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 422. 노스페라드(3)
* * *
강신이란, 자신의 몸을 매개로 신의 의지를 이곳 하계에 현현시키는 것.
다른 의미로는 강신을 한 사제가 기도한 염원을 신이 받아들이고 이루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써 탄생한 것이, 현재 엘레노아의 등에 돋아나 있는 한쌍의 커다란 날개.
그 날개 속에서 떨어지는 순백의 깃털들 하나하나가 양질의 신성을 품고 있었다.
“이건….”
“몸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깃털들에서 흘러나오는 신성을 접한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이 순간 기적을 접했다.
영지 내부를 가득 채운 질병으로 인해 피를 토하며 죽음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자신의 신체가 급속도로 회복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기적이야….”
오히려 소탕 작전을 임하기 전보다 더욱 몸이 상쾌해지는 지금의 이 상황을 기적 말고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엘레노아가 자신이 모시는 베스타 여신에게 염원했던 내용은 죽음의 문턱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
스스로가 강해져 많은 적들을 배제하고자 염원했던 아니에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도다.
그리고 그 기도로 만들어진 치천사의 날개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엘레노아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기적이다.
“할 수 있어.”
한 기사가 이 기적을 체험하고 중얼거렸다.
아군들의 사기가 회복되고, 하나둘씩 떨어뜨렸던 무기들을 다시 손에 쥐며 일어섰다.
역병이 퍼져 피를 토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한 절망으로 물든 그들의 눈에 깃들기 시작한 것은 한줄기의 희망이다.
검과 마법으로도 이길 수 없었던, 보이지 않는 적이나 마찬가지였던 질병을 눈앞에 두고, 굴복했던 차에 생겨나는 희망.
엘레노아는 사람들의 몸을 치료한 것과 동시에 절망으로 물들었던 마음을 치료했다.
“해보자고!”
점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무력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공포에 몸을 떨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하여 하나둘씩 일어났다.
그들을 한차례 응시하던 엘레노아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에이라, 차한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
“네, 네!”
에이라는 퍼뜩 놀라며 정신을 차리고는 엘레노아의 부름에 답했다.
이윽고 엘레노아가 에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린.”
“네!”
“나를 지켜.”
“알겠습니다!”
어려우면서도 간단명료한 명령.
에린은 기운차게 대답하며 주위의 흡혈귀들을 바라보고는 레이피어를 겨눴다.
그녀를 뒤따라 고개를 끄덕인 에이라와 차한성 또한 각자의 무기를 쥐며 본분은 다하기 시작한다.
엘레노아는 자신의 등에 돋아난 천사의 날개를 움직였다.
날갯짓을 한번 할 때마다 미약한 선풍과 함께 허공에 흩날리는 순백의 깃털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굉장해.’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몸의 일부였던 것인 양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천사의 날개는 가볍고 따뜻했다.
사실 처음 성공해본 강신(??)을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시도한 것은 도박수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수차례 기도를 올리며 베스타 여신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강신이 지금에서야 성공하게 된 것은 엘레노아 자체도 얼떨떨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너무 부담가지지 마. 너라면 꼭 성공할 테니까.
웃으며 자신을 격려해줬던 은현이 자신에게 성공을 장담해주었으니까.
아마도 은현과 베르단디가 무엇인가 손을 써준 것이 분명하리라.
“으….”
하지만 엘레노아는 뒤바뀐 전황과는 반대로, 극심한 탈력감을 느꼈다.
몸안의 모든 신성을 빨아들여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강신은 그 엄청난 효과만큼이나 막대한 신성력을 소모시키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 아니에스조차도 이 강신으로 만들어낸 황금 사자를 장시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이제 막 베스타에게 성녀로 인정을 받아 강신을 이뤄낸 것 자체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성과다.
“오래 버티지는 못해.”
자신이 이 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되지 못한다.
