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화 〉 411. 영웅과 영웅의 제자(2)
* * *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인식한 에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났다.’
눈앞의 주먹은 0.01초마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근접해오고 있는데, 자신의 몸은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의 정신은 멀쩡한데, 자신의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저 주먹에 직격을 한다면 허공을 찢어발기고 터뜨려버렸던 마력의 폭풍처럼,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움직여. 움직여!’
에린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추고 그 시간 속에 속박을 당한 것처럼, 자신의 몸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마등이라는 단어가 있어.
주마등?
◆ ◆ ◆
어째서일까.
하필 지금이면 자신의 스승이자, 연인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는 것은?
그 의문과 관계없이 은현의 말은 점점 에린의 뇌리에 스멀스멀 피어올라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뭔데?
음. 글쎄. 뭐라 설명해야 좋을까. 죽기 직전의 순간에, 마치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아주 신기한 경험이지.
뭐야. 그게? 죽기 직전에 느끼는 경험인데, 너는 어떻게 알아?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굳이 죽는 순간이 아니어도 그와 비슷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칼이 자신의 어깨를 관통당하는 순간, 도로 위를 달리는 마차와 부딪치려는 교통사고의 한순간, 화살이 자신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들.
명백히 눈으로, 귀로, 피부로 위험을 직감하고 머릿속에 위험신호를 끝도 없이 보내고 있음에도, 신호를 받은 몸은 현실의 시간에 속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찰나의 순간.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법한 그런 기이한 경험이다.
그리고 나 이미 한번 죽어봤으니까.
…애한테 참 좋은 거 가르친다. 그렇지?
아이야.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하 훈련장에서 에린의 훈련을 봐주고 있던 도중, 취미 삼아 관전을 하고 있던 일리아나와 하계에 현현한 베르단디가 각자 은현의 양쪽 뺨을 잡아당기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 죄송, 죄송해요.
이미 한차례 부활을 했다지만, 장난으로라도 은현이 자신의 몸을 소홀히 생각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마녀와 여신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흘겨보았다.
그렇게 꾸중을 듣는 은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에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응. 생각해보니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긴 하네.
에린도 많은 훈련과 교전을 거치면서 현실보다 주위의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훈련이 바로 그 순간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한 훈련이야.
…정말?
가장 위험한 순간 자신이 직면한 위험을 받아들이고 몸을 속박하는 시간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 제대로 대응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모험가 생활을 비롯한 앞으로의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는데?
다행히도 계속 ‘감지’를 사용하면서 사고능력은 계속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계속 주마등을 체험하면서 그 순간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도록 계속 연습해보자.
…어떻게?
조건은 조금 전에 설명해줬잖아?
피식 웃는 은현의 얼굴에서 에린은 불길함을 직감했다.
아….
이윽고 그 조건을 깨닫고 안색이 파랗게 질려갔다.
그 조건이란, 가장 위험한 순간을 직면하는 것.
그것을 의도하여 끌어내겠다는 은현이 무엇을 할지는 이미 정해진 일이다.
시작해야지?
…응.
에린은 울상을 지으면서 훈련을 시작했다.
◆ ◆ ◆
‘…진짜 짜증 나.’
어째서 그 기억이 지금, 이 순간에 떠올랐는지는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떤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훈련하기 위해 주먹을 든단 말인가.
본인은 ‘사랑의 매’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고는 하지만, 당해본 에린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불합리한 경험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게 더 싫어!’
하지만 그런데도 에린은 은현의 그 가르침을 몸으로 이해하고 실천했다.
언제 어디서나, 에린 자신을 구했던 것은 은현과의 훈련을 통해서 길러낸 이 훈련의 성과들과 목숨을 건 사투 속에서 길어낸 실전 감각들이다.
‘감지’를 통해서 자신에게 직면한 위기의 정체를 하나하나 분석하여 정보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눈앞의 남자가 내지른 철권 피해냈다.
퍼어엉!
“으…!”
주먹이 휩쓸고 지나간 왼쪽의 얼굴 바로 옆이 뒤늦게 찢어지고 터져나가는 돌풍이 들이닥쳤다.
바람이 어찌나 거셌는지, 스쳐 지나간 에린의 얼굴도 돌풍에 휩쓸려 휘청거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피했다!’
