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13화 (396/730)

〈 413화 〉 413. 천적(1)

* * *

“내가….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 애초에 이곳도 너희와 왕국의 병력을 유도한 게 내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

제라드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은현이나 차한성이 생각했던 것처럼, 제라드 또한 흡혈귀들이 이곳으로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노리고 있던 건…. 이곳이 아니었던 거군.”

“정답이다.”

왕국에서 가장 강한 전력인 리오드가 없는 지금,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해진 장소로 떠오른 곳은 왕국 안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보유하고 있는 페르닌의 존재다.

“설마 페르닌을…!”

“아니. 페르닌보다 더욱 성가셔 질 수도 있는 곳이지.”

이번 흡혈귀 소탕 작전에 참여한 것은 리오드가 이끄는 아르티아 기사단뿐만이 아니다.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기사들 또한 지원으로 참여하게 된 지금, 상대적으로 방어 병력이 약해진 장소는 아르미타스 공작령 또한 마찬가지.

레이넌은 페르니아스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보다, 아르미타스 공작령이 더욱 위험한 장소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이 린데발트령으로 은현을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아르미타스령의 병력을 분산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아르미타스령에도 흡혈귀를 잠입시켜두었으니, 지금쯤 습격을 시작했을 거다.”

아르미타스령에는 제법 강력한 모험가들도 존재했지만, 그들의 존재들을 능숙하게 피해내면서 약자를 짓밟으며 혼란을 일으키고 최종적으로는.

“저 고대 마수라는 것을 소환해 내기만 한다면, 그곳도 피해를 보는 건 피할 수 없어.”

레이넌은 손가락으로 허공에서 날갯짓을 하는 커다란 박쥐를 가리켰다.

애초에 소모성으로 잠입시켜둔 흡혈귀의 무리다.

그들이 아르미타스의 영민들을 습격하면서 공작 가문의 기사들과 모험가들에게 잡혀 죽든 말든 이후의 생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아르미타스령에 혼란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하.”

레이넌의 진짜 노림수를 알아차린 제라드는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정말로 별것이 아니라는, 안도하는듯한 웃음이다.

“뭐가 우습지?”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라고?”

갑작스러운 자신의 등장과 자신과 리오드를 포함한 모든 병력이 유도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와 초조, 동요로 가득했던 제라드가 순식간에 안도를 느끼며 냉정함을 찾아갔다.

그것을 본 레이넌은 자신의 계획 중 무언가가 틀어지기 시작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흡혈귀라는 놈들이 페르닌으로 향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현재 페르닌의 내부상황은 정말로 겉보기에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내부 국정은 혼란 그 자체다.

왕국 소속도 아닌 자신이 리오드나 은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인데도 심각성을 느꼈을 정도니까.

“오히려 아르미타스령을 습격했다는 것에 정말로 감사하다고 느낄 정도야.”

레이넌의 그 판단은 어찌 보면 옳았다.

한 나라의 수도 침략과 점령은 이종족인 흡혈귀들의 도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리오드라는 왕국 최강의 기사와 그가 이끄는 기사단의 단원들 절반 이상이 부재한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레이넌이 렌디르 왕국의 수도를 공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카드는 바로 사령술사 마리우스의 끝없는 인해전술과 왕국 내부의 각 영지에 심어두었던 부하들의 동시다발적인 반란으로 큰 혼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레이넌이 노린 것은 상대적으로 수도인 페르닌보다 규모는 작을지언정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언젠가는 페르닌보다 공략하기 더욱 힘들어질 수도 있는 아르미타스령을 먼저 치는 것이었다.

“끝까지 정보 수집을 하지 않았구나.”

그것도 최신 정보가 아니며, 이미 아르미타스령은 페르닌의 규모를 따라잡다 못해 추월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아주 작은 변수.

“너라면 모를까. 그 흡혈귀라는 것들만으로는 그 영지를 혼란에 빠뜨리지 못해.”

제라드는 강력하게 자신했다.

이윽고 자신의 단검을 꺼내어 레이넌을 향해 전투의 태세를 취했다.

우우웅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제라드의 마력을 피부로 느끼면서 레이넌은 밤하늘 위에 등장한 거대한 박쥐형 고대 마수를 응시했다.

“저 박쥐는 내버려 둘 셈인가?”

