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화 〉 442. 신의 초대(2)
* * *
“만나 보겠습니다.”
은현은 베르단디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신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권유를 받아들인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베르단디의 권유이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신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라면, 베르단디는 은현에게 이 권유조차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은현에게 이 신을 꼭 만나보라고 강요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베르단디의 태도에서 은현은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신의 정체에 대해 추측했다.
그저 만나보는 것만으로 은현에게 이득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손해는 아니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다.
[아이의 그 생각이 기쁘구나.]
베르단디는 미소지으며 은현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은현의 생각을 읽고 자신에게 깊은 신뢰를 품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일단…. 잠시만요. 신계로 올라가기 전에 해둬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 알았다.]
베르단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의 발을 받아들였다.
은현은 곧바로 수정 구슬을 꺼내어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자신의 머리 뒤로 느껴지는 풍만한 감촉에 멈칫거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계속 붙어계시려고요?”
[…그러면 안 되는 것이냐?]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수정 구슬을 통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하는데, 베르단디의 품에 꽉 끌어안겨 있는 상태로는 도저히 진지한 얼굴을 하여 분위기를 잡을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아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베르단디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겠지만, 순전히 기분의 문제다.
풍만한 가슴을 가진 어머니 같은 여신의 품에 안겨서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상사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형적인 마마보이가 아닌가.
[최근에 아이와 이렇게 몸을 맞대고 붙어있던 적이 얼마 없었던 것 같구나. 사제 아이와 그렇게 정열적으로 애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이렇게 붙고 있고 싶어졌다.]
빙 돌려 말했지만, 결국엔 엘레노아와 은현이 몸을 섞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도 신경을 쓰라는 베르단디의 유치한 감정이었다.
“…네.”
베르단디의 그 확고한 고집을 들은 은현은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자신을 모성으로 보듬어주는 베르단디지만, 갈구해오는 애정에서만큼은 조금 유치해지기까지 하는 베르단디의 모습이 굉장히 귀여웠다.
[…아이가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머리를 살짝 때리며 불만 어린 표정을 품자, 은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사실을 부정했다.
“그런 베르단디님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흥.]
순수한 은현의 칭찬에 베르단디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것이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 칭찬을 들으면 쑥스러워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당황해하곤 했던 여신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칭찬을 듣자마자 조금은 너그러워진 듯 은현의 목에 둘렀던 팔을 느슨하게 풀었다.
하지만 절대로 떨어질 생각이 없다는 베르단디의 의사 표시를 확인한 은현은 어쩔 수 없이 이대로 통신을 진행해야 했다.
마력을 불어넣어 수정 구슬을 작동시키자, 수정 구슬 너머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남자의 정체는 현재 은현의 밑에서 전문적으로 정보 수집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흑랑단을 이끄는 루난이다.
“일리아나의 집을 정기적으로 청소해주고 있는 청소업체에 대해 알아봐.”
[무슨 정보를 중점적으로 알아보면 되는 거지?]
“지금은 비어있는 이 집에 누군가가 숨어들어와서 생활한 흔적이 있었어.”
[그것참….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녀석이군.]
사정을 들은 루난은 곧바로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다름 아닌 마녀의 집에 숨어들어 한동안 생활을 했다니, 간이 큰 게 아니라 그냥 자살하려고 미친 짓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가장 최근에 청소했던 게 언제인지, 청소했을 때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그리고 청소를 했던 직원 중에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샅샅이 알아 와.”
[알았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은현의 얼굴을 본 루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렌디르 왕국 쪽에 사람을 보낸 건 어떻게 됐지?”
[찾았다. 이미 이쪽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어. 아마 다음 주쯤이면 도착하겠지.]
“그래. 알았어. 무언갈 알아내면 곧바로 연락하도록 해. 경비는 계속 청구하고.”
[그러지.]
딱 용건만을 전달하고 두 사람은 통신을 끊었다.
은현은 이내 고개를 돌려 베르단디를 돌아보았다.
“끝났습니다. 베르단디님.”
[그래. 그럼 일단 아이는 잠을 자도록 해라.]
“네.”
신계로 데려가는 것은 은현의 의식뿐이다.
깊은 잠에 빠지게 될 본체는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은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레노아가 잠들어있는 침실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은현이 곧바로 침대 위로 올라와 이불속으로 몸을 집어넣자, 엘레노아가 은현의 몸에 팔을 둘러오며 꽉 끌어안아 왔다.
은현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침대 위에 함께 누워있는 엘레노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 잤어?”
“당신이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지 않아도 됐는데.”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지만, 엘레노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제가…당신의 품안에서 함께 잠들고 싶었는걸요.”
“그래.”
은현의 가슴속에 얼굴을 묻으며 그를 올려다본 엘레노아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문제는 다 해결하셨나요?”
“…듣고 있었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육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직접 소통을 해오는 베르단디의 말은 은현과 관계를 맺으면서 아내들에게도 들리는 것이 당연했다.
엘레노아는 곧바로 잠들지 않고 은현과 베르단디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집에서 자는 거 불안하지 않아? 네가 싫다면 곧바로 호텔로 방을 옮겨서 자도 돼.”
“아뇨. 괜찮아요.”
엘레노아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불 속에서 은현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말을 잇는다.
