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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불멸자-427화 (410/730)

〈 427화 〉 427. 영웅을 동경했던 남자(2)

* * *

느닷없이 자신의 의사를 밝혀온 제라드의 말에, 은현을 포함한 다른 세 명의 파티원도 침묵을 고수했다.

“…….”

리오드나 아니에스는 딱히 별 상관이 없다는 듯 제라드의 말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으나, 일리아나는 은현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대외적으로는 왕국의 귀족가문의 자제인 리오드가 이 모험가 파티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파티를 이끄는 실질적인 리더는 은현이었다.

실세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릇이 아니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리오드가 은현에게 리더의 자리를 양보하였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귀족의 자제인 자신이 앞에 나서는 것이 더욱 명분이 서기 때문에 앞에 나서주기는 했지만, 리오드는 언제나 모험가 활동 속에서 은현에게 조언과 의견을 구했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은현의 의심치 않는 능력에 감탄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파티의 멤버를 영입하는지에 대해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은현이었다.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며 제라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은현은 이윽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저, 정말입니까…?”

너무나도 쉽게 떨어진 승낙에 도리어 놀란 것은 제라드다.

“그래.”

꿈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은현이나, 작게 한숨을 내쉬는 리오드나 아니에스의 반응도 정말로 미묘했다.

“내일부터 네 훈련을 병행하면서 이동하도록 할게.”

“아, 알겠습니다!”

제라드는 자신의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기쁜 마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어떤 훈련을 받게 될지, 자신이 얼마나 성장을 할 수 있게 될지, 기대감으로 가득해 열정이 불타올랐던 제라드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철컥!

“이, 이건…? 뭔가요…?”

제라드는 자신의 발목과 손목에 채워지는 철제의 수갑을 보고 핏기가 가신 표정을 지으며 은현에게 물었다.

“앞으로 너는 이걸 착용하고 행군할 거야.”

“크….”

은현이 착용시킨 철제 수갑에서 손을 떼자, 중력의 힘에 의해 어마어마한 무게가 자신의 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기자, 제라드는 무심코 신음했다.

이 무게에 힘겨워하는 제라드의 모습을 보고도, 은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훈련을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체력과 신체를 갖춰야 할 필요가 있어.”

이것은 그것을 위한 기초 단련에 불과하다.

본래라면 몇 개월, 몇 년 동안 꾸준한 운동을 통해서 근력을 기르는 것이 정석이지만, 은현의 파티는 한 장소에 정착하며 제라드 하나만을 키워줄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강해지고 싶다면, 제라드가 파티의 사정에 맞춰 죽기살기로 따라와야만 하는 것이다.

제라드는 그 의미를 뒤늦게 이해했다.

“이게…훈련입니까?”

“꽤 유명한데. 용볼식 수련법이라고 들어봤어?”

은현은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농담을 섞어가며 장난스러운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 훈련에 대해서는 굉장히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어떠한 훈련을 받게 될까, 기대를 했던 제라드의 마음을 배신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를 하루 종일 견뎌내고 걸어야 하는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는 훈련에 제라드의 표정이 굳어갔다.

“못하겠어?”

“…….”

못하겠다고 하고 포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지금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험은 뉴비인 자신에게 있어 틀림없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자신은 지금 시험을 받고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 정도도 하지 못하겠다면 당장 포기해라.’라는 표정을 은현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겠습니다.”

망설였던 제라드는 고민 끝에 포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조금씩 주어졌다지만, 제라드는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지는 양다리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이빨을 꽥 깨물었다.

“크으….”

일리아나가 고개를 돌려 뒤에서 따라오는 제라드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더니 은현의 팔을 잡아당겨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너 무슨 생각이야?”

“뭐를?”

“쟤 굳이 키워보려는 이유가 뭐야?”

실력이 있는 모험가를 영입하려는 것도 아니고, 마법 이외의 분야에는 문외한인 일리아나 자신이 보아도 제라드가 무언가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방해되거나 민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 파티에 뉴비가 들어오든 베테랑이 들어오든 일리아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일리아나가 품은 감정은 불만보다는 의문이나 호기심 쪽이 강했다.

그저 정말로 우연히 마주친 인연에 불과한 그에게 은현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다.

“일리아나. 운명 같은 거 믿어?”

“…뭐?”

뜬금없는 은현의 질문에 일리아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말이지. 운명이란 게 존재한다고 믿거든. 어쩌면 저 녀석이 내 눈에 띄게 된 것은, 나한테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말하게 될 남자가 내 눈에 나타나 내 도움을 받은 건.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뭔 소리야. 너 설마 남자 좋아해?”

“…….”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은현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져 일리아나를 홱 돌아보았다.

“왜 대답 안 해. 빨리 얘기해. 너 남자 좋아하는 거야?”

“…나 지금 굉장히 진지한 얘기하고 있었는데. 왜 얘기가 그렇게 가? 그게 중요해?”

“어. 나한테는 중요해. 아주 굉장히.”

얼굴을 굳히며 한없이 위압감을 발산하는 일리아나의 얼굴이 꽤나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여자 좋아하는데?”

“그래? 그럼 됐어.”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일리아나의 심리를 잃을 수가 없어,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갑자기 웬 운명론?”

“그냥. 어쩌면 내가 너희를 만났던 것처럼 저 소년이 나와 만나게 된 것도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은현은 지금껏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누군가들을 떠올렸다.

그들과 만났던 것도, 지금 제라드라는 소년과 만나게 된 것도, 지금 리오드와 아니에스, 일리아나와 함께 여행하는 것도 모두 정해진 운명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나한테는 일리아나, 너와 만난 것도 운명이야.”