그것은 즉 노스페라드의 질병들을 무력화시켜 물리적인 싸움으로 대등 또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시간 또한 그렇게 길지 않다는 뜻을 의미한다.
엘레노아의 강신이 끝나는 순간이 바로 아르티아 기사단 측의 패배로 이어지며 흡혈귀 측의 승리로 이어지니 1초라도 빨리 허공의 노스페라드를 처리해야만 이 싸움을 승리할 수 있게 된다.
“알겠습니다!”
여우불을 두른 레이피어를 이용하여 달려드는 흡혈귀들의 목을 관통하고, 베어 넘기는 에린은 마치 폭주하는 경주마처럼 전방의 흡혈귀들을 치워버리기에 바빴다.
엘레노아는 그렇게 에린이 정돈해둔 직선상의 길을 날아 에린의 뒤를 쫓았다.
‘굉장해! 몸이 가벼워! 힘도 넘쳐나고!’
엘레노아가 강신시킨 치천사의 날개는 상처의 회복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신체 능력의 향상을 도모해주는 최상위계의 버프.
그 버프를 몸에 두르고 있는 에린을 흡혈귀들은 막아내지 못했다.
에린은 ‘엘레노아를 지킨다.’라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되돌린 것도 모자라, 한층 더 가벼워진 자신의 몸 상태를 자각하며 에린은 주위의 흡혈귀들을 모조리 처리했다.
자신을 호위해주며 흡혈귀들을 처리하고 있는 에린을 한번 바라보고는, 엘레노아는 리오드가 있을 방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부탁드릴게요. 리오드님.”
◆ ◆ ◆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순백의 깃털이 가까워지는 순간, 자신의 몸 안에 쌓여가던 죽음의 덩어리들이 깨끗하게 제거되고, 그것도 모자라 몸의 컨디션을 극상으로 끌어올리는 기적을 경험한 사이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키아아아악!
분노로 가득찬 고대 마수의 포효가 대기를 진동시키고, 사이먼은 다시 고개를 하늘로 올려다보았다.
아까 전까지 상위 자릿수의 마법을 영창한 사이먼 쪽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던 노스페라드는 사이먼 쪽을 응시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모조리 무력화시키는 신성한 기운을 방출시켜 성역으로 만들어버린 누군가를 바라보는 노스페라드의 표정은 단 한 평생 만나보지 못한 자신의 천적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연출하여 이곳의 인간들을 모조리 병사시켜버릴 예정이었던 자신의 계획을 단 한 순간에 백지로 만들어버린 원흉이 증오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노스페라드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긴 사이먼은 하늘 위에 떠있는 순백의 날개를 가진 천사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사?”
“성공했군.”
리오드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꺼내고는 천사의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엘레노아를 응시했다.
본래라면 이 자리에서 곧바로 퇴각을 지시하며 질병에 감염되기 시작한 병력을 물리고, 엘레노아가 강신을 발동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엘레노아가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아예 넣지도 않았다.
은현이 확실하게 보장을 했기 때문이다.
엘레노아는 이번 싸움에서 혹시 모를 흡혈귀의 왕, 노스페라드와의 교전을 염두해두고 은현이 보내준 ‘승리패’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하나라도 강신에 실패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처음부터 염두해두지 않았다.
“후우….”
천만의 다행으로 엘레노아 쪽에서 먼저 노스페라드의 등장을 눈치채고 급하게 강신을 발동시켜준 것으로, 많은 기사와 마법사가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것만은 막아낼 수 있었던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리오드의 그 모습을 본 사이먼은 물었다.
“…자네는 엘레노아 아르미타스가 이번 싸움에서 저 마수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확신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해줄 것이라는 것은 믿고 있었습니다.”
리오드도 엘레노아가 순백의 날개를 펼쳐 이 일대를 모조리 정화시켜주고 많은 사람의 상처를 회복시켜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하늘에 떠 있는 엘레노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성의 기운은 아니에스가 강신을 하여 황금 사자를 소환했을 때와 비슷한 기운이다.
