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412화 (395/730)

〈 412화 〉 412. 영웅과 영웅의 제자(3)

* * *

카아앙!

에린의 레이피어와 레이넌의 권갑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마력의 폭풍이 주위를 휩쓸며 먼지 바람을 일으켰다.

어두운 밤하늘 속에서 먼지로 뒤덮여 시야가 방해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은현과 자신의 관계를 부정하면서, 자신을 무시했던 레이넌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올라 냅다 돌진하기는 했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돌진한 것은 또 아니다.

‘괜찮아. 제대로 대처할 수 있어.’

전력 차가 명확함에도 에린이 레이넌과 치열한 공방전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에린이 미숙하더라도 은현처럼 ‘찰나’를 다루는 방법을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었고, 레이넌이 진심을 발휘하지 않고 있었으며, 둘 사이 막대한 마력의 격차를 신수의 힘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좋은 밸런스군.’

아주 짧은 몇 초 동안 몇십 번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면서 레이넌은 에린을 평가했다.

기초는 탄탄하고, 강한 전투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금위계의 모험가들도 자신의 공격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을 진데, 눈앞의 여성은 차근차근 자신의 공격을 대처해내고 반격을 해오고 있었다.

힘의 차이는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꺾이지 않았던 유연한 대처로 공수 일체를 보여주었던 은현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이다.

‘제자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던 건가.’

에린의 목표는 레이넌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리오드와 제라드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레이넌 또한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지원이 올 동안 시간을 벌어두려는 에린의 속셈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흥의 목적으로 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저 싸움이 지속하는 것은 레이넌이 바라는 전개가 아니었다.

더, 더욱더 많은 에린의 힘을 확인해보기 위해 레이넌은 에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퍼억.

“끄…윽!”

처음의 마력을 담아낸 강력한 기술은 아니었지만, 권갑을 착용한 레이넌의 주먹은 에린의 복부에 직격했다.

복부의 내장이 충격을 받아 짓눌리는 격통은 에린의 몸을 주춤하게 만들기 충분했지만, 에린은 쓰러지지 않았다.

입을 꽉 깨물고 표독스러운 눈동자로 레이넌을 올려다보고 있는 에린의 눈은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호오.”

나이나 성별에 어울리지 않게, 꽤 근성도 있다.

거기다 자신의 복부를 강타한 레이넌의 주먹을 한쪽 팔로 휘감아 고정하고는 레이피어를 휘둘러 레이넌의 어깨를 찔러 넣었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자신의 팔을 베어내는 것을 실패했던, 검으로 자신의 피부를 뚫기엔 공격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미 파악된 사실이다.

레이넌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소용없….”

[호족 요술(?? ??)]

[여우불]

은백색의 아홉 꼬리에서 일렁거리던 푸른 색의 불꽃들이 에린의 전신을 타고 손으로 응집되기 시작하여, 그녀가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휘감았다.

푸욱

자신의 어깨를 관통하는 레이피어를 본 레이넌은 감탄했다.

자신의 신체 강화를 뚫을 정도의 밀도 높은 마력을 연마한 사람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인재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이제 막 성인이 된 것으로 보인 여성이 그러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은 같은 무(?)를 연마하는 무인(?人)으로서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이윽고 레이넌의 어깨를 관통한 레이피어에서 피어오르는 푸른색의 불꽃이 더욱 번지며 그의 어깨를 불태웠다.

레이피어를 위로 들어 올려, 레이넌의 어깻죽지를 세로로 베어낸 에린은 자신의 검을 회수하며 몸을 뒤로 뺐다.

레이넌과의 거리를 벌리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

에린의 레이피어가 회수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어깨 부근을 불태우고 있는 푸른색의 불꽃을 응시한 레이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과연…. 인정하지.”

“뭐라고요…?”

“이 정체 모를 힘은 그 녀석의 것은 아니지만, 그 움직임과 기술들은 틀림없이 그 녀석의 것이 맞는 것 같군. 네가 제자라는 것을 믿어주지.”

“…당신한테 인정받아도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에린은 무덤덤하게 자신을 칭찬하는 레이넌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지?’

보통 사람이나 마수라면 어깨를 타고 몸 전체로 번지고 있는 푸른색의 불꽃에 격통을 느끼며 비명을 부르짖어야 할진대, 레이넌은 너무나도 침착했다.

“어째서?”

“흠?”

“어째서 당신은 흡혈귀들과 함께 사람을 습격하는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현이의 동료였다면서요!”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남자였으면서, 어째서 인간을 습격하는 악인들의 행동을 하는 것일까.

에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소리를 쳤을 때.

키아아악!

하늘을 울리는 거대한 무언가의 울음소리.

그 소리는 린데발트령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로 커다랬다.

얼마나 커다랬는지, 순간 소리를 들은 에린의 등이 오싹해져 간담이 서늘해졌을 정도다.

“저, 저게 뭐야…?”

멍하니 고개를 올려다본 에린은 얼굴을 굳혔다.

하늘 위를 뒤덮는 거대한 날개가 한번 펄럭일 때마다 바람이 일고, 린데발트령을 휩쓴다.

그 날개를 펄럭이는 검은색의 생물체는 꼭 어떠한 것을 연상시키는 비주얼이다.

“…박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마수는 등장부터 시작해서 그 위압감에 오싹함을 느껴야만 했다.

