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5화 〉 425. 영웅과 영웅(2)
* * *
“…….”
검붉은 색의 마력으로 일렁이고 있는 레이넌의 절단된 어깨의 팔 한쪽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꺼림칙하기 그지없는 오염된 마나의 응집체다.
제라드는 그 검붉은 색의 마력. 오염된 마나를 다루던 인간과 싸워봤던 경험이 있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여섯 명의 영웅이라고 불렀던 자신의 동료들과 은현이 20년 전의 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존재들.
악마와 계약하고 그 힘을 받아들여, 마수화가 진행되지 않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그들은 ‘마인(?人)’이라고 불렸던 존재들이다.
“어째서….”
단검을 꽉 움켜쥔 제라드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함께 제국과 싸웠던 자신의 동료가, 결국에는 그 제국에 속해있던 마인들과 똑같은 힘을 선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라드의 가슴 속에 분노와 배신감으로 얼룩진 거친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
떨리는 제라드의 말에도 레이넌은 침묵을 고수했다.
기어코 입을 열지 않는 그의 태도는 제라드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했다.
“이제는 인간도 포기한 거냐고!”
“설명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까.”
레이넌은 흡혈귀들에게 모든 인간을 먹이로 던져주는 최악의 방식을 사용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 대륙의 모든 인간의 몰살이다.
이 대륙에 인외의 존재들이 수면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난리를 피우던, 악마들이 판을 치게 되던, 자신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을 몰살시키고, 자신의 이 뒤틀린 증오심을 모두 해소한 다음에는 자신도 먼저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의 곁으로 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나의 사정을 알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레이넌은 무엇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자신이 렌디르 왕국의 정치 싸움에서 겪었던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 할까.
아내와 아이들이 납치되어 시체도 찾을 수 없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가족의 사연을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팔과 다리를 결박당한 채로 바닷속에 빠져 수장당할 위기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유혹해온 악마와 계약을 하며 목숨을 부지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해야 할까.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제라드. 너는 그것만을 묻는군.”
“…….”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공감도 바라지 않아.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자신의 인생과 영혼, 몸.
모든 것이 모조리 망가져 버린 자신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놓는다고 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해와 동정, 공감을 끌어내 대륙의 인간들을 몰살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에 동참이라도 하라고 설득을 할 것도 아닌데.
레이넌은 절대로 제라드가 자신 쪽의 편에 설 것이라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설명한다고 해서 너와 나의 입장의 차이는 변하지 않는다.”
대륙의 인간들을 말살하는 것이 목적인 레이넌과 간신히 되찾은 평화를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제라드의 입장의 차이는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다.
“…그래.”
제라드는 이것만큼은 레이넌과 이견이 맞았다.
자신이 지금까지의 그가 겪었던 사연을 들었다고 해서, 레이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이제 자신이 막아야 할 적이다.
결심을 마친 제라드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크….”
아직도 가격을 당한 옆구리가 욱신거려 제라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무심코 방심을 하면서 허용한 공격의 데미지는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며 통증을 참은 제라드는 레이넌을 경계하며 생각에 잠겼다.
‘뇌광의 이빨은 이미 한번 써버렸고.’
자신의 남은 마력량으로는 아마도 한번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레이넌의 신체 강화를 뚫어버릴 수 있는 자신의 비기를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단 한 번.
반면에 에린의 여우불로 끊임없이 불타올랐던 그의 어깨는 한 번 절단되면서 불타던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아까처럼 큰 데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급소인 심장이나 목을 노려야 하는데, 그 의도를 파악하고 있던 레이넌이 쉽게 당해줄 리가 없다.
게다가 악마와 계약하여 마인의 힘을 사용하는 그를 상대로는 까다로워도 너무 까다로웠다.
“그만 포기하고 편하게 죽어라.”
“하.”
이미 몇 번이고 권유했던 레이넌의 항복 권고에도 제라드는 코웃음을 쳤다.
레이넌 또한 제라드가 쉽게 항복을 하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써야 하나.’
도저히 레이넌을 이기는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 제라드는 자신이 준비해둔 최후의 보루를 꺼내야만 했다.
“스으…후우우….”
욱신거리는 옆구리의 통증을 애써 잊기 위해 작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네 뇌광의 이빨은 이제 한번 밖에 사용하지 못할 텐데.”
“그거야 20년 전의 나고.”
우습게도 적을 눈앞에 두고도, 레이넌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는 제라드를 응시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네가 악마한테 영혼과 몸을 팔아넘겨 강해진 것처럼. 나도 아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아니거든.”
제라드는 단검을 쥐지 않은 한쪽 손을 품 안에 집어넣어 어떤 물건을 꺼냈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잠시 망설이고는 이것을 만들어준 은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결국, 이걸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제라드가 품에서 꺼낸 것은 어떠한 작은 금색의 구체 모양을 한 구슬이었다.
그 금색의 구체가 품고 있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본 레이넌이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그건 뭐지?”