결국, 그녀가 아니에스와 같은 경지에 올라왔다고, 리오드는 추측했다.
“…어떻게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거지?”
사이먼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신도 없이 그런 것을 믿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리오드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은현이 보내준 사람이니까요. 그 판단을 내린 은현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 남자는 정말로 대단하군.”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대륙의 여섯 영웅 중 한 명이 이토록 무조건적인 굳건한 신용을 보이고 있는 남자는 도대체 어떤 남자일까.
사이먼은 은현과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적은커녕 대면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곳에서 들려왔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아주 많다.
수은의 뱀.
마녀의 남자.
공작 가문의 데릴 사위.
초신성 금위계 모험가인 에린의 스승.
게다가 자신이 알고 있기로, 흑마법사로 타락해버린 엘빈을 인공 정령의 형태의 자아를 가진 살아있는 마법을 만들어낸 신비로운 남자.
“그럴 가치가 있는 남자입니다.”
본인은 대외적으로 매겨지는 자신의 값어치를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면서 그 가치를 드높이는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일리아나를 비롯해서, 리오드나 제라드, 아니에스, 앨리스 등 영웅들 모두가 그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
“그보다 서둘러야겠습니다. 기껏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움직여야겠죠.”
“…그렇지.”
아니에스의 강신을 알고 있는 리오드는 당연히 강신이라는 능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엘레노아의 치천사의 날개 또한 효과는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이지만, 그만큼 그녀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적지 않으리라.
지금 펼쳐진 천재일우의 기적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전황은 동등 또는 이쪽이 유리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
이 기세를 몰아 눈앞의 저 거대한 박쥐 마수를 처치해야한다는 것에는 사이먼 또한 동의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나?”
“그러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리오드의 설명을 들은 사이먼은 인상을 굳혔다.
“힘든…주문이로군.”
“힘드시다면 다른 방법을….”
“자네가 그런 부탁을 해왔다는 건, 분명 그 마녀는 그 방식을 부담 없이 실행시킬 능력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
리오드는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일리아나보다 한수 뒤쳐진다는 평가를 받아들이고는 있었지만,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한계를 맞이한 사이먼이라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사이먼에게는 많은 시간을 공들여 키워낸 몇 백명들의 마법사들이 다수 존재했다.
아무리 왕국의 비리가 들춰지면서 크라시르 기사단처럼 많은 마법사가 퇴출을 당했다지만, 자신의 메이거스 마법사단은 한평생을 바쳐 일궈내온 자신의 자랑이다.
개인 대 개인이라면 일리아나에게 뒤쳐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메이거스 궁정 마법사단이라는 다수의 전력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합친다면 일리아나라는 개인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해보세.”
사이먼은 굳은 얼굴로 리오드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이 한평생을 바쳐 노력한 결과를 확인해볼 순간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일리아나는 마법사로서 정점에 속해 있는 존재이며, 같은 고위 자릿수의 마법사라고 할지라도 사이먼의 목표이자 동경의 대상.
나이와 사회적 지위, 명예 따위는 필요없다.
사이먼 또한 또 한 명의 마법사이자, 일리아나와 사이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순수한 마법사로서의 성취 뿐이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높은 성취를 이뤄낸 일리아나에 대한 존경심과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혼자서 따라잡을 수 없다면, 다수를 키워 그녀를 따라잡자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자신의 위업이며 탄생한 메이거스 마법사단은 자신의 20년 인생이 녹아든 자신의 자랑이다.
자신과 자신이 키워낸 200명의 마법사가 힘을 합친다면, 과연 일리아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마법사로서의 인생을 모두 바쳐 일구어낸 자신의 성과는 과연 마녀의 발끝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지.
그것을 확인을 해보고 싶다.
“알겠습니다.”
사이먼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리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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