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0화 〉 430. 뇌신(3)
* * *
파지직!
“크윽!?”
벨페고르가 레이넌의 몸을 통해서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격통을 느끼고 신음했다.
그 전류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제라드가 레이넌의 팔을 움켜쥐면서 흘러 들어온 것.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식을 하기도 전에, 바닥에서 꿈틀거렸던 제라드가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크으…으윽!”
전신의 격통을 느낀 제라드가 신음하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양팔을 움직여 땅을 짚고, 다리를 디뎌 몸을 일으켰다.
아래를 보고 있던 푹 숙어져 있던 제라드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떠 올라 레이넌의 몸을 장악한 벨페고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파지직!
“이럴…수가!”
벨페고르는 경악했다.
시선을 마주친 제라드의 두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는 뇌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인간이…신수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됐다고!?’
몇 번이나 몸속이 헤집어지고 회복되기를 반복하는 격통 속에서 제라드는 기린의 마력과 자신의 마력을 융화시키는 것을 성공시킨 것이다.
“너, 레이넌이 아니구나?”
“큭…!”
제라드는 레이넌의 현 상태를 알아보았다.
아무리 20년 만에 만난 과거의 인연이라지만, 그의 말투나 행동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 네가 레이넌을 부추긴 그 악마구나.”
파지직!
곧바로 그의 몸을 무엇이 장악했는지를 파악한 제라드가 벨페고르를 노려보며 사나운 뇌전을 방출했다.
이 사태를 일으키도록, 대륙에 혼란을 주도록 레이넌을 부추긴 원흉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에 씨익 미소를 드러냈다.
“잡았다. 이 X끼야.”
미소를 지은 제라드는 더욱 자신의 마력을 방출했다.
파지직!
“…쯧!”
벨페고르는 레이넌의 팔을 타고 전해져 오는 거센 뇌전의 힘을 느끼며 혀를 찼다.
거칠게 팔을 뿌리치고는 상황을 지켜볼 요량으로 뒤로 빠졌지만.
[제라드 속성 비기]
[전광석화(?光?火)]
거리를 벌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제라드는 뒤로 빠진 벨페고르에게로 돌진했다.
전신에 뇌전을 두른 제라드의 고속 이동 기술은 은현이 가르친 이형환위를 이미 뛰어넘었다.
“젠…장!”
아무리 거리를 벌리려고 해도, 계속해서 따라붙는 제라드의 끈질김에 벨페고르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마계에 존재하는 자신의 몸이었다면, 아무리 신수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인간이라도 벨페고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벨페고르는 고작 정신체에 불과하며 자신이 장악한 육체는 인간의 것으로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대륙에서 최강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영웅의 육체라도 벨페고르의 성에 차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부분.
제라드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또 하나의 단검을 꺼내어 뇌전을 방출시켰다.
순식간에 단검을 뇌광이 감싸기 시작한 이 기술은 작은 신수의 모습을 하고 있던 제라드의 기술과 비슷한 부분이 존재했다.
[제라드 속성 비기]
[아스테리오스]
하지만 그것은 아까 전의 강렬했던 뇌광의 단검과는 다르다.
순수한 뇌전으로 그 형태를 갖추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이것은 실체가 존재하는 무기에 마력을 덧씌운 것일 뿐.
마력의 밀도 자체가 틀리다.
크기는 같지만, 그 단검이 뿜어내는 뇌광과 위용은 명백하게 아까 전보다 줄어들었다.
‘…어쩔 수 없나.’
체내에 남아있는 마력도 얼마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현재의 이것이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수준의 한계다.
하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음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어 제라드의 마음속을 뿌듯함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가자.’
어째서인지, 쉽게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낙천적으로, 낙관하고 있는 안일함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어떠한 확신 때문이다.
레이넌의 몸을 장악한 벨페고르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제라드는 눈앞의 적을 죽이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순식간에 벨페고르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뇌광의 단검을 휘둘렀다.
“큭!?”
파지직!
순간 제라드의 움직임을 놓친 벨페고르는 작게 신음했다.