에린은 레이넌의 철권을 두 눈으로 보고 피해냈다.
1초도 안 되는 속박된 시간 속에서 눈앞의 주먹, 바람의 소리, 공기의 떨림 등을 모조리 분석하고 고개를 비트는 최저한의 행동으로 피해낸 에린의 머릿속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응축된 사고의 흐름이 연속되고 있었다.
은현의 경우에는 베르단디가 부여한 권능인 시간 가속과 사고 가속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이 ‘찰나’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지만, 에린은 미숙하긴 해도 스스로 힘으로 이 찰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은현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에린의 몸을 꽉 끌어안고 대견하다고 빙글빙글 춤을 춰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에린이 보여준 짧은 순간은 대단했다.
“…피해?”
공격을 시행했던 레이넌마저도 눈썹을 꿈틀거릴 정도로.
에린에게는 기쁨에 젖어 있을 틈 따윈 없었다.
레이넌의 주먹을 피함과 동시에, 에린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레이피어를 쥐지 않은 반대쪽의 왼손에 마력을 응축시켰다.
‘참격이 안 된다면 이거라도…!’
[주현성 극원류]
[호접발경(????)]
레이넌의 복부에 닿자마자 손바닥에 응축시킨 마력을 해방하고 거기서 발생한 강력한 충격파가 그의 복부에 직격했다.
퍼엉!
반발로 인해 허공으로 붕 떠오른 레이넌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른 그의 몸이 건물의 벽면에 처박힌 틈을 타, 에린은 신수의 마력을 개방시켰다.
푸른색의 불꽃으로 뒤덮인 그녀의 남청색 머리카락이 일렁거리며 살짝 떠오르고, 머리 위에 생겨난 한 쌍의 여우귀.
“저건….”
그리고 그녀의 허리 아래쪽 부근에 생겨난 풍성한 은백색의 아홉 꼬리는 차한성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았다.
“여우? 구미호?”
지구도 아니고, 어째서 이곳에 구미호의 존재가?
라는 의문은 에린의 구미호 상태의 모습을 처음 보며 에린의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차한성에게는 충격적인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윽고 구미호의 모습으로 변신을 완료한 에린은 아홉 개의 여우불을 만들어내어 푸른 갑옷의 기사들을 소환했다.
[호족 요술(?? ??)]
[백귀야행(???行)]
푸른색의 불꽃들이 점차 인간의 형태를 갖추어 풀 플레이트 메일의 전신 갑주를 착용한 아홉 백귀들이 등장하여, 일제히 에린을 바라보았다.
“백귀님들! 혹시 흡혈귀라는 존재들 아세요!?”
소환되자마자 떨어지는 질문에 백귀들은 서로를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처리 좀 부탁드릴게요!”
매우 뜬금없는 명령이었지만 백귀들은 적의 섬멸이라는 간단명료한 명령을 내리는 자신들 주인의 말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사라진 백귀들을 뒤로 하고, 에린은 몸을 뒤로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에이라와 차한성, 부상을 입은 기사의 상태를 살폈다.
“언니! 괜찮아요!?”
“응…. 괜찮아. 고마워. 에린.”
에린의 난입이 아니었다면, 에이라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 기사분을 사제님이 계신 쪽으로 옮겨야 하죠? 이 틈에 어서 이동하세요!”
“너는?”
“저는….”
말끝을 흐리던 에린은 얼굴을 굳히고 백귀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레이넌이 있는 장소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 사람한테 볼 일이 생겼어요.”
자신을 칭찬했던 남자는 틀림없이 은현과 리오드의 이름을 언급했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 자신의 발경을 맞았던 그는 미묘하게 동요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은현이 알려준 이 ‘호접발경’이라는 기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었던 동요다.
“서둘러서 리오드님과 제라드님을 불러주세요. 그때까지 제가 시간을 벌어볼게요.”
그 남자가 은현과 무슨 관계인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에린은 자신의 힘으로 그 괴물 같은 남자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만용은 부리지 않았다.
그만큼 그 남자와 자신 사이의 수준 차인 명확했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에린은 생각을 마쳤다.
“…알았어.”
입술을 질끈 깨물었던 에이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가자.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아버지와 제라드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해.”
