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화 〉 402. 흡혈의 종족
* * *
공작 가문을 찾아와 알렉스의 집무실에서 알렉스와 엘레노아를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 중, 에이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오랜만이야.”
“어서 와. 에이라.”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라의 인사를 받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덩달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에이라의 동행인은 처음 보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전에 편지로 에이라의 방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는 알렉스와 엘레노아도 알고 있었다.
“반갑군. 이 영주의 관리를 맡고 있는 소공작, 알렉스 아르미타스다.”
“엘레노아 아르미타스라고 해요.”
“예. 예…. 차한성이라고 합니다….”
차한성은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일개 기사인 자신이 나라의 이인자인 공작 가문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알렉스는 오랜 지인을 만나는 표정이 아니라, 업무를 보는 영주로서의 표정으로 두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오늘 찾아온 용건은 아르티아의 단장께서 정식으로 우리 영지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들었는데.”
“네. 단장님께서는….”
살짝 말끝을 흐리는 에이라는 자신의 아버지를 ‘단장님’이라고 칭하며 말했다.
알렉스처럼 완전히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업무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윽고 엘레노아를 응시하며 자신의 용건을 전달했다.
“은현님. 그분에게 조언을 듣는 것과 공작 가문의 병력 지원을 요청하셨습니다.”
“…조언과 지원이라.”
알렉스는 흘끗 엘레노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현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다는 리오드의 요청은 공교롭게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 부재중이에요.”
엘레노아가 엘프 여왕, 레지나에게서 들어온 구원 요청으로 일리아나와 함께 자리를 비운 상황을 전했다.
“그…렇군요….”
에이라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비워버린 이상 조언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럼 지원 요청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에이라는 천천히 다음의 용건을 위해서 자신과 차한성이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을 찾아온 연유를 설명했다.
“최근 지방 영지들에서…의문의 실종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굳은 얼굴로 에이라가 설명을 이어나가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렉스와 엘레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종사건이라….”
에이라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의문의 실종사건이 나타났다고 보고를 받은 영지는 총 세 곳. 실종된 사람의 숫자는 모두 합해서 약 120명 정도입니다.”
“…많군.”
알렉스와 엘레노아도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표정을 찡그렸다.
“…네. 많습니다. 현재 아르티아 기사단에서는 이 세 곳으로 기사들을 파견하여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황 조사 속에서도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갑작스레 네 명의 일가족이 한밤중에 사라져버렸다거나.
소작농을 경영하고 있던 농민들이 갑작스레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거나.
영지의 경비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하고 있던 위병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거나.
정말 기이했던 것은 실종된 자들이 남긴 흔적이다.
“실종된 사람들 모두 몸만이 사라졌었다고 합니다.”
“몸 만이…?”
“네. 옷들은 그대로 남아있고, 사람의 몸만이요. 보고했던 기사의 말로는 마치…그릇에 담겨 있던 물을 모조리 마셔버린 것처럼.”
이야기를 들은 알렉스와 엘레노아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옷가지만을 남겨두고 사람의 육체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는 것일까?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꺼림칙하게 만드는 기이한 현상의 일이다.
“게다가…실종자들 사이의 공통점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120명의 실종자는 모두 성별도, 나이대도, 사는 곳도, 인간관계도 공통된 부분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점은…사라진 시간이 모두 밤이었다는 것, 그리고 신고를 받은 마을이 세 곳인 점, 그리고 시기상으로 보아 절대로 개인이 벌일 수 없는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집단이 있다는 점.”
그리고 하나 같이 옷가지들을 남겨놓고 인간의 육신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실종자들 모두가 낮에는 자신들 하루의 일과를 별문제 없이 수행했다는 목격 정보를 통해서 실종된 시간을 오후부터 새벽의 시간대로 좁힐 수는 있었지만 현재로서 성과는 이것뿐이다.
그 답답한 상황에서 단서를 제공한 것은 뜻밖에도 아르티아에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차한성이다.
“두 분께선…혹시 흡혈귀(?血?)라는 종족에 대해서 아시나요?”
“…흡혈귀?”
알렉스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단어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면서도 인상을 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엘레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아. 밤중에 무덤에서 기어 올라와, 살아 있는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이종족으로 알고 있어.”
“혹은 뱀파이어(Vampire)라고도 하죠.”
지금까지 입을 다물며 에이라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차한성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자, 알렉스와 엘레노아, 에이라는 차한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그 종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지방 영지의 영민들이 실종된 원인이 그 흡혈귀, 또는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알렉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대화에 참여한 차한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소공작의 매서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차한성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차한성의 눈에는 알렉스와 엘레노아를 만나고 긴장했던 표정은 보이지 않았고, 잔뜩 굳어있는 심각한 얼굴을 짓고 있는 그의 눈에는 다양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분노인가, 슬픔인가, 죄책감인가, 복수심인가.
많은 감정이 어우러진 그 눈은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어떤 확신이 있는 눈이었다.
어떠한 인과관계로 결론을 내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차한성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 미스터리한 사건의 범인이 흡혈귀라는 것을.
하지만 그가 그런 확신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 확신에 동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아르티아 쪽에서 공작 가문에 해온 요청은 병력의 지원인 만큼,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다.