제라드가 이전의 목숨을 불태워서까지 이뤄냈던 뇌신화와 비교해서 끝까지 유지한 것은 속도다.
마력의 밀도, 위력을 일정 수준 이상 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극한의 신속을 선택했다.
자신의 장점은 은현의 훈련을 소화하면서 단련시킨 반사신경과 민첩성이지, 특출난 근력과 마력이 아니다.
신수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기린의 마력은 소량으로도 레이넌의 신체 강화를 찢어발길 수 있는 위력을 손에 넣었다.
그 이상의 강화는 자신에게 필요 없다고, 제라드는 확신했다.
‘빠르게. 더 빠르게.’
음속을 넘어서 한계의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차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실, 지금의 이 움직임 또한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이며 자신은 그가 보여준 기술을 수백, 수천 번이고 반복하여 자신의 몸에 기억시키고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제라드는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다.
콰아앙!
뇌광을 두른 제라드의 단검이 벨페고르를 베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며 공기를 찢어버리는 파열음을 발생시켰다.
신수의 힘을 담고 있던 단검이 마침내 내구를 다하여 부러지면서, 무기에 담겨 있던 마력이 단숨에 해방되어 폭발한 것이다.
“…….”
쉬지 않고 맹공을 이어나가던 제라드의 단검을 피해낸 벨페고르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아직 적응하지 못했군.’
제라드는 새롭게 만들어낸 ‘신속’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향상된 신체 능력은 굉장히 경이롭지만, 그 신체 능력보다 머릿속의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에 가깝다.
제라드의 신속은 순간순간 움직임을 놓칠 정도로 빠르고 강렬했지만,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텀이 존재했고, 그 텀은 벨페고르에게 제라드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쯧!”
제라드는 작게 혀를 차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또 한 자루의 단검을 꺼내 들고 다시 한번 단검에 뇌전을 둘렀다.
벨페고르는 제라드가 펼치는 신속의 맹공들을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대응하고 있었지만, 그 맹공들을 피하고 막아내는 것이 한계.
죽다가 되살아난 레이넌의 육체로는 반격할 수 있는 틈까지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현재 레이넌의 육체는 악마화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엘레노아의 강신인 치천사의 날개로 인해 그 힘이 깎여나가 반감된 상태.
이 상황은 여러모로 벨페고르에게 불리했다.
그런 와중에도, 제라드는 계속해서 자신의 움직임과 사고의 흐름을 조율하고 또 조율하여 ‘신속’을 사용하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한 남자의 등을 떠올렸다.
‘현이 형님.’
언제나 제라드는 은현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의 차이가 얼마나 커다랬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신수의 힘을 품으면서 뇌전을 전신에 둘러 극한의 신속을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은현의 진짜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신이 부여한 권능인 ‘시간 가속’을 활용한 극한의 신속을 다룰 수 있는 은현의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제라드는 감탄했다.
‘얼마나,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셔야 했던 걸까.’
정밀하고 세련되면서도 정확하게 적의 급소를 공격하여 제압하는 은현의 움직임이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은현이 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빠르게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그 경이적인 속도의 신체 능력뿐만이 아니다.
상대의 공격과 약점을 짧은 순간에 파악하고,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며 정확히 제압하는 것.
짧은 시간 안에 그것을 해내게 만드는 응축된 사고의 흐름이 너무나도 경이롭고 대단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그 질문은 전혀 의미가 없다.
질문하고 고뇌하며 망설일 게 아니라, 자신은 시도하고 부딪쳐야 한다.
그것은 더욱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한 자신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해보는 거야.’
“크윽!”
제라드의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의 텀이 조금씩 짧아지기 시작하여 공격의 대응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에 벨페고르는 점점 쌓였던 짜증이 더욱 악마의 이성을 흔들었다.
그것은 동작과 동작이 연결되어 빠른 속도로 퍼부었던 맹공이 조금씩 연계된 동작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점점 정밀하고 날카롭게 급소를 공략해오는 그 움직임이 벨페고르의 심성을 뒤틀리게 만든다.
제라드는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쌓여만 갔던 벨페고르의 짜증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만 뒤져!”
