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 437. 왕궁 연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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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도착한 왕궁의 입구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의 숫자는 평소보다 많이 배치되었으며, 병사들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왕궁으로 모여든 귀족들을 검문하고 입장을 인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신분이 하나 같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라, 검문부터가 하나하나 조심스럽고 철저히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굉장히 분주히 움직여야만 했다.
마차에서 내린 은현은 천천히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내리시죠. 부인.”
“…갑자기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장난스레 손을 뻗어 엘레노아를 에스코트하자, 엘레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은현의 손을 붙잡아 마차 밖으로 나왔다.
마차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이후, 흐트러진 화장과 드레스를 다시 고쳐 입을 엘레노아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 허리를 떠는 부자연스러움을 보여주었다.
“괜찮겠어?”
“…안 괜찮다고 하시면 봐주실 건가요?”
“아니.”
미소를 지으며 즉답으로 거절의 의사를 내놓자, 엘레노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노려보았다.
“당신…. 정말 짓궂어요.”
엘레노아는 자신을 에스코트해주는 은현의 팔짱을 끼우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괜찮아요. 저도 나름…. 이걸 즐기고 있으니까.”
“변태네.”
“절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에요.”
엘레노아는 은현의 짓궂은 농담을 맞받아쳤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웃고 있는 두 부부의 모습은 주위 사람들이 보기엔 굉장히 서로에게 애정이 넘치는 잉꼬부부가 다름이 없었다.
이윽고 은현의 에스코트를 받아 궁정 입구의 병사들에게 도달한 엘레노아는 곧바로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휘장을 꺼내어 병사들에게 제시했다.
“이번 연회에 참석 예정인 엘레노아 아르미타스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무, 물론입니다.”
병사들은 엘레노아의 아름다운 미모에 넋을 잃고서 멍하니 고개를 끄덕여 엘레노아와 은현에게 길을 터주었다.
사실 왕궁의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는 공작 가문의 여식인 엘레노아의 얼굴은 매우 익숙한 편이었다.
이번 연회의 목적이 흡혈귀라는 인외종의 소탕 작전을 승리로 이끈 용맹한 자들의 공훈을 치하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경비병들에게도 전달된 사항.
그 작전 속에서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막대한 신성을 사용하여 작전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승리로 이끈 엘레노아는 다른 이들보다 극진히 대우하라는 명령도 전달받았다.
“제가, 제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한 경비병이 곧바로 안내를 자처했다.
엘레노아의 미모에 홀려 그녀의 안내를 자처한 것은 남성으로서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사심이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어 그 경비병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아요.”
엘레노아에게 왕궁은 아버지인 아브로스를 따라서 자주 방문한 익숙한 장소다.
안내 따위는 필요도 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자신을 에스코트해줄 남자는 정해져 있었다.
“저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에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조금 부담스럽네요.”
“아, 죄, 죄송합니다!”
경비병은 퍼뜩 놀라며 급하게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혼자도 아니고, 남편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 여성에게 자신은 도대체 무슨 막말을 내뱉었다는 말인가.
그 모든 사실을 잊고 잠시나마 동행하고 싶다고 여겨질 정도로, 엘레노아의 몸에서는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모, 목숨만은…!”
이것이 차기 성녀라고 불리는 여성의 실물이라는 것에 이성을 빼앗겼던 병사는 황급히 자신의 목숨을 구걸했다.
이전에 자신과 비슷한 무례한 행동을 했었던 동료 병사가 그 상황에서 기분 나쁨을 느꼈던 귀족에 의해 왕궁의 경비병 직위를 해제당했었던 전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과를 해주셨으니 괜찮아요. 당신은…어떻게 생각하세요?”
“엘레노아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는 괜찮아.”
엘레노아의 질문에 은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무릎을 꿇어 사죄하는 경비병을 용서해주었다.
“아, 아아…. 감사합니다. 성녀님….”
“…….”
엘레노아는 경비병이 안도하며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적잖게 당황했다.
아니에스의 뒤를 이어, 차기 성녀로 내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저런 거창한 호칭은 많이 부담스러웠다.
아니에스는 엘레노아에게 성녀로서 해야 할 역할과 의무 따위는 전혀 없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된다고 말은 했지만,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담을 느꼈다.
베스타 신전 쪽에서 엘레노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집적거릴 낌새가 보인다면 그것을 은현이 가만히 둘리가 없고, 이미 그런 움직임은 아니에스 쪽에서 훌륭한 방패의 역할을 수행하며 차단해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자신을 칭송하는 것은 없던 역할과 의무마저도 생길 것만 같아 많이 부담스러웠다.
“가요.”
“응.”
엘레노아는 그 경비병을 뒤로하고 급하게 은현을 재촉하여 왕궁 안으로 입궁했다.
“성녀라네.”
“…….”
은현은 웃으며 왕궁 안을 함께 걷고 있는 엘레노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마차 안에서 뭘 했는지, 지금 네 모습을 알게 된다면, 저 경비병은 무슨 생각을 할까?”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엘레노아의 수치를 자극했다.
“너무…놀리지 마세요. 당신이 괴롭혔으면서….”
“응. 미안.”
엘레노아가 얼굴을 붉히며 작게 자신의 가슴을 때리자, 은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사과했다.