“나타났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무래도 레이넌과 흡혈귀들 쪽의 소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게…. 저게 뭐예요! 저 마수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상황의 급박함을 전해 듣고 급하게 달려온 한 남자가 레이넌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 목소리는….”

20년 전에 지겹게 들었던 옛 동료의 목소리에, 레이넌이 에린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제라드님….”

“제라드?”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그리운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료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경박하고 가벼운 태도의 목소리가 아닌, 분노가 깔린 호통이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레이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화를 내는 제라드의 모습은 에린이 지금껏 보아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처음 보는 광경이다.

언성을 높인 제라드의 외침에 에린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떨었다.

‘지, 진짜로 화나셨나 봐….’

과거에는 함께 등을 맞대며 목숨을 맡기고 전쟁을 했었던 옛 동료가, 이제는 적으로 돌아서서 많은 사람을 위협한다는 것에 제라드는 분노하고 있었다.

실제로 제라드의 가슴 속에는 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 감정들을 모조리 표출하기 전에, 가슴 속에 꾹 눌러 담은 뒤로 제라드는 입을 열었다.

“…에린 양.”

“네. 네…?”

“바로 리오드 형님 쪽으로 가주세요.”

“하지만….”

제라드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손가락으로 허공의 거대한 박쥐 마수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쪽의 대응이 더 급해 보이니까요.”

“아….”

에린은 작게 탄식했다.

곧바로 제라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옛 영웅보다, 허공에 떠 있는 마수가 더 위험해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에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제라드님.”

“에린 양도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에린이 물러가자, 제라드는 다시 레이넌을 노려보았다.

“현이 형님이 생각이 맞았어….”

­제라드. 린데발트령에 흡혈귀들이 둥지를 틀게 된 계기가 흡혈귀들만의 생각으로 생겼을 리 없어. 틀림없이 인간들 사이에 정보제공자와 협력자가 있겠지.

­최근에 흑랑단을 통해서 렌디르 왕국이 멸망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어. 대륙 전체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그냥 근거 없는 예감뿐인 추측이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렌디르 왕국의 멸망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리오드에게는 이런 정보 수집의 부탁을 맡기기엔 부담이 너무 커. 네가 리오드를 백업해주면서 이쪽의 정보들에 대해 수집을 해줬으면 해.

은현의 추측과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주범이 레이넌이라는 것까지는 예측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직감으로 제라드를 보낸 것은 현재로서는 최적의 수였다.

“렌디르 왕국…. 네 짓이지?”

“그래. 내가 부숴버렸지.”

레이넌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한 짓을 긍정했다.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해.”

“복잡할 것도 없지. 그 나라가 싫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어째서냐고!”

제라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언성을 높였다.

“어째서…. 네가…. 네가 이런 짓들을 벌이고 있냐고!”

근 15년을 가까이 종적을 감추면서 행적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더니, 느닷없이 일국을 멸망시키지를 않나, 흡혈귀들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여 민간인들을 습격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거기다 허공에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딱 보기에도 강력한 마수를 소환시키기까지.

레이넌이 지금까지 해왔던, 지금 하는 모든 행동은 자신과 은현, 그때의 동료들이 힘들게 전쟁을 끝내며 이룩한 평화를 다시 부수려 하고 있다.

“그러니까 말했을 텐데. 이 대륙이 싫다. 그러니까 부술 생각이야.”

“뭐…? 현이 형님은 그때 목숨까지 걸었었는데!”

아니, 은현뿐만이 아니다.

그의 희생은 확실히 남겨진 동료들의 가슴 속에 큰 가시로 박혀 절대로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그 싸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들은 자신들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전쟁 속에서 죽어간 목숨의 수는 헤아릴 수도조차 없다.

“제라드. 나는 깨달았을 뿐이야. 우리가 지킨 이 대륙이 사실은 전쟁과 혼란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사실은 굉장히 추악하고 더러웠다는 것을.”

힘도 없고, 무력도 없는 주제에,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혈통과 집안의 역사와 재력뿐이었던 주제에.

사람들을 해치고 목숨을 빼앗았던 악을 처치하자,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쥐어 짜내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바쁜 또 다른 악이다.

그런 놈들이 조직의 우두머리로, 나라의 통치자로, 세계의 지배자로 존재하는 한, 이 대륙 자체에는 미래가 없다.

“내가, 우리가, 그 녀석이 지키려고 했던 세상은 이토록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힘과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을 배신하고 가족을 앗아갔던 왕국이 너무나도 미웠다.

그래서 죽음의 끝에서 악마의 속삭임에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넘기고 복수를 결심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간 렌디르 왕국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고 미웠다.”

그래서 부숴버렸다.

“그리고 혼자가 되어 매 순간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하하 호호 웃고 떠들며 평화로운 일상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세상이 너무나도 밉다.”

그러므로 부숴버릴 예정이다.

차라리 이렇게 지키고 발전시켜 나갈 가치가 없는 대륙이라면, 아예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

제라드는 레이넌의 증오심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눈빛을 마주하며, 자신의 단검을 꽉 쥐었다.

그의 마음은, 인성은 이미 진즉에 망가져 버렸다.

어떤 경험을 하였고 어떤 시간을 보내어 지금까지 도달했는지, 도저히 가늠되지 않아, 이빨을 꽉 깨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눈앞에 있는 레이넌은 생사를 함께하며 싸워왔던 전우가 아니라, 대륙의 혼란을 일으키려는, 자신의 적일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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