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28화 (411/730)

〈 428화 〉 428. 뇌신(1)

* * *

“안 돼.”

은현은 단칼에 제라드의 제안을 거절했다.

“형님.”

“안 된다면 안 돼. 너 이게 뭔지 알고 있잖아.”

“알고 있습니다.”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은현의 얼굴은 항상 여유가 넘치는 흐름이 아닌, 좀처럼 보기 힘든 동요하는 표정이었다.

“…이걸 쓰면 네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당연하죠.”

“나보고 지금 너를 죽일 약을 만들라는 거야?”

“형님.”

제라드는 낮게 목소리를 깔며 은현을 불렀다.

“전에 형님이 말씀하셨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정해진 운명을 타고난다는 말씀을요.”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모두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사람은 각자가 어떠한 역할을 부여받고 살아간다.

은현의 경우에는 여신의 부름을 받아, 신이 부여한 역할을 부여하는 사도가 되었고, 누군가는 어떠한 사회의 구성원인 일반인으로서, 누군가는 어떠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영웅으로서, 정해진 운명을 타고난다는 이야기.

20년 전, 과거의 제라드는 은현의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넘겨버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그 운명론에 관한 이야기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형님은 그때 분명 스스로 사명을 다하셨다고 생각하셨고,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하셨죠.”

“…그래.”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 신의 부름을 다시 받아 되살아나셨고요.”

그것은 또다시 은현이 이 세상에 필요해졌고, 어떠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야기를 돌려 말하는 제라드의 말에 은현은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되돌렸다.

“형님. 저는, 저 역시도 저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었으면 합니다. 분명 이 구슬을 사용하게 될 날이 아예 찾아오지 않게 된다면, 분명 저도 좋겠지요. 하지만….”

제라드는 자신의 주먹을 꽉 쥐고는 굳은 결의를 품은 눈동자로 은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필요한 상황이 닥쳤을 때, 제가 힘이 부족해서 그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저는 정말로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제라드는 자신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힘을 원했다.

설령 그 힘을 사용하는 대가가, 자신의 생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지라도.

“형님이 그러셨잖습니까.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과 직결될지라도 자신은 기꺼이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요.”

“…….”

제라드의 설득을 들은 은현은 두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인용한 말은, 확실히 20년 전 자신의 말이었다.

스스로의 목숨에 가치를 두지 않았고, 언제든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 말은 그때 당시에도 일리아나가 가장 싫어했던 말이었다.

­네 목숨은 네가 잘 챙겨야지. 넌 왜 항상 그런 식이야?

‘일리아나는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제라드의 부탁을 듣고, 은현은 그때 당시의 일리아나가 자신의 언행을 싫어했던 이유를 상기시켰다.

“너 항상 좋은 여자 만나서 정착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포기하는 거냐?”

“하하. 솔직히 그건 제 꿈이었지만요. 어디 인생이 마음대로 됩니까?”

제라드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지금까지 안 생긴 거면…. 저는 어쩌면 평생 독신으로 혼자 살아야 하는 놈이 될 운명인 게 아닐까요.”

순식간에 침울해진 눈빛과 말투로 분위기를 축 처지게 만드는 제라드의 말에 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말은 저렇게 농담으로 하면서도, 은현은 제라드의 심리를 읽을 수 있었다.

좋은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워 행복한 삶을 이어나가기를 바라는 남자가 20년을 가까이 대륙을 방랑하며 제국의 잔당을 추적하고, 끝에는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되는 환약을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해올 리가 없다.

제라드는 이미 행복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자신의 미래와 언제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험에 맞설 힘 중, 어느 쪽을 우선할지 선택한 것이다.

그 각오를 알아본 은현은 제라드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알았어. 만들어줄게.”

“하하! 감사합니다! 형님!”

◆ ◆ ◆

파지직!

“…쿨럭!”

꼼짝없이 복부를 관통당한 레이넌이 피를 토했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

소리조차도 뒤늦게 터져 나올 정도로 압도적이고 빠른 속도.