“어째서 그렇게 확실할 수 있는 거지? 그 흡혈귀, 또는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책 속에서 기술된 종족일 뿐 실제로 목격된 사례가 없는 만큼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데.”
알렉스는 대놓고 뱀파이어라는 종족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야 이미 책으로만 접했던 ‘엘프’라는 종족을 은현의 소개로 접해본 지금.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종족이 있다고 한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할 만큼 알렉스는 어리석지도 않다.
“그건…! 크…!”
차한성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급하게 깨닫고는 신음하며 입을 닫았다.
알렉스의 지적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특히나 자신의 가문 소속의 기사들 일부를 지원하는 일인 만큼, 정확한 사태의 파악은 중요한 문제였다.
뱀파이어의 외형은 인간과 굉장히 유사하지만, 수인들이나 엘프들처럼 인간이 아닌 특수한 종족이다.
수인은 그럭저럭 인간들과 섞여 사는 경향도 존재하지만, 엘프들처럼 인간들에게 정체를 감추며 숨어 사는 종족들 또한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뱀파이어들 또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성향 쪽의 종족이다.
“뱀파이어의 주식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인간의 피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천적이다.
인간의 피를 섭취하고, 그것을 대량의 마력으로 변환시켜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것으로 삶은 유지하는 특수한 종족들.
동물의 피나 마수의 피로는 대체할 수 없고, 오로지 인간의 피만을 섭취해야 하는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의 눈을 피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책으로만 그러한 종족이 존재했다는 지식을 접하는 것은 엘프들과 비슷하지만, 그 원인은 엘프들과는 전혀 다르다.
“뱀파이어들이 인간들의 앞에서 정체를 감춘 이유는 더 깊숙한 어둠 속에서 인간들을 사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이 아닌, 식량으로 본다.
인간이 식용으로 가축을 기르고 잡아먹는 것과 마찬가지.
더 어두운 곳에서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인간들을 사냥하며, 자신들의 정체가 평생 노출되지 않도록 계획하는 것이다.
“제가 이번 사건의 주모자들이 인간도, 마수도 아닌 뱀파이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실종자들이 모두 옷만 남겨두고 몸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 안에 존재하는 피는 모조리 흡혈하여 먹어치우는 뱀파이어가 피 이외에도 별미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인간의 피가 묻어 있는 살점이다.
마치 스테이크 위에 훌륭한 소스가 얹어진 것처럼, 그들은 인간의 피를 모조리 흡혈하는 것도 모자라, 별미인 살점까지 먹어치운다.
그리고 옷가지 위에 남아버린 앙상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의 뼈는 뱀파이어들의 전리품으로 회수된다.
옷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미스터리는 뱀파이어의 식성과 악취미로 형성된 그 종족만의 관습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두 밤에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래. 일리 있는 이야기야. 하지만 모순이 존재하기도 해.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며 활동해왔던 그 종족이 어째서 이렇게 눈에 띄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지?”
“…….”
알렉스의 지적을 들은 차한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부분은…. 죄송하지만,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나름의 판단으로 만약 뱀파이어들의 생각이 일제히 변화하기 시작하여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라면….”
“정체를 감추며 은밀히 인간들을 사냥했던 기존의 방식을 버리게 되는 계기라는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흐음.”
생각에 잠긴 알렉스를 바라보며 에이라가 추가로 입을 열었다.
“한성이의 이 의견은 굉장히 허무맹랑하고 믿기 힘든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설득력도 있고 본인의 확신도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은현님께 조언을 얻기 위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더 많은 정보와 단서를 모을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얼마나 더 많은 실종자가 속출할지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리오드는 어쩔 수 없이 은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모습이 명확한 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것은 왕국의 기사단으로서 번번이 은현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실체가 불명확한 미스터리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기사로서 ‘얼마나 자신을 단련하였는가?’라는 노력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존심이나 미안함 같은 감정으로 망설여도, 이런 쪽은 전문 분야나 다름이 없는 은현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을 리오드는 잘 알고 있었다.
더는 실종자들이 생기기 전에 사건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더욱 올바른 방향이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과, 아르티아의 기사단원인 에이라와 차한성이 이러한 연유로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을 찾아온 것이다.
“확실히…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문제네요….”
이야기를 들은 엘레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집으로 가서 그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보도록 할게요. 불가능하더라도, 일단은 의견을 구해보도록 할게요.”
“그래.”
엘레노아는 이야기를 마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에이라와 차한성을 바라보며 애석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렇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게 돼서 미안해.”
“아, 아뇨…. 괜찮습니다.”
에이라는 현재 엘레노아가 얼마나 바쁜지에 대한 소식을 얼핏 접했기 때문인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곧바로 엘레노아가 나가자, 알렉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변은 내일까지 해줘도 상관없겠지?”
“물론입니다.”
오히려 단번에 거절을 해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에이라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 오전까지 답을 주도록 하지. 일단 오늘 하루는 저택에서 방을 마련해 줄 테니 쉬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에이라의 감사 인사를 받고, 알렉스는 차한성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잠시 시간 괜찮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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