“당신을 믿으니까요.”
최종적으로 은현은 이곳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엘레노아는 그 판단을 믿고 있는 것이다.
“신뢰가 아주 무겁네.”
“당신은 그만큼 많은 일을 해주었잖아요.”
엘프들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고대 마수들을 처리해준 것도 모자라, 자신과 제라드를 리오드에게 보내어 왕국의 위험이 될 수 있는 흡혈귀들을 소탕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해주었다.
“저에게는 당신이 영웅이에요.”
대륙에 이름을 널리 알린 여섯 명의 영웅들보다 은현이 더욱 대단하다.
그런 그가 다름 아닌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사랑해요.”
“응. 나도.”
자신의 상체를 꽉 끌어안은 엘레노아의 가녀린 몸을 꼭 안아주며 은현은 작게 속삭였다.
“좋은 꿈 꿔.”
“네. 당신도요.”
엘레노아는 자신의 이마에 맞춰오는 은현의 입술을 느끼며, 은현의 품에서 기분 좋게 잠에 빠졌다.
◆ ◆ ◆
[왔구나.]
새하얀 공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신계로 올라온 은현을 반겨준 것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베르단디였다.
작은 포옹으로 은현의 방문을 반겨준 베르단디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곧 아이는 다른 곳으로 전이 될 거다.]
“베르단디님은 같이 가지 못하시는 건가요?”
[나는…이곳을 벗어날 수 없단다.]
은현은 본래 신들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존재하며 다른 신들은 그 신의 영역에 간섭할 수 없다는 규율이 존재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베르단디가 우르드나 스쿨드와 이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이유는 세 여신이 따로 분리된 고유한 역할을 가지면서 하나로 취급을 받는 자매 여신들이기 때문이다.
은현이 하나가 아니라, 세 여신의 사도로 세 개의 권능을 부여받은 것도 이러한 원리에서 받은 혜택이다.
[명심해라. 아이야. 절대로 무례나 실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
“네.”
은현은 베르단디의 걱정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대응하기 힘들다면 나를 불러라.]
“…베르단디님은 못 오시는 거 아니었나요?”
[가지는 못해도 아이를 부를 수는 있지. 혹시라도 그 자리가 불편해지거나 벗어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나를 불러라.]
베르단디는 명색이 은현의 여신.
그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 정도는 당연히 마련해두었다.
은현과 베르단디는 이미 영혼으로 묶여 있는 여신과 사도의 종속 관계다.
이 신계에서는 베르단디도 여신의 신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특별한 장소.
자신의 사도인 은현이 바라기만 한다면, 그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러오는 것은 일도 아니다.
“…….”
은현은 베르단디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베르단디님. 저 어린애 아닌데요?”
마치 물가에 어린 아들을 내놓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베르단디의 얼굴을 보고 은현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설마 은현이 그 정도로 막 나가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베르단디는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
은현의 말을 들은 베르단디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은현의 등짝을 때렸다.
[잔말 말고 나의 조언을 꼭 기억해라.]
“아, 알겠습니다.”
은현은 매서운 여신의 손맛을 맛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점점 희미해지는 자신의 몸을 보며, 은현은 전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녀올게요. 여신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여신의 대답을 들으며 지그시 두 눈을 감자마자, 다시 눈을 떴다.
은현의 시야에 보인 것은 처음 신계에 왔을 때와 별다를 것이 없는 새하얀 배경이 아니었다.
지구에 그리스라는 나라에 존재했던 거대한 신전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기둥들이 양쪽에 일자로 나열된 공간.
그리고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들.
그 시선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인간이 아닌 신들의 기운을 접한 은현은 마치 무거운 질량의 무언가로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은현은 작게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영혼에 각인된 신력을 꺼내어 자신의 몸을 둘렀다.
“호오?”
은색의 신성한 기운이 은현을 감싸며 몸을 짓누르는 신들의 기운을 밀어내자, 몇몇 신들이 두 눈에 이채를 띄웠다.
그저 여신의 눈에 들어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인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몸속에 존재하는 신력을 스스로 꺼내어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그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하계의 상황을 그나마 파악을 할 수 있는 것은 무너져간 하계를 재창조시킨 일곱 여신들 뿐.
이외의 신들은 하계의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으니, 말로만 들었던 은현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고 흥미를 느낀 것은 당연하다.
[네가 ‘운명의 세 여신’에게서 사도의 임무를 부여받았던 인간이 맞나?]
한 남신이 무리 안에서 앞으로 걸어 나와 은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다.”
은현은 순순히 대답하여 그 남신의 물음에 긍정했다.
[반갑네. 드디어 자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다니.]
남신은 미소를 지으며 은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워서, 은현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악수라고 한다지? 인간들은 반가움을 표시하기 위해 이렇게 손을 내밀어 맞잡는다고 들었는데.]
“…….”
은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며 반응하지 않자, 남신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틀린 건가?]
“아, 아니요. 맞습니다. 그런데…. 저를 아십니까?”
[아, 그렇군! 자네는 아직 나의 얼굴을 모르지!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납득한 표정을 짓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은현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내가 준 ‘망치’는 잘 쓰고 있나?]
“…아!”
은현은 뒤늦게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반가움을 표하는 남신의 이름으로 추측되는 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불카누스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