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5화 〉 405. 흡혈귀 추적 회의(1)
* * *
맞는 것 같은데?
“…정말인가요?”
뭐 보이는 정황들로는 내 생각도 그래. 뱀파이어의 짓이 맞는 것 같아.
현재 집의 거실에서, 엘프의 마을에 있는 은현과 통신용 수정 구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 여성은 은현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사람을 먹는 종족들?”
에린은 뱀파이어라는 종족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인간의 피를 모조리 탐하는 것도 모자라, 미식의 일환으로 살점까지 먹는다는 종족에 관한 이야기가 인간인 에린에게 좋게 들릴 리가 없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이라 다행이다….’
이 얘기를 들은 다음 저녁밥을 도저히 맛있게 먹을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의 한창이었기 때문에, 눈치 없이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발설하지는 않았다.
아마 솔직하게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중얼거렸다면, 또 엘레노아에게 약간의 꾸중을 들었으리라.
기본적으로 이 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베르단디나, 은현, 일리아나의 경우에는 철없는 에린을 정말로 귀여운 여동생이나 딸처럼 생각하고 있으므로 에린의 응석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경향이 강했다.
엘레노아도 예전에는 그들과 비슷하게 에린을 여동생처럼 여겨주고 있었지만, 은현의 아내가 된 이상 일리아나와 베르단디를 대신에서 에린에게 예의범절을 혹독하게 가르치는 것은 엘레노아의 역할이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은…. 어째서 이렇게 흔적을 남길 정도로 대담해졌는지에 대한 의문인데….
이 부분은 차한성 또한 의문을 품었으며 제대로 해답이 나오지 않은 문제다.
뱀파이어들의 방식은 강자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약자들을 사냥하며 철저히 짓밟는 방식이다.
당연히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것만큼, 뱀파이어들의 현재 행동은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마치 자신들의 활동을 널리 알리고 있는 것처럼.
꺼림칙한 것은 차한성뿐만이 아니라, 은현 또한 마찬가지.
은현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가능성을 검토하고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세워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그렇게 은현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엘레노아는 은현에게 물었다.
“두 분께서는 복귀하시기엔 아직이신 건가요?”
흠…. 이쪽은 조금 걸려. 문제는 해결했지만, 뒤처리 쪽이 더 귀찮은 작업이니까.
고대 마수의 세 마리는 모조리 처리했지만, 그로 인해 숲의 주변에 미친 여파는 참담했다.
히드라의 독성이나 고르곤의 마안으로 녹아내리고 석화가 진행되거나, 키클롭스의 난동으로 갈라진 대지 등.
현재 은현과 일리아나는 고대 마수와의 교전에서 벌어진 주위의 참상을 엘프들과 함께 복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크윽!?
말을 잇던 와중, 수정 구슬 속에 비치던 은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 신음을 내뱉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어깨를 떠는 모습이 의아해서 엘레노아가 수정 구슬 너머의 은현에게 물었지만, 은현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이윽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살짝 째려보고는 다시 수정 구슬 너머의 자신 쪽을 바라보는 은현의 행동은 명백히 이상했다.
하지만 그의 어색한 웃음과 미묘하게 어깨를 떠는 그 모습을 보고, 눈치채지 못할 엘레노아가 아니다.
“아.”
작게 탄식한 릴리도 엘레노아와 마찬가지로, 현재 은현과 일리아나가 무엇을 하는 중인지 깨달았다.
엘레노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수정 구슬 속 너머의 은현에게 물었다.
“두 분…정말로 일하고 계신 거 맞죠?”
…다, 당연하지.
언제나 여유가 있는 은현이었지만, 엘레노아의 눈초리를 받으며 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그 태도는 엘레노아의 의심을 점차 확신으로 만들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좋지만…. 너무 두 분 이서만 즐기시는 건 조금 서운해요.”
“…응?”
유일하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에린뿐이었다.
‘무슨 말이지?’
엘레노아와 릴리는 수정 구슬 속의 은현이 어딘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당황하고 있다는 표정만으로 무엇을 알아차린 것일까.
에린이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미안.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엘레노아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이쪽에서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건 사실이야. 지금은…. 일리아나가 너무 스트레스가 쌓여서 조금…큭…. 위로를 받고 싶어 하고 있었거든.
“…후우. 어쩔 수 없죠.”
일리아나. 조금 나중에 하자. 엘레노아랑 릴리가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
흐응….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작게 한숨을 쉰 엘레노아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본래의 주제로 되돌렸다.
“당신의 생각도 그렇다면…. 오라버니에게도 지원병력을 보내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말씀드려볼게요.”
응. 그리고 에린.
“응?”
괜찮다면 아르티아 기사단의 지원에 참여해주지 않을래?
“어? 내가?”
에린은 자신에게 은현이 이 문제의 해결에 관해, 부탁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내가 직접 리오드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는 지금 이쪽의 문제로 손을 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내 대리로 너를 보내려 해.
“내, 내가…현이의 대리…?”
스승이 안 된다면 제자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어?
“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에 에린의 얼굴이 떨렸다.
그것은 기쁨과 동시에 긴장이 공존하는 복잡한 감정이다.
‘은현의 대신’이라는 것은 마침내 자신이 인정을 받았다는 뜻과 앞으로도 그의 이름이 먹칠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건…나한테 기회를 주려는 거구나.’
