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16화 (399/730)

〈 416화 〉 416. 하프 엘프 소녀(1)

* * *

“크아아!”

30번을 넘어가면서 제대로 세는 것조차 포기한 릴리는 절망과 비명이 가득한 꿈의 세계 속에 흡혈귀들을 던져두고, 꿈의 세계에서 나와 현실로 복귀했다.

“끄…으으!”

입에 거품을 물고 흰자위를 드러내며 쓰러진 바닥 위에서 경기를 일으키는 흡혈귀들의 모습은 꿈속에서 얼마나 처참한 꿈을 꾸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흡혈귀들보다 아무리 압도적인 종족의 차이라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한 릴리가 흡혈귀들의 재생력을 뚫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악마가 되어버린 지금의 모습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

그들에게 결정적인 일격으로 마무리를 해줄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지인들 중에서는 엘빈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빨리 와주지 않으려나.”

어차피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자신의 눈앞에 쓰러져 있는 흡혈귀들 모두가 태양에 불타 가루가 되어버린다는 결말도 생각해두었다.

하지만 그 아침을 기다리다가, 하루를 시작하는 영지민들에게 악마인 자신의 모습을 들킬 위험 또한 존재한다.

무엇보다 릴리는 이 흡혈귀들을 당장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제가 데려올까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여린 소녀의 목소리에 릴리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금발의 고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소녀는 외관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지금은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뾰족하고 기다린 귀를 마법으로 변형시키고 있지만, 그녀의 진짜 모습은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 소녀다.

“…에리스?”

릴리는 보육원의 건물 입구 앞에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하프 엘프 소녀를 발견하여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잤니?”

“네.”

놀란 표정을 짓는 릴리를 보며 에리스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급히 날개와 꼬리를 거두어들이며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릴리는 그럴 수 없었다.

“아….”

지금 서큐버스의 모습을 풀고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린다면, 현재 여덟 개체의 흡혈귀들의 정신을 가두고 있는 꿈의 세계의 효력도 풀려 버린다.

‘어쩌지…?’

그렇게 릴리가 딜레마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릴리를 도운 것은 다름 아닌 에리스다.

“괜찮아요. 언니.”

“어…?”

“언니의 모습,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게요.”

“어….”

미소지으며 천천히 자신에게 걸어오는 하프 엘프 소녀의 모습을 본 릴리는 또 한 번 적잖게 당황했다.

지금 나이 어린 하프 엘프 소녀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릴리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배려해주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나이에 걸맞지 않는 총명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던 신비한 에리스의 행동은 기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소녀가 품을 수 없는 아주 맑고 깊은 눈은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릴리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에리스는…내가 무섭지 않니?”

은현에 의해서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릴리의 본질은 악마다.

허리의 한 쌍의 악마 날개와 꼬리를 달고 있는 악마는 인간은 물론 엘프들에게도 숙청과 경계의 대상일 터인데,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는 릴리를 두고도, 바닥에 쓰러져 흰자위를 드러내고 경기를 일으키고 있는 흡혈귀의 무리를 보고도, 에리스는 두려운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니요? 왜요?”

에리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정말로 의미를 모르겠다는, 순수하게 의문을 표하는 하프 엘프의 소녀의 얼굴은 도리어 악마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게…. 나는 악마인데…?”

“언니는 나쁜 악마가 아니잖아요.”

“그, 그렇지…?”

하지만 릴리는 자신의 몸이 악마로 변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결하고 싶을 정도로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은현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존재할 수 없었다.

“저는 언니가 전혀 무섭지 않아요.”

“고, 고마워….”

그렇기에 은현과 자신을 비롯한 아내들 이외에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직구로 긍정해준다는 것이 릴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릴리는 기쁜 미소를 보이며 에리스의 마음에 화답했다.

“그런데 왜 나왔니? 이런 새벽 시간에?”

“엘빈 오빠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하지만 엘빈은….”

지금 엘빈은 아르미타스령 내부에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흡혈귀들과 인간 협력자를 찾아다니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고 있다.

“괜찮아요. 언니. 제가 엘빈 오빠를 데려올게요.”

“그, 그건 안 돼. 이 시간에 바깥을 혼자 가겠다는 건 위험해.”

릴리는 보육원을 나가려는 에리스의 어깨를 붙잡아 하프 엘프 소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현재 영지의 내부는 알렉스의 지휘 아래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순찰이 강화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흡혈귀의 위협에서 완전히 안전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나이 어린 소녀가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언니.”

에리스는 담담히 릴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윽고 에리스의 주위에 서늘한 선풍이 불기 시작하여 녹색의 빛들이 하프 엘프 소녀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저는 혼자가 아니거든요.”

“아….”

다른 사람들이라면 에리스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서늘한 바람과 녹색의 빛이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력의 흐름에 민감한 서큐버스의 두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키득거리고, 재잘거리며 깔깔거리고는, 날갯짓으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아주 작은 녹색의 요정들.

“이게…정령?”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엘빈이라는 존재 이외에 정령의 존재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릴리는 녹색 빛을 발하는 작은 정령들이 에리스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광경에 아름답다는 생각을 품으며 감탄했다.

“저는 가야 해요. 지금 엘빈 오빠한테는 제가 필요하거든요.”

“…….”