벨페고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마력으로 만들어낸 흑염을 전방에 흩뿌렸다.
커다란 장막처럼 허공에 흩뿌려진 흑염이 아래로 떨어지며 제라드를 덮쳤다.
‘왔다.’
하지만 벨페고르의 반격을 제라드는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큰 동작으로 만들어질 터인 벨페고르의 아주 작은 빈틈.
[제라드 속성 비기]
[전광석화(?光?火)]
빛보다 빠르게 움직인 제라드의 신체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전방에 흩뿌려진 흑염으로 시야가 가려진 것은 오히려 제라드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
제라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벨페고르의 뒤다.
파지직!
“……!”
자신의 뒤쪽에서 뇌전이 공기를 찢는 파열음을 들은 벨페고르가 번뜩이며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몸을 돌린 벨페고르의 가슴에 제라드의 단검이 쇄도해 들어갔다.
“크…!”
‘끝났다.’
마침내 악마가 장악한 레이넌의 가슴 급소에 단검이 박혔다.
단검에 담겨 있는 신수의 힘인 뇌전을 해방해 다시 한번 레이넌의 몸을 악마와 함께 불태워버린다면, 완벽한 제라드의 승리.
“읏…?”
하지만 제라드는 단검에 담겨 있던 뇌전을 해방하지 못했다.
조금씩 단검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몸을 지탱하던 다리의 힘이 풀려버려 바닥에 쓰러져버린 자신의 몸 상태를 직감했다.
“젠…장!”
제라드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를 갈았다.
‘하필, 하필이면 지금 이때…! 마력 고갈이라니!’
엘레노아의 강신, ‘치천사의 날개’는 그 효과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몸 상태를 회복시키고 몸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 올려주지만, 마력과 정신력까지 회복을 시켜주지는 못한다.
대량의 뇌전을 방출한 끝에 바닥을 드러낸 마력.
신수의 힘과 자신의 마력을 융화시키기 위해 몸속의 내장을 헤집고 회복하기를 반복하는 격통을 느끼면서 쌓여간 정신적 피로.
두 가지 요소가 겹친 제라드의 몸은 이번에야말로 한계에 달했다.
‘안…돼!’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몸속이 아예 텅 비어 버린 듯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라고 애써 타일렀지만, 마력 고갈과 정신적인 피로에 저항하지는 못했다.
“크…으윽!”
가슴에 뇌전을 품은 단검이 박혀있던 벨페고르는 단검을 통해서 전신으로 퍼져 헤집어놓는 뇌전으로 인해 격통을 느껴야만 했다.
“네 놈의…목소리. 얼굴. 차림새. 모조리 기억했다.”
그 격통을 느끼면서도, 벨페고르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고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제라드를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반드시…. 언젠가 반드시 네 놈을 죽여주마.”
벨페고르는 뇌전으로 저릿한 몸을 이끌며 이 자리를 뜨는 것을 선택했다.
마력 고갈과 정신적 피로로 바닥에 쓰러진 제라드는 완전히 무방비의 상태였지만, 벨페고르는 과감히 그의 목숨을 끝내는 것을 포기했다.
키아아악!
하늘 위에서 날갯짓하며 이 영지 전역에 질병을 흩뿌리던 노스페라드의 추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흡혈귀들을 이끌고 있던 왕, 노스페라드가 당했다면 페르니아스 왕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다음으로 올 곳은 제라드와 자신이 격전을 벌였던 이곳이 될 것이 뻔하다.
지금은 이 뇌전이 담겨 있는 단검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
악마인 자신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순백의 깃털들을 흩뿌린 날개를 가진 사제나, 페르니아스 왕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상대로는 만신창이인 이 몸으로 어떠한 것도 하지 못한다.
“반드시. 반드시 죽여주마.”
타인의 손이나 정신체인 자신의 상태가 아니라, 하계로 자신의 본체가 넘어오게 된다면, 가장 먼저 제라드를 죽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리라, 벨페고르는 다짐했다.
“…젠장.”
제라드는 그 증오스러운 악마의 시선을 받으며 결국 정신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