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 400. 뒤늦은 후회(1)
* * *
사이먼 마기우스.
대륙에 열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리아나와 같은 고위자릿수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마법사 중 한 사람.
그리고 현재 페르니아스 왕국의 궁정 마법 사단인 메이거스 마법 사단의 수장인 노인은 리오드와 마찬가지로 페르니아스 왕국이 강대국 중 하나라고 불리는 최중요 전력 중 한 사람이다.
“…어머.”
뒤늦게 보육원을 방문한 손님의 정체를 깨달은 릴리는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정말로 그가 일리아나와 같은, 대륙에 열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마법사라면.
혹시나 실례가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까 자신의 행동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에린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
“에린? 왜 그래?”
“무슨 일로 오빠를 찾아온 건지, 저도 얘기를 같이 들어봐야겠어요.”
그런 사람이 도대체 무슨 용무로 이런 일개 보육원을 방문한 것일까.
엘빈에게는 또 무슨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걸까.
“인제 와서 무슨 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식이었다.
“그러면 차를 준비할게.”
“내가 갖다 줄래. 언니.”
“응.”
주방에서 릴리가 준비해준 차가 담긴 컵을 쟁반에 올리고, 에린은 엘빈이 향한 손님용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가자, 에린은 중앙에 놓인 테이블을 두고 엘빈과 한 노년 마법사가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
서로가 입을 꾹 다물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둘의 광경은 응접실로 막 들어온 에린이 보기에도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이 가득했다.
에린은 그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적막에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서고는 쟁반 위에 올려져 있던 차가 담긴 컵을 노인 마법사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쿵!
테이블에 부딪히는 컵의 소리가 응접실 안에 다 울려 퍼질 정도로 거칠게 내려놓자, 노인 마법사의 시선이 옆으로 흘끗 옮겨져 에린의 시선과 마주쳤다.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리고는 엘빈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에린의 태도는 평소 누구에게나 예의를 차리는, 연장자인 노인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동생이 보인 무례한 태도에 엘빈이 고개를 숙이며 꾸벅 사과하자, 발끈한 것은 그의 여동생인 에린이다.
“오빠가 왜 죄송해! 이 사람은…!”
“너야말로 사과드려라.”
강압적인 태도와 눈빛으로 강하게 쏘아보는 오빠의 눈빛에 에린은 몸을 움찔 떨었다.
“…….”
무례하고 과격하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자각은 에린도 하고 있었지만, 에린의 마음속에서 눈앞의 사이먼이라는 노인 마법사는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미운털이 콕콕 박혀있었다.
그야 갖은 노력으로 아이테르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최초로 왕국의 궁정 마법 사단에 입단하게 된 자신의 오빠를 갈구고 방치하여 위로 치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찍어눌렀던 집단의 수장인데, 좋은 인식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었다.
엘빈이 학생의 시절, 아버지의 잦은 폭력 속을 버티면서 자신을 보호하고 노력하고 고생 끝에 열렸던 출세의 길이었는데, 그 길마저도 귀족 출신의 동기, 선배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가로막혀 버렸다.
왕국 내부에 뿌리 깊이 박혀있던, 신분의 차이에서 발생한 엘리트 의식은 최초로 메이거스에 입단한 평민 출신의 마법사를 견제하고 배척했다.
항상 투덕대며 유치한 싸움을 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밉상인 오빠였지만.
그런 오빠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해왔던 고생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에린은 도저히 눈앞의 이 사이먼이라는 노인 마법사를 고운 시선으로 볼 수가 없었다.
“네가 그렇게 함부로 대하실 분이 아니야.”
싫으나 좋으나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사이먼은 일곱 자릿수의 고위 마법사이다.
일리아나와는 달리, 왕국의 중요 전력으로서 대우를 받으며 마법 사단 또한 운영하고 있기에, 사회적으로도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
너무 감정적으로 대하면서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기 때문인지, 에린은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니. 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이먼은 손을 내저으며 에린의 사과에 답했다.