“…뭐?”

“우린 이미 만나기로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

일리아나는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는 은현의 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을 섞어가며 행군을 지속한 결과, 날이 저물기 시작하여 은현의 파티는 다시 한 번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크윽…!”

야영 텐트를 다 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앉는 제라드를 흘끗 본 은현은 곧바로 아니에스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에스 치료해.”

“어.”

대강 예상하고 있었던 듯 아니에스는 곧바로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고는 제라드가 부츠를 벗는 것을 도왔다.

족쇄와 수갑의 무게를 견뎌내며, 찢어지고 퉁퉁 부어오른 발가락의 발톱에서 피가 고여있다.

발 뿐만이 아니다.

종아리나 허벅지, 등이나 어깨가 모두 지금까지 혹사시킨 반동으로 피로와 격통이 제라드의 몸을 덮쳐왔다.

“완치는 시키면 안 돼. 어디까지나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도 훈련이니까.”

“예이. 예이. 어련하시겠어요.”

아니에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라드의 몸 속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은현의 말대로 완치보다는 상처의 회복 속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찢어진 근육과 상처입은 살위에 새로운 근육과 살이 돋아나고 보다 더욱 튼튼한 몸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은 아니에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

“…감사합니다.”

제라드는 모닥불 위에서 구워낸 고기가 담긴 그릇을 은현에게서 받아들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향긋한 향신료로 맛을 낸 고기는 야외에서 구웠음에도 굉장히 부드러웠다.

은현의 훈련 자체는 굉장히 고되고 힘들지만, 그 이외에는 정말로 기분 좋은 배려가 이어진다.

솔직히 아니에스의 회복의 기도와 은현이 만들어주는 이 밥이 아니었더라면, 고통스러운 훈련의 연속으로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훈련 이후에 받는 이 밥을 생각하는 것만이 제라드가 훈련의 고통을 이겨내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흑…. 흐윽…. 진짜로 맛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인 것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이상하게 보였다.

본인은 미치기 일보직전에서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본 제라드는 이미 은현의 훈련으로 맛이 가버린 피해자였다.

◆ ◆ ◆

“형님. 요즘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여?”

느닷없이 던전 주택을 찾아온 손님인 제라드의 안부 인사에 은현은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예. 적어도 20년 전보다는 많이 행복하시지 않습니까? 던전이라지만 이렇게 집을 짓고 정착해서 살고 있고 그리고….”

제라드는 정말로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내분도 세 분이나 있으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에린 또한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

“크흑….”

스스로가 말하고도 비참해져 제라드는 이 저택을 방문하면서 함께 챙겨온 술을 술잔에 따랐다.

본래 은현과 함께 마시기 위해 가져온 비싼 술이었지만, 은현은 현재 술을 마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제라드. 여기 공방이야.”

현재 던전 주택의 지하 공방에서, 은현은 에밀리아와 인형들의 보조를 받아 지스의 잡화점에 납품할 포션들을 제조하고 있었다.

정확한 재료들의 배합과 제조의 자동화 공정을 거쳐 탄생하는 이 포션들은 효과는 물론 매우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어 아르미타스 공작령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상처의 악화를 막아주는 응급처치 용도나 극심한 마력의 소모로 정신의 탈력감을 회복시켜주는 용도, 그리고 개인의 스태미나을 회복시켜주는 용도.

사실 밤마다 아내들을 상대하느라 스태미나가 극심하게 소모되는 자신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포션 사업을 시작했다는 속사정을 알게 된다면, 절대로 웃을 수 없는 해프닝이다.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좋은 여자를 만나서 한곳에 정착하고 행복한 여생을 살고 싶은데 말이죠.”

“…….”

하지만 제라드는 은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살짝 술기운이 올라 기분이 좋을 때 늘어놓는 이상한 푸념이다.

기분이 좋으면 푸념을 늘어놓는다니, 누가 듣는다면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을지도 모른다.

한곳에 정착하기를 소망하면서, 비밀리에 제국의 잔당들을 꾸준히 추적해오느라 사적인 일상생활을 누릴 여유가 전혀 없었던 제라드의 심리를 알고 있는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지?”

“…….”

곧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오는 은현의 질문에 제라드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한심한 표정을 지었던 얼굴을 굳혔다.

“한 가지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흐음.”

그것도 엘레노아를 통해서 몰래 찾아온 제라드의 용건이, 단순히 술을 마시고 푸념을 늘어놓기 위해서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은현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제라드는 품에서 금색의 기운이 감도는 구슬을 꺼내어 은현에게 내밀었다.

“그건….”

손바닥으로도 모두 채울 수 없는 커다란 구슬의 정체를 은현은 당연히 알아보았다.

“형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나 이 물건은 제가 짐작하고 있는 그 물건이 맞군요.”

곧바로 제라드와 마찬가지로 인상을 굳히며 제라드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5년 전, 제국의 잔당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흑마법사들의 비밀 은신처를 털었다가 얻었던 물건입니다.”

“…….”

은현은 제라드의 설명을 듣고는 표정을 굳힌 채로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구슬을 빤히 응시했다.

“네 용건이 뭔지 알 것 같은데.”

“네. 저는 이 구슬을 가공하여 제가 사용했으면 합니다.”

신수 기린의 마력을 정제시킨 내단을 삼키고, 인간의 몸으로 신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한단계 더 성장하는 것.

제라드의 결심을 들은 은현은 얼굴을 굳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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