음속을 뛰어넘어 자신의 신체 강화를 찢어발기고 복부를 꿰뚫는 뇌광(雪光)을 두르고 있는 제라드는 이미 인간으로 정의할 수가 없다.

그는 이미 작은 신수 그 자체.

관통시킨 것은 무기가 아닌, 제라드의 팔이다.

공기를 포함하여 주위에 접한 모든 것을 찢어버리는 뇌광을 두르고 있는 제라드의 몸 자체가 이제는 흉악한 흉기나 다름이 없었다.

“끄…으!”

복부를 관통한 제라드의 팔로부터, 막대한 양의 뇌전이 흘러나와 닿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자, 레이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살점은 물론 내장과 뼈까지 모조리 찢어 불태워버리는 위력에 레이넌은 강렬한 격통을 느꼈다.

‘할 수 있다.’

악마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레이넌을 상대로 반격할 여지도 줘서는 안 된다고 제라드는 생각했다.

몸 안의 모든 내장 기관과 뼈, 혈액, 살 등, 모든 것이 불타 들어가는 와중에도, 제라드의 정신은 멀쩡했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육체는 그 기능을 상실했으며 시각을 포함한 모든 오감을 느끼게 해주는 감각기관마저도 뇌전으로 불타버린 지 오래.

안구가 불타버렸음에도, 이미 그 감각기관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신수의 마력으로 형성되어 금색의 뇌광을 발하는 마안(??)이다.

제라드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만물의 모든 것을 인간이었을 때보다도 더욱 잘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공기의 흐름, 소리, 냄새 등, 오감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모든 정보가 시각으로 표현되는 광경은 매우 복잡하고 인간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함.

그 난리 속에서 그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히려 통각마저도 잃어버리게 된 아이러니함이 그의 정신을 더욱 냉정하게 만들었다.

만약 통각이 멀쩡하게 살아있었다면, 제라드는 진즉에 미쳐버려 제정신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제라드가 삼킨 기린의 내단은 막대한 힘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그의 목숨을 집어삼키는 양날의 검이었다.

‘아마 3초 남짓인가.’

이미 모든 감각을 잃어버리고 통각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린 제라드는 냉정하게 자신의 목숨이 유지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했다.

자신의 목숨을 불태워 악마를 찢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은 고작 3초뿐이다.

이 얼마나 흉악하면서도 불합리한 교환의 방식인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뇌광으로 뒤덮인 제라드는 이제는 웃을 수도 없었다.

제라드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남은 5초의 시간을 어떻게 해야 최대로 활용할 수 있을지 뿐이다.

‘이대로 끝낸다.’

이윽고 제라드의 팔이 위로 들어 올려지면서 레이넌의 상반신을 반으로 갈랐다.

복부에서 관통된 상처를 시작으로 왼쪽 어깻죽지로 튀어나온 팔을 따라, 반으로 갈린 상체의 상처는 처참했다.

거칠게 찢어버린 듯한 상처의 단면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뇌광으로 인해 혈액마저도 모조리 불태워지면서 상처에 출혈이 생길 여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몸 전체로 퍼지는 뇌전은 약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레이넌의 몸을 좀먹고 있었다.

‘2초 안에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제라드는 반대쪽 손을 휘둘러 레이넌의 오른쪽 어깨와 팔을 붙잡아 거칠게 잡아 뜯었다.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있는 힘껏 가격하고, 찢겨 나가 걸레짝이 되어버린 그의 상반신을 두들겨 패며 더욱 만신창이로 만드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이윽고 제라드는 팔을 들어 올려 허공에 손을 뻗었다.

제라드의 몸을 두른 뇌전의 기운이 하늘 위로 들어 올린 제라드의 손바닥 위에 응집되어 서서히 형체를 갖춰 나갔다.

번쩍이는 금색의 뇌광을 발하며 갖춰진 형태는 한 자루의 창이다.

[제라드 속성 비기]

[아스테리오스]

마치 거친 짐승이 사나운 포효를 내뱉으며 울부짖는 것만 같은 금색의 단검이 하늘을 황금색으로 적셨다.