멀리 떨어져 있는 에리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엘빈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하프 엘프 소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올곧은 눈으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에리스의 얼굴을 본 릴리는 안 된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릴리 본인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애초에 현재 던전 주택의 별채에서 두 눈을 수술하여 요양중인 어머니, 앨리스에 곁에 있어야 할 에리스가 느닷없이 던전을 나와 보육원에서 하룻밤을 지내겠다고 강력하게 의사를 표시한 것부터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릴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 상황과 이 타이밍에 에리스가 엘빈을 찾으러 가겠다고 나선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후우….”

이해할 수 없는 것, 확신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나이 어린 하프 엘프 소녀를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조금만 기다려.”

릴리는 보육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작은 상자 하나를 가져와 에리스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이게 뭐에요?”

“공작 가문에서 받은 휴대용 종이야.”

상자를 개봉하여 상자 속에 밀폐되어 있던 종을 꺼내 에리스에게 보여주고는 설명을 개시했다.

“위험해지면 꼭 이 종을 세게 흔들어. 순찰을 돌고 있는 기사님들이나 병사분들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아하!”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반색하고는 릴리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언니!”

“꼭이야? 무슨 일이 생기면 데르킨님이나 앨리스님을 뵐 낯이 없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허락하기는 했다지만 나이 어린 소녀를 혼자 보낸다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았는지, 릴리는 두 번 세 번을 재차 강조했다.

“네. 명심할게요.”

에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홀로 보육원을 나섰다.

보육원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진 길가 위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폈다.

이윽고 릴리가 준 상자 속의 종을 꺼내들어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딸랑 딸랑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길가를 타고 전역으로 퍼져나가 에리스의 위치를 알렸다.

“누구냐!”

종소리를 듣고 에리스가 있는 길가로 황급히 뛰어온 목소리의 주인은 갑옷을 착용한 기사였다.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인장이 박혀있는 검을 허리춤에 착용하고 있는 그들은 현재 영지의 내부를 순찰하고 있은 기사들이었다.

“…어린 애?”

에리스를 발견한 기사 두명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 종은…!?”

이내 에리스가 흔들어 소리를 내었던 종소리의 손잡이 부분에 자신들이 사용하는 검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종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어째서 이런 나이 어린 소녀가 공작 가문의 인장이 박혀 있는 종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안녕하세요.”

“…음?”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인 에리스의 예의 바른 인사를 받은 기사들은 적잖게 당황했다.

“꼬마야. 그 종 어디서 났니?”

“이거요? 은현 아저씨한테서 받았어요!”

“…….”

에리스의 대답에 기사들의 경직된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경위는 어찌 되었건 은현의 이름을 댄 이상, 공작가문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종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녀는 기사들의 머릿속에서 최우선의 호위 대상으로 격상이 되었다.

게다가 여러 의미로 공작 가문 내부에서 위상만큼이나 악명도 높은 은현을 ‘아저씨’라고 친숙하게 부를 수 있는 소녀라니.

절대로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곧바로 저택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가씨.”

꼬마라고 부르며 묻던 기사들의 대우가 극존칭으로 바뀌고 정중해질 정도로, 그 효과는 굉장했다.

공작 가문의 종은 사실 릴리에서 받은 것이었지만,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 말하는 에리스는 이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은현의 영향력이 얼마나 미치고 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영악함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요.”

하지만 에리스는 싱긋 웃으며 기사들의 정중한 배려를 거절했다.

“저는 가야 할 곳이 있거든요.”

“…가야 할 곳…입니까?”

엘빈을 찾으러 가는 길에 종소리를 흔들어, 순찰을 돌던 기사들이 자신에게 오도록 유도한 이유는 자신이 혼자서 엘빈을 찾아간다면.

엘빈에게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나 흡혈귀들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장소를 밤중에 혼자 돌아다녔다고 틀림없이 꾸지람을 듣기 때문이다.

에리스는 밝은 미소를 유지한 채 기사들에게 말했다.

“기사님들. 안 바쁘시면 저 좀 그곳으로 데려다 주시면 안될까요?”

“…….”

기사들은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눈앞의 소녀는 은현과 엘레노아와 연결고리가 있는 관계자.

하지만 자신들의 임무는 영지 내부의 순찰을 통해서 흡혈귀의 존재를 수색하는 것이다.

정황상 순찰 임무 쪽을 우선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신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소녀의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대답하기를 망설이자, 에리스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 임무는 걱정하지 마세요. 기사님들의 임무와 관계된 일이니까요.”

“……!”

덧붙이는 에리스의 말은 기사들을 흠칫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진데, 이 소녀는 도대체 어떻게 자신들의 순찰 임무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당황하며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짓으로 의사를 주고받고는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르겠습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기사님들!”

에리스는 기사들의 승낙에 그들의 손을 한 짝씩 붙잡아 흔드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아, 귀엽네.’

어린 소녀의 미소를 접한 기사 들이 자신도 모르게 순찰 중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이 반려를 맞이하여 아내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이런 딸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리스의 미소는 눈이 부셨다.

“그러면 저를 따라오세요!”

에리스는 앞장을 서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던 녹안이 밝게 빛나면서 에리스 만의 비밀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에리스 고유능력]

[천리안(???)]

“위, 위험합니다! 앞장은 제가 서겠습니다. 장소를 말씀해주세요!”

“글레오르 폐창고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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