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화 〉 403. 예정된 주인공과 만들어진 주인공(1)
* * *
“…저 말씀입니까?”
“그래.”
차한성이 흘끗 자신의 사수인 에이라를 보며 눈치를 보자, 에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잠깐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알겠습니다.”
에이라는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고, 하인의 안내를 받아 배정받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와라.”
“예, 예.”
차한성은 잠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무슨 용무인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아, 긴장과 복잡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차한성의 분위기를 읽은 탓인지, 앞장을 서며 걷고 있던 알렉스가 흘끗 뒤를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분에게 너를 소개하는 것뿐이니.”
“…소개입니까?”
도대체 누구를 소개해주려 한다는 것인가.
이윽고 알렉스는 어떤 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네.”
알렉스가 두 번의 노크와 함께 입실의 의사를 밝히자, 안에서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허가를 내렸다.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에는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
“반가워요. 차한성님. 저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녀. 유리아 페르니아스라고 해요.”
“…….”
간단한 자기소개를 들은 알렉스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사로서 왕족을 알현한 것에 예우를 다하려 했지만, 유리아는 곧바로 차한성의 그 행동을 제지했다.
“…이 자리는 궁정이 아닙니다. 그런 격식을 갖출 필요는 없어요.”
“화, 황송합니다.”
“이제 앉아주시겠어요?”
“예.”
곧바로 유리아의 옆에 배치된 의자에 알렉스가 앉자, 유리아는 차한성에게 자리에 앉아줄 것을 권유했다.
곧바로 자리에 앉은 차한성을 응시하며, 유리아는 물었다.
“제가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신 이유를 아시나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차한성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녀와 접점은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최근까지는 모험가 일을 하면서, 이제 막 아르티아의 신입 기사가 된 영광을 거머쥐었다고는 하지만, 유리아는 일개의 말단 기사인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개인적인 대화의 자리를 노리고 만들었을 리가 없다.
이윽고 유리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스. 사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그것 좀 가져와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알렉스는 유리아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 하녀에게 지시를 내리곤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와인병과 컵을 가지고 다시 방 안으로 복귀했다.
현재 공작 저택 안에서 아브로스의 다음으로 이 가문을 이을 알렉스가 하인이 할 법한 일을 직접 솔선수범하여 나서는 이유는,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가 매우 사적인 이야기로 외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카만 와인병의 입구를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를 해제시키자, 공기의 압력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소리가 차한성의 귀를 간질였다.
치이익
“…헉!?”
청량한 소리와 함께 병 속에 갇혀있던 탄산 가스가 터져 나오는 소리는 차한성의 얼굴을 경악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절대로 이곳에서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소리가 지금 자신의 귀를 강렬하게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병 안에 들어있는 건…설마…!?’
그 탄산 소리를 듣고, 내용물이 보이지 않은 새카만 병 속에 든 액체가 무엇인지를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더욱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차한성을 보고, 유리아는 피식 웃어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이걸 봤는데.’
처음 이 음료를 제작하여 자신에게 선보였을 때, 의기양양한 표정의 은현을 보고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지금 차한성이 짓고 있는 경악스러운 표정이 그때 자신이 지었던 표정과 똑같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알렉스가 컵 쪽에 병 끝을 기울이자, 새카만 액체가 컵 속에 쏟아졌다.
탄산으로 만들어진 거품이 실시간으로 터지는 액체들이 컵으로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차한성은 확신했다.
‘저건…진짜야. 진짜 콜라라고.’
지구가 아닌 이곳에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자신이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이라 여겨왔던 그 음료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
꿀꺽
자연스레 침을 삼키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윽고 유리아가 콜라가 든 컵을 들어 올리자, 차한성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먹고 싶다.’
하지만 알렉스는 오로지 유리아의 컵에만 콜라를 따라주었을 뿐, 3잔의 컵 중, 차한성의 잔은 아직도 비어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잔에도 그 음료를 따라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한성은 갈등했다.
감히 일개의 신입 기사인 자신이 왕녀에게 명령 같은 부탁을 내리고 무사할 수가 있을까.
두 눈을 딱 감고 한 번만 맛보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해볼까.
현재 차한성의 머릿속에는 유리아가 자신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한 이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눈앞의 콜라를 어떻게 하면 마실 수가 있을까?’라는 고민만이 가득했다.
유리아는 마침내 콜라를 마셨다.