그 단검은 뇌전의 기운을 자신이 가장 애용하는 무기로 형상화를 시킨 것.

뇌광의 단검을 쥔 제라드의 손이 아래를 향해 내려찍자, 이미 호흡 기관마저도 불태워져 숨을 내뱉지 못하는 레이넌의 머리에 직선으로 내리쳐졌다.

“……!”

호흡을 할 수 없음에도, 시뻘게진 두 눈으로 위기를 직감한 레이넌이 자신의 양팔을 들어 올려 제라드의 단검에 대항했지만.

파지직!

몇 번이나 무력하게 당해버렸던 레이넌은 제라드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미 레이넌은 제라드의 뇌전에 의해서 몸속의 핵심기관을 모조리 찢어발겨 지고 불태워져 제대로 된 기능을 상실한 상태.

당연히 마력을 이용한 신체 강화도 사용할 수 없는 현 상황은 레이넌에게 한없이 불리한 궁지에 몰린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뇌전으로 만들어진 제라드의 단검은 그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제라드의 몸을 절반으로 갈라버렸다.

­귀찮군.

예상치 못한 사태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것은 레이넌의 몸속 심층의식 속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던 악마.

벨페고르다.

­어째서 인간이 신수의 힘을?

아무리 목숨을 건다고 하더라도, 다룰 수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저 난폭한 힘을 몇 초라도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에겐 절대로 불가능한 영역.

하지만 레이넌과 대적하고 있는 저 인간은 그것을 해냈다.

신수의 기운을 정제시켜 리스크를 완화하는 은현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벨페고르에게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상황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군.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미 레이넌은 숯검정처럼 새까매져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내장은 물론, 피와 살점이 불태워지며 목숨이 깎여나가는 정도로 그치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레이넌이 벨페고르와 계약하여 악마의 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

하지만 그것도 즉사를 면하게 해줄 뿐이지, 이대로 간다면 레이넌의 전신이 불태워져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지금 이 자리에서 레이넌이 죽어버린다면, 마계에 있을 자신의 본체를 이 하계로 불러오는 것은 더욱 번거로워진다.

이제야 좀 쓸만한 인간을 발견하여 자신의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서 레이넌이 죽어버린다면 또다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적당한 인간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차피 이미 계약을 맺으면서 악마의 힘 일부를 레이넌에게 이양한 전적이 있는 이상, 조금 더 자신의 힘을 소모하는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레이넌은 살려야 했다.

이미 시체나 다름없는 레이넌의 몸이 반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으려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마력이 시체나 다름없는 레이넌의 전신을 감쌌다.

파지직!

아직도 레이넌의 몸속에 남아있는 뇌전의 기운이 벨페고르가 이양한 악마의 힘과 충돌했다.

동시에 2초라는 시간이 지나, 뇌신화가 풀린 제라드의 몸에서 뇌전의 기운이 소멸하기 시작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지만, 이미 전신이 불타버린 제라드의 몸은 사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전신의 혈액은 불태워지고, 심장은 기능을 정지했으며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던 동력원인 기린의 마력은 조금씩 사그라져갔다.

목숨을 불태워 절대적인 힘을 거머쥐어 만들어낸 2초라는 시간 동안, 제라드는 레이넌을 압도했다.

하지만 그것이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미 인간의 기능을 상실한 레이넌의 육체는 조금씩 악마화가 진행되어 절단된 부분을 검붉은 마력이 들러붙어 이어붙이기 시작한다.

레이넌과의 싸움에서는 승리했지만, 악마와의 싸움에서는 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그때, 벨페고르는 하늘에서 무언가가 레이넌의 몸을 악마화시키고 있었던 자신의 힘에 간섭해오는 어떤 힘의 존재를 느꼈다.

­…깃털?

하늘에서 내려오는 순백의 깃털들.

그 깃털들 하나하나가 양질의 신성을 품고 있는, 이른바 벨페고르를 비롯한 모든 악마의 천적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의 잔재다.

벨페고르는 경악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여신의 잔재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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