“신수의 마력을 응축시킨 내단이야.”
“…신수의 마력이라고?”
레이넌이 뭐라 반응을 할 틈도 없이, 제라드는 곧바로 그 구슬을 입속에 털어 넣어 집어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뱃속에 들어간 내단이 녹아내리면서, 내단 속에 응축된 신수의 기운이 제라드의 전신을 덮쳤다.
파지직!
“크으윽!”
몸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오듯 활성화되는 뇌전의 기운은 아까까지 단검에 실려있던 ‘뇌광의 이빨’의 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마치 푸른색의 기운으로 일렁이던 제라드의 마력 자체가 금색의 뇌전으로 변화하는 것만 같았다.
“너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애써 참는 표정을 짓던 제라드가 시퍼런 눈으로 자신의 적으로 단정 지은 레이넌을 노려보았다.
“너는 여기서 내가 막을 거야.”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되는 결과가 되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악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옛 동료는 이곳에서 막아야 한다는 결의를 굳힌 제라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면 신수, 기린의 내단을 손에 넣게 된 이유가 악마와 계약을 하여, 타락해버린 자신의 옛 동료를 막기 위해서라는 운명의 강한 강제력을 느끼기까지 했다.
“크으…아아아아!”
몸 안에서부터 용솟음치는 기운을 어떻게든 통제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결국 무용지물로 변해버렸고, 이윽고 방출된 금색의 뇌전이 제라드의 전신을 뒤덮었다.
제라드가 삼킨 구슬은 신수라고 불리는 종족 중에서, ‘기린(??)’이라는 신수의 마력을 은현이 정제하여 만들어낸 내단.
한 차례 정제하여 그 기운을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그런데도 막대한 마력의 정수가 담긴 내단을 단번에 집어삼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일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몸 속이…타들어가는 것만 같아…!’
신수의 후예가 된 에린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다.
에린의 경우에는 구미호의 유해가 묻혀있는 페르니아스의 신목이라고 불리는 소망의 나무에서 약 사흘을 가까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 그 계기다.
아주 미약한 신수의 힘의 일부와 함께 구미호의 사념이 흘러들어오면서 에린의 몸속에 구미호의 마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에린의 마력과 융화된 상태에서 에린이 자신의 마력을 성장시킴으로써 신수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된 케이스다.
하지만 제라드가 지금 먹은 신수의 힘은 전혀 다른 경우.
애초에 기린의 마력은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된 구미호의 마력과 달리, 굉장히 거칠고 난폭하다.
여러모로 에린이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것이지, 신수의 힘이라는 것은 일개의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정제해준 것만으로도 은현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로인해 제라드가 치러야하는 대가는 자신의 목숨이다.
‘그래도.’
제라드는 자신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기린의 마력에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레이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너만은 반드시 네 뜻대로 되지 않게 여기서 막겠어.’
“크아아아아아!”
전신을 불태워지는 고통에 마침내 제라드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기린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인간의 규격을 초월하게 된 제라드의 몸을 뒤덮은 금색의 뇌전은 제라드의 피부를 태우고, 몸 안에 흐르는 혈액을 모조리 태우며, 그의 눈동자를 불태웠다.
몸은 물론, 머리마저도 모조리 금색의 뇌전에 휩싸인 제라드의 형상은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 인간의 테두리를 벗어던졌다.
혈액과 심장을 포함한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불태워진 그는 이미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했으나, 그의 육체를 집어삼킨 금색의 뇌전은 하나의 작은 신수 그 자체.
[제라드 속성 비기]
[뇌신화(雪?化)]
파지직!
“……!”
레이넌은 전신의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순간 몸을 떨었다.
어두운 밤하늘 속에서 금색의 스파크를 튀기며 밝은 빛을 발산하는 제라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눈이 존재했던 부위는 이미 뇌전으로 뒤덮여 눈 따위는 마주칠 리 없었음에도, 제라드는 틀림없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과 방출하는 전신의 위압감만으로도, 레이넌의 몸이 떨린다.
지금의 저 상태가 자신의 방어력을 웃도는 강력한 공격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와는 확실히 다르다.’
저것을 제라드로 계속 인식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
곧바로 레이넌이 전투에 돌입하기 위해 자세를 잡으려던 순간, 제라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큭!?”
순식간에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제라드를 뒤늦게 인식하고, 레이넌이 몸을 뒤로 빼어 거리를 벌리려 했다.
파지직!
소리보다도, 눈이 먼저 제라드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음속을 뛰어넘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라드가 보여준 이동 기술은 이형환위가 아니었다.
[제라드 속성 비기]
[전광석화(?光?火)]
눈깜짝할 순간에 레이넌의 앞으로 돌진해온 제라드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팔을 휘둘러 레이넌의 복부를 관통시켰다.
푸욱
압도적인 방어력을 자랑했던 자신의 신체 강화를 너무나도 허무하게 뚫어버리고 관통당해버리자, 레이넌은 피를 토했다.
“커헉!”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