에이라나 차한성이나 레이넌의 무력을 직접 보았고 자신들과 그 사이의 격차를 실감했다.
그 격차를 실감하고 이곳에 남아서 시간을 벌겠다고 다짐한 에린의 결의가 대단하고 눈이 부셨다.
“빨리 올게. 제발…. 제발 무사히 있어 줘.”
◆ ◆ ◆
에린의 발경을 맞은 레이넌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타격을 받았던 자신의 복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립군.”
힘의 세기나 기술의 완성도는 많이 차이가 났지만, 자신을 때려눕혔던 과거의 친구가 사용했던 기술과 똑같다.
전혀 타격을 입지 않고 그저 뒤로 밀려났을 뿐,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 기술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본래 뱀파이어들의 둥지인 이곳에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 그리운 친구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웬걸,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 그리운 친구가 아닌, 친구의 기술을 사용하는 여성이었다.
“무슨 관계지? 제자인가? …아니. 그 녀석의 제자라면….”
그렇게 속으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뒤늦게 나타난 여성의 모습을 발견하고 레이넌은 중얼거렸다.
“신기하군. 본래 수인이었나?”
자신의 복부를 때리고 날려 보냈던 여성은 어느새 은백색의 아홉 꼬리를 살랑거리는 여우 수인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푸른색으로 빛나는 고밀도의 마력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에린의 모습은 명백히 아까와는 전혀 다르다.
에린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레이넌을 노려보았다.
“당신…누구에요?”
“그게 중요한가?”
“나한텐 중요해요! 당신이 어떻게 현이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예요!”
“흠?”
에린이 언급한 남자의 이름을 들은 순간, 레이넌의 눈빛이 의문으로 가득해지며 고개가 갸웃거렸다.
“과거엔 동료였지.”
“도, 동료…?”
담담하게 늘어놓는 남자의 사실에 에린은 동요했다.
과거에 동료였다는 말은 은현뿐만이 아니라, 리오드나, 제라드, 일리아나와도 동료였다는 의미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지금 이런 짓을….”
“그러는 너야말로 누구지? 누군데 그 녀석의 기술을 쓰는 거냐.”
“저, 저는 현이의 제자이자…. 연인이에요!”
“제자이자, 연인이라….”
레이넌은 에린의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리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가 웃기죠?”
“믿을 수가 없어서.”
“…뭐라고요?”
마치 비웃는듯한 레이넌의 태도에 에린이 레이피어를 꽉 쥐며 발끈했다.
“연인이라고? 그 철벽 같았던 녀석이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믿겨지지 않아. 심지어 일리아나도 아니고, 이제 막 성인이 된 것 같은 핏덩이를 말이지. 게다가….”
레이피어를 꽉 쥐고 있는 에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레이넌은 자신의 도발이 제대로 먹혀들었다고 확신했다.
‘어디 수준이나 한번 볼까.’
은현의 제자라고 자칭하고 있는 여자의 전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시험하기 위한 도발.
이것은 그저 여흥에 불과했다.
“그 녀석의 제자라면서, 겨우 그런 완성도가 낮은 조잡한 기술밖에 쓰지 못하는 건가?”
“당신! 그 말 내가 꼭 후회하게 해줄 거야!”
얼굴을 붉히며 화가 난 에린은 레이넌에게 레이피어를 겨눈 채로, 곧바로 돌진했다.
상대와 자신의 힘의 격차는 압도적이며 명확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무심하게 자신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하려 했던 처음과는 달리, 지금의 남자는 웃고 있었다.
신수의 힘으로 타인의 감정을 읽어 들인 레이넌에게는 흉흉하게 흩뿌렸던 처음의 살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마치 한수 가르쳐주겠다는 상위자의 무인(?人)과도 같았다.
굳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하다.
틀림없다.
남자는 지금 일부러 자신을 도발했고,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반드시 한 방 먹여줄 거야!”
‘머리에 금방 피가 쏠려서 달려드는 건 도저히 그 녀석의 제자라고는 보기 힘들지만.’
그런데도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둘러오는 에린의 움직임에서는, 어디선가 은현을 연상케 하는 과거의 향수가 묻어나왔다.
‘제자는 제자라는 건가.’
레이넌은 웃으며 에린의 레이피어와 격돌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