이윽고 시작된 연회가 한창 진행 중인 왕궁의 중앙홀에 도착한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은 먼저 입장한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의 지휘관인 리오드였다.
“왔나.”
“안녕하세요.”
“음.”
자신을 보자마자 건네온 엘레노아의 인사에, 리오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늦었군.”
“그렇게 늦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은현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네 쪽이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
“내 쪽이야, 기사단원의 절반 이상이 참여해야 했으니까.”
움직여야 하는 인원이 대규모인 만큼, 리오드와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은 일찍부터 왕궁을 와서 입궁 절차를 마쳐두었다.
은현은 연회를 즐기고 있는 아르티아의 단원들의 모습을 한 번씩 쓱 훑어보았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모두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것이 아닌, 연회복을 착용하여 단원들 각자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후작 부인이 함께 오시지 못하셔서 아쉬우실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말끔한 턱시도 연회복을 착용한 리오드를 보며, 엘레노아가 물었다.
“그렇지만도 않아.”
리오드는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과는 달리,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남편의 승전을 거창하게 축하해주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테레지아는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리오드는 도리어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많은 사람이 북적이고, 술이 동반하는 이런 자리는 임산부가 자진해서 참석할 만한 장소가 되지 못한다.
“은현 님. 엘레노아 님. 오셨군요.”
뒤늦게 에이라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 쪽으로 다가와 은현과 엘레노아에게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
그리고 에이라의 뒤를 따라와 그녀처럼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차한성을 발견하고, 리오드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최근 들어 이상할 정도로 차한성의 존재를 경계하기 시작한 리오드의 사정을 알고 있던 은현은 숨을 죽이며 웃음을 참아내고는 에이라와 차한성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그래.”
이윽고 에이라의 뒤에 있는 차한성에게도 눈짓으로 인사를 교환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지만, 은현이라는 지구의 기억을 가진 남자에 대해 차한성은 어느 정도 내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륙에 전생하고나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지구의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차한성은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에이라가 참석한다는 걸 전했으면 에린도 따라왔을지도 모르는데. 아쉽네.”
“에린은 이런 자리를 껄끄러워하는 건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엘레노아와 에이라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은현과 리오드도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차한성의 경우에는 두 여성진 사이의 대화에 끼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리오드와 은현의 대화에는 더더욱 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등을 돌려 떠나가는 차한성을 응시한 은현은 리오드에게 물었다.
“저 사람. 에이라와 특별한 관계야?”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힘들게 키운 자식을 뺏길까 봐 경계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어. 너 지금.”
항상 무뚝뚝하면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기사단장의 근엄함을 보여주고 있는 친구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얼굴은 굉장히 신선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던 리오드는 은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현은 이미 그의 표정으로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신분 때문에 그래?”
단순히 귀족 가문의 여식과 평민 사이에 엮이는 그런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차한성은 언뜻 보기에는 은현과 비슷한 구석이 존재했다.
페르니아스 왕국의 백성도 아니며, 태생도 이곳이 아닌 외국인의 신분.
은현은 리오드가 어쩌면 출신도 불명확한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딸이 놀아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리오드는 그것을 부정했다.
“아니.”
“그러면?”
“에이라가 그러더군. 이번 흡혈귀들과의 교전에서, 내 검술을 보고 재현했다고.”
“저 사람이?”
“그래.”
“…흐음.”
은현은 멀어진 차한성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며 관찰했다.
리오드는 지금껏 자신이 봐왔던 검사 중에서 가장 재능이 넘쳐나는 검사이기는 했지만, 리오드는 그 재능만으로 지금의 강함을 달성한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을 꾸준한 단련의 반복과 연속으로 쌓아 올린 그 시간의 무게는 아무리 은현이라도 함부로 쉽게 넘볼 수 없는 견고한 탑과도 같다.
그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리오드의 검술을 재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필시 그 또한 훌륭한 견본을 참고하여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 집착과 열정을 보고, 리오드는 차한성을 아르티아의 단원으로 받아들였다.
“정식으로 저 녀석이 나의 검술을 배울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고 에이라가 부탁을 해왔다.”
“그건….”
에이라나, 남동생인 엘리온이라면 모를까, 집안사람도 아닌 외부인에게 올리비온 검술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총명한 에이라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은현은 흘끗 엘레노아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에이라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리오드에게 물었다.
“…진심인가?”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일단은…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대답은 보류했지만…. 에이라가 강하게 주장한 일이다.”
게다가 에이라는 아버지의 검술을 재현하여 선보인 차한성의 기술이 너무나도 형편없이 조잡하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주장한 것이다.
자신의 자랑인 아버지가 만들어낸 올리비온 검술이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에이라의 기특한 마음을 리오드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차한성에게 올리비온 검술을 가르치는 것을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
“에이라가 바란다면….”
가르쳐주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 했지만.
차마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에이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차한성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후작 저택 안에서, 에이라와 함께 검술을 단련하는 차한성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순간적으로 리오드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역시 이건….”
“자자, 진정해. 기분 좋은 자리잖아. 인상 피고, 일단 이 얘기 보류로 해두고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는 리오드를 달래며, 은현이 그에게 와인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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