청량한 탄산이 목을 타고 위로 흘러 들어갈 때마다 목을 따갑게 만드는 그 감각은, 이제는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단념했었던 반가운 감각이다.
“크으…!”
유리아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청량함을 즐기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흘끗 시선을 옮겨 침을 삼키고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있는 차한성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시고 싶나요?”
“그…크으….”
차한성은 무의식적으로 긍정의 의사를 보이려다가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신음했다.
유리아의 표정에서 무언가 낌새를 느꼈기 때문에 섣불리 대답하기를 망설인 것이다.
“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요. 조건이라는 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해요.”
“제…이야기?”
유리아가 내건 조건은 지금의 이 상황만큼이나 매우 뜬금이 없는 제안이었다.
“이걸 알아보셨다는 건 아마 당신은 저와 같은 비밀을 고유하고 있는 사이라는 거겠죠.”
“…네.”
차한성은 뒤늦게 유리아가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콜라를 보여준 의도를 깨달았다.
자신은 시험을 당한 것이다.
지구의 기억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그것을 콜라로 시험을 당하다니,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지구의 기억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그 사람밖에 없는데?’
자신과 비슷한 고대인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백은발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한성에게 은현은 분위기를 매우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공작 가문의 여식과 여덟 자릿수의 고위 마법사인 마녀를 아내로 두고 있는 것이 마치 소설 속의 하렘 주인공 같은 설정이지 않은가.
게다가 에린이라는 모험가를 키워낸 것이나 아르티아의 기사단장인 리오드와의 대련을 관전했을 때 보여주었던 실력은 평범한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그런데도 어쩌다 보니 이야기를 해보면, 지구에서 봤던 만화에 관한 이야기 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묘하기까지 했다.
‘그러면 혹시 왕녀님도 나나 그 남자처럼 지구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건가?’
정확히 은현의 경우에는 환생이 아니라, 지구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살아오고 있는 것이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차한성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아 왕녀와 은현이 비밀리에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는가 하면.
“어째서입니까?”
“네?”
“어째서 저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건가요?”
유리아는 어째서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같은 지구의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자신은 그저 별 볼 일 없는 일개 신입 기사일 뿐이다.
그런 자신이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해왔는지에 대해서 유리아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차한성은 그 점이 석연치 않았다.
당연한 의문이라는 듯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얘기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차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사실…. 예정된 미래의 일부를 알고 있었습니다.”
“…미래인가요?”
“네. 미래. 믿어지지 않으신가요?”
“…아니요. 믿겠습니다.”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이미 환생이나 이세계 같은 일도 일어나고 있는 마당에 미래 예지 같은 것도 있다고 못 믿을 것도 없다.
사실 미래 예지 같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타인의 검술을 보는 것으로 흉내 낼 수 있는 자신의 재능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그것이다.
생각보다 간단하게 믿어주는 차한성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제가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이유는…. 미래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에요.”
“…저를요?”
“네. 제가 알고 있던 미래 속에서, 차한성님은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점점 성장해나가며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는 또 한 명의 영웅으로 거듭납니다.”
“…제가? 영웅…이라고요?”
차한성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미래와 지금의 차한성님이 겪으신 지금의 일은 틀림없이 다릅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네.”
“저는 그 부분을 알고 싶은 겁니다.”
자신이 알던 미래 속 주인공의 예정이 완전히 틀어져 버려, 지금은 전혀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차한성의 이야기.
“…좋습니다.”
고민을 마친 차한성은 유리아의 제안을 승낙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과 비슷한 지구의 기억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자신의 비밀을 밝히는 것에 대한 저항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결심을 마친 차한성은 자신의 이야기하기 전에 앞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뭔가요?”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나 알렉스가 그의 부탁을 최대한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차한성의 표정이 너무나도 비장해서, 유리아와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며 긴장했다.
이윽고 차한성은 비장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병을 응시했다.
손가락으로 그 병을 가리키는 차한성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콜라…. 저도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
알렉스와 유리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이 콜라는 처음부터 제공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부탁의 범위 안에는 넣지도 않았다.
침을 삼키며 계속해서 콜라를 바라보고 있는 차한성의 얼굴이 얼마나 비장한지, 두 사람은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얼마든지요.”
“…감사합니다.”
치이익
자신의 컵에 콜라가 따라지면서 청량한 탄산 소리가 방안에 다시 울려 퍼지자, 차한성은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절대로 콜라에 넘어가서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천천히 검은색의 액체를 자신의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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