다시 유피테르의 영역으로 돌아온 은현은 곧바로 사정을 설명하고 유피테르에게 시련을 내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네. 하지만 이건 제가 신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니. 네가 그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는 건 아까의 질문으로 확인했다. 꽤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있군.]
권능으로 신이 가지고 있는 신화를 재현하여, 그 신화 속 신의 무구에 근접한 무기를 소환한다는 발상은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곧바로, 너에게 시련을 내려주지.]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마라. 우리는 비슷한 동류가 아닌가.]
“…….”
신과 인간의 명확한 차이가 존재했지만, 유피테르가 한 말의 의미는 달랐다.
종족의 차이를 넘어서, 남자 대 남자로서 자신과 비슷한 부류로 보는 에로 영감의 호의를 한껏 거절하고 싶었지만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로 그것을 부정하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서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은현의 그 태도를 보며 끌끌하고 있던 유피테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순식간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신계의 공간이 뒤바뀌었다.
콰아앙!
맹렬한 폭발음과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급작스럽게 은현의 귀를 때렸다.
“이곳은….”
자신은 지금 신계에 있을 진데, 오감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그것을 부정했다.
귀를 때리는 굉음들.
코와 입을 타고 들어오는 먼지.
피부에 느껴지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공기의 떨림.
두 눈에 보이는 다 무너져가는 궁전.
오감을 타고 전해지는 어떠한 기시감이,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게 했다.
“제국의 황궁?”
잊을 수가 없는 장소다.
자신이 죽음으로서 마지막이 되었던 장소이자, 부활하여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들어준 새로운 시작점의 초석이기도 하다.
“설마 시련이라는 게….”
자신이 했던 추측이 정답이라는 양,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은현의 영혼에 직접 말을 걸어왔다.
[넘지 못했던 그 문턱을, 이번에는 넘어보도록 해라. 그것이 너에게 주는 첫 번째 시련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