엘프의 숲에, 은현과 일리아나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에린은 내심 서운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실력과 가치를 증명해보라고, 미소를 짓고 있는 은현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가. 기대하고 있을게?
“네. 네! 꼭…현이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볼게요!”
마찬가지로 일리아나의 기대가 섞인 말을 들은 에린은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수정 구슬 너머의 두 사람에게 답했다.
그리고 제라드에게 이번 사건으로 부탁을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전달해줘.
“제라드님에게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으니까. 이 부분은 제라드에게 부탁하면 어느 정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군요.”
은현은 계속해서 엘레노아에게 이번 일의 대응에 관한 방침을 이것저것 설명했다.
그리고 이건 기사단의 지원과는 별개로 진행해. 혹시 모르니, 아무래도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게 낫겠어.
은현의 이야기를 들은 엘레노아와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알겠어요. 오라버니에게도 그렇게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네. 저도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쪽의 일은 부탁할게.
은현과의 통신이 끊어지자, 엘레노아는 릴리와 에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오라버니를 찾아 봬야 할 것 같아. 에린은 나를 따라오고, 릴리도 곧바로 보육원으로 향하도록 해.”
“네.”
“네. 그러면…저녁의 준비를 서둘러야겠네요.”
릴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 정도 준비를 해둔 요리를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새로운 사건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 세 여성은 오늘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 ◆ ◆
“에이라 언니! 진짜 오랜만이에요!”
공작 가문의 저택에 에이라가 배정받았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에린은 곧바로 에이라의 품속에 파고들어, 얼굴을 묻었다.
“응. 오랜만이야. 그래도 이제는 다 큰 숙녀가 그렇게 뛰어다니면 안 되지.”
“헤헤.”
이제는 성인이 되어버렸다지만, 아직도 아이 같은 응석을 부려오는 에린의 포옹을 에이라는 거부하지 못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가볍게 주의를 시키었지만, 에린은 헤실헤실 웃으며 에이라에게 달라붙었다.
아이테르의 시절부터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에이라는 은현을 비롯한 가족들 다음으로, 에린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다 커서도 이러면 어쩌니?”
“헤헤. 괜찮아요! 현이도 다른 분들도 다 괜찮다고 해주시는걸요!”
엘레노아도 귀족 여성으로서 이런 에린의 분위기를 교정해주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나 보여주는 예절 교육을 강조할 뿐, 두 사람만의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예절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거나, 엘레노아 또한 에린에게 무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언니. 이번 기사단의 지원 요청에 저도 참여하게 되었어요.”
“네가?”
에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어? 별로에요?”
“아니. 그럴 리가 있니? 에린이 얼마나 든든한데. 하지만 조금 생각지 못했거든. 에린은 공작 가문 소속의 기사가 아니잖아.”
“음…. 그렇긴 하죠?”
아르미타스 기사단의 소속 기사도 아니면서, 편성에 포함되어 기사단의 일원으로 취급되는 모험가라니,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에이라 자신이 몸담고, 아버지가 이끌어 가고 있는 아르티아 기사단은 물론, 크라시르 기사단에서조차도 이런 절차나 관례가 뒤집힌 미묘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에린은 참 신기해.”
더욱 이상했던 것은, 그런 에린의 취급과 대우에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이 단 한 명도 불만을 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목숨을 걸어도 거머쥐기조차 쉽지 않은 금위계 등급을 단 2년 만에 손에 넣은 숙녀의 실력과 인망을, 아르미타스의 기사단원들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신기해요?”
“응. 이렇게 나보다 작고 여린데. 어느샌가 나를 간단히 추월하고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고 있잖아.”
그것이 부러우면서도 자랑스럽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핍박만 받았던 어린 소녀가 이렇게 밝고 당당하며 강하게 성장했으니까.
그 길을 만들어준 것은 은현이라고 할지라도, 에린이 쌓아온 노력과 시간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돌아와 지금의 에린을 만들었다.
이미 은현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상, 에린은 모험가이면서도 모두가 아르미타스의 소속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기한 입장이었다.
솔직히 에이라의 입장에서는 아르미타스 기사단 측의 지원병력보다, 에린이라는 한 명의 지원이 더욱더 반갑고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이번에는 현이가 직접 보내준 거예요. 그래서 현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진짜 열심히 하려고요.”
“그렇구나.”
은현이 에린에게 실망을 하거나 화를 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올지는 에이라도 의문이었지만.
에이라는 매우 의욕적인 에린을 눈앞에 두고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동경하는 대상에게 기대를 받고 있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마음은 에이라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그러하니까.
에린이 자신의 스승인 은현에게 기대를 받고 영웅으로서 그를 동경하고 있듯이, 에이라 또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기대를 받고 리오드를 동경하고 있다.
신분이나 입장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에이라가 천진난만한 에린에게 친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러한 닮은꼴 때문이다.
“우리 이번에도 함께 힘내자?”
게다가 에이라가 평소보다 더욱 의욕적이었던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여동생이든, 남동생이든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못난 이야기는 들려줄 수는 없잖아.’
에이라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조금씩 성장해나가고 있는 두 번째 동생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되면서 후작 가문의 후계자 수업을 받는 남동생, 엘리온에게도 못난 꼴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
의욕을 한층 더 고취하는 에이라의 말에 에린은 힘차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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