“아니. 리오드 형님과 기사들, 그리고 에린양이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그 여성분은 이래 뵈도 현이 형님의 제자거든.”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은현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에린은 오늘도 열심히 최전선에서 싸우며 활약하고 있었다.

“요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막기만 한다면 상황은 바로 역전이 된다는 거야.”

“네가? 나를?”

레이넌은 피식 웃어보이며 제라드를 비아냥거렸다.

“20년 전에도, 한 번도 나의 피부를 뚫지 못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거야. 너의 그 방어력을 뚫으려면 나도 진심으로 너를 죽이기 위해 싸움에 임해야 하니까.”

짙은 살기를 흩뿌리며, 오로지 적의 배제만을 생각하고 있는 제라드의 눈빛은 적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생각하는 사나운 야수의 눈과도 같았다.

제라드의 시선은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푸른색의 불꽃으로 불태워지고 있는 레이넌의 어깻죽지를 응시했다.

에린이 여우불로 붙여놓은 것으로 보이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꽃은 레이넌의 어깻죽지 상처를 계속 지지며 그의 목숨을 좀먹고 있었다.

어째서 레이넌이 계속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심히 마음에 걸렸지만 제라드는 레이넌의 몸에 에린이 만들어놓은 상처를 유심히 관찰하며 그에게 돌진했다.

카아앙!

권갑과 단검의 충돌로, 영웅과 영웅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 ◆ ◆

해가 지고 모두가 잠드는 새벽 시간대의 길가는 매우 조용했다.

그 넓디넓은 길을 혼자서 걷는 기분은 마치 이 길거리 자체를 자신이 모두 전세를 낸 것 같은 사치스러운 감각이다.

그런 감각을 느끼며 엘빈은 혼자서 길가를 걷고 있었음에도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기척을 숨기고 마치 그림자 속에 녹아드는 것처럼 은밀하게 행동하는 방식은 자연의 수풀 속에서 먹잇감을 사냥하는 엘프들의 보법과도 비슷했다.

이윽고 엘빈은 혼자서 영지 내부에 있는 어떤 폐창고의 앞에 도착했다.

“…….”

물끄러미 창고의 문을 응시하고는 망설임 없이 폐창고의 내부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은현의 충고를 떠올렸다.

­뱀파이어는 낮에는 활동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 그러므로 행동을 벌인다면 무조건 밤의 시간대일 수밖에 없지.

­아마도 인간 쪽의 협력자가 있을 거야. 아르미타스령에서도 흡혈귀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거주하고 있는 모험가들의 숙소가 밀집된 지역이나 병사들의 순찰 루트 등을 사전 조사하고 그 포인트를 피해서, 민간인들을 사냥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선별하는 건 밤낮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니까.

­잠입해서 숨어 있을 곳으로 확률이 높은 장소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인적이 드문 장소야.

엘빈은 에린과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이 지원으로 영지 밖을 나간 이후로, 아르미타스의 기사들과는 다른 루트로 개별적인 조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정규로 편성된 병사들의 순찰 루트에서 제외된 장소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색하는 임무는 다행히도 엘빈에게는 최적의 임무였다.

엘빈은 수면 부족으로 피로를 느끼지도 않고, 식사를 통해서 열량을 공급받을 필요도 없다.

개인의 기호로 수면이나 식사를 하는 때는 있어도 어디까지나 기호일 뿐, 필수는 아니다.

계약자인 은현에게서 동력원인 마력을 지속해서 공급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인공 정령이자 호문쿨루스의 가짜 육체를 부여받은 엘빈은 쉬지 않고 무한으로 움직이는 경주마와도 같다.

“드디어 왔나?”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폐창고 내부로 진입한 엘빈을 맞이한 것은 가볍고 경박한 남자의 목소리다.

창고 내부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창틀 속의 달빛이 비치는 앞쪽으로 걸어 나온 남자는 엘빈의 모습을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너는?”

“…….”

엘빈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다물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이빨을 꽉 깨물고 있다는 표현이 옳다.

그야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얼굴은 엘빈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이전 모그라프령의 마수 대범람 사태 때, 마수 전선에서 근 1년 만에 재회했었던 철없는 여동생과 트러블이 있었던 그 기사의 얼굴을.

게다가 그보다 더 1년 전,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정령으로 부활하기 이전에 자신의 여동생을 강간하려 했었던 남자다.

“빌라드…오르바.”

엘빈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이를 갈았다.

“…나를 알아?”

“작위와 지위, 모든 걸 잃고 왕국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은현이 깔아둔 판에 농락을 당하여, 귀족의 작위와 모든 명예를 몰수당한 것도 모자라, 집안의 전 재산을 도둑맞고 부랑자의 신세를 전전하고 있다고 들었다.

“너. 누구냐고.”

빌라드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엘빈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엘빈은 빌라드의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 그림자 갑주를 착용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빌라드는 엘빈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모그라프령에서 아이테르의 학생 시절부터 엮였던 에린과 빌라드의 악연에 관한 이야기를 은현에게 들었을 때.

엘빈은 당장이라도 빌라드를 수십 개의 그림자로 관통시켜 찢어버리고 싶었던 것을 꾹 참아야만 했었다.

­그건 네 일이 아니야. 에린이 해야 할 일이지.

은현이 그렇게 말하며 엘빈의 행동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영혼을 이은 충성의 서약을 맺어 자신의 주인이 된 은현의 명령을 엘빈은 거부하지 못했다.

정령이 되면서 온화했던 자신의 마음을 부추기고, 억눌렀던 살인 충동을 새빨갛게 불태우는 스위치는 언제나 에린을 비롯한 자신의 주위 사람의 위험이다.

엘빈은 끓어오르는 마음 속의 감정을 억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린 헤르샤. 그 아이를 기억하나?”

익숙한 여성의 이름을 들은 빌라드의 건들거리던 태도가 우뚝 멈춰 섰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던 이름이었으니까.

그는 현재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꼬여버린 원인이 모두 에린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 하하.”

빌라드는 웃었다.

그의 표정은 반가움, 기쁨,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잊을 수가 없지! 그 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이곳에 찾아온 거니까!”

“…….”

“내 인생을! 우리 집안을! 그렇게 풍비박산을 만들어놓고 그년은 뭐? 금위계 모험가? 2년 만에?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줄을 잘 잡아서! 스승을 잘 만나서! 겨우 남자 하나를 잘 만나서! 그래서 성공한 인생을 달리고 있는 그 망할 년을 꼭 내 손으로 무릎 꿇리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웃음을 지었던 그의 입은 이내 분노로 물들어서 갔고, 이를 갈기 시작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천한 피를 가졌던 평민 주제에! 아이테르에서도 바닥을 기어 다니던 미천한 년이 갑자기 나를 추월해서 2년 만에 금위계의 모험가 등급을 달았다고? 웃기지 마! 그래봤자 그 칭호와 명예도 공작 가문과 스승이라는 그 뱀 같은 자식에게 이쁨을 받으면서 허울뿐인 칭호일 게 틀림없어!”

“…….”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쓰레기 같은 남자는 어째서 이렇게 자신의 여동생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열등감? 분노? 화풀이?

그 다양한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점점 더 나락으로 치닫는 남자를 눈앞에 둔 엘빈은 결국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싶은 인간이다.

“너는 그 년의 동료인가, 뭔가인가?”

“…나는 에린의 오빠다.”

엘빈은 자신의 주먹을 꽉 쥐고 평생의 원수를 바라보는듯한 죽일듯한 시선으로 빌라드를 노려보았다.

여동생이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서 쌓아 올린 노력과 시간을 통해서 거머쥔 것이 바로 금위계라는 모험가 등급이다.

지금 눈앞의 쓰레기는 그저 애인인 남자에게 아양을 떨어 받은 허울뿐인 호칭이라고 단정했다.

그것은 여동생인 에린의 지금까지의 고생과 모든 노력을 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제나 못생겼다고 못된 심술을 부리고, 투덕거리는 것이 일상이지만, 에린은 틀림없는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이다.

동생의 모욕을 얼굴 앞에서 듣고도 가만히 있을 오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엘빈은 은현의 말에 대해 떠올렸다.

­인간 협력자에 대한 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단, 정보는 확실하게 캐네. 그다음에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

충성의 서약을 맹세한 자신의 주인은 이번 사건에 한해서 인간에 대한 처분을 엘빈에게 일임했다.

그것은 곧 죽여도 좋다는 뜻.

“정말로 고맙다.”

엘빈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 감사는 자신에게 살인의 허가를 내려준 은현에게 보내는 감사의 의미만이 아니었다.

에린의 앞이 아니라, 자신의 앞에 나타나 준 빌라드 오르바에게 보내는 감사의 의미이기도 했다.

엘빈은 결심을 마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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