“네 가족에 얽혀 있었던 이야기는 나도 이미 들었다. 충분히…나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지.”
담담히 중얼거리며 자신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깔끔히 용서한 사이먼의 태도에 에린은 적잖게 당황했다.
솔직히 머리에 열이 뻗쳐서 무작정 먼저 무례한 태도를 벌여놓았기 때문에 곧바로 용서를 받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슬슬 저를 찾아오신 용무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에린의 무례에 대한 사과를 사이먼이 받아들이면서 어느 정도 이야기가 일단락되었기 때문인지, 엘빈은 슬슬 본래의 용건을 물었다.
“그냥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이라고요?”
“그래. 최근 들어, 너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지.”
“…….”
엘빈의 이야기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입장에서도 정치적으로 꽤 뼈아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야 자신이 이끄는 마법 사단의 일원이 흑마법사로 전락해버려 왕국의 관료를 죽이고 도주를 했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망한 그 왕국의 관료는 흑마법사의 아버지다.
많은 사연과 정황, 과정이 왜곡되고 대외적으로 굉장히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밝혀졌던 이유는 그 사건에서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이 국가의 세금을 비밀리에 탈취하고 있었던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국가 망신을 시키게 된 원인이었던 ‘헤르샤 준남작 배임 횡령 사건’은 지금도 궁정 귀족들 사이에서는 입에 언급하기가 꺼려지는 뼈아픈 사건 중 하나다.
“저를 다시 처분하시기 위해 오신 겁니까?”
“……!”
“아니. 말했지 않나. 그저 호기심 때문이라고.”
담담한 엘빈의 질문에 에린의 몸이 절로 반응하며 적대적인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런 에린의 시선에도 사이먼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 계기는 이곳 아르미타스령에서 그림자를 조종하는 능력을 사용하여 모험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누군가의 소문을 접했기 때문이다.”
모험가들 사이에서 그 강력한 능력만큼이나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흑기사의 비주얼은 당연히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림자를 조종하는 능력이라니.
흑마법의 종류 중에서도 사령술을 제외하고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마이너한 조영술의 가능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법에 정통한 상위 자릿수 이상의 마법사들이라면, 곧바로 흑마법의 가능성을 떠올렸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사이먼은 그 소문을 들었을 때 곧바로 조영술의 존재와 엘빈을 떠올렸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엘빈을 찾아왔다.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너를 다시 없애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면. 이렇게 호위나 시종 한 명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이곳을 찾아오지는 않았겠지.”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엘빈은 처음부터 사이먼의 말대로 그 가능성을 아예 생각해두지 않았다.
나라의 체면에 먹칠했던 것으로 알려진 흑마법사의 존재를 다시 처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면, 이렇게 무방비의 상태로 혼자 자신을 찾아온 것은 어리석다.
설사 자신과 엘빈의 사이에 까마득한 격차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감 하나로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궁정 마법 사단의 단장으로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뭐야. 왜 둘이 이렇게 침착하게 대화하고 있는 거야?”
에린은 엘빈과 사이먼이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 몹시 못마땅했다.
아직도 적대적인 시선을 풀지 않는 에린을 응시한 사이먼은 쓴웃음을 지으며 엘빈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참 오빠를 아끼고 있군.”
“성인이 되었다지만, 아직도 철이 없는 애처럼 날뛰는 말괄량이입니다. 큰 무례라도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흠. 그러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아가씨를 위해서, 아가씨의 오빠에 대한 현재 궁정 귀족과 메이거스 마법 사단의 입장을 설명해주도록 하지.”
마치 털을 곤두세운 앙칼진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에린의 태도를 본 사이먼은 다시 말을 이었다.
“왕국과 메이거스 마법 사단은 너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생각이 없다.”
페르니아스 왕국 내부에서 마법사로서 정상의 자지를 차지하고 있는 사이먼이기 때문인지, 지금의 발언은 거의 공식적이며, 공신력이 있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정말…인가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던 에린이 다시 한번 되묻자,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 첫째, 현재 너의 신원을 보증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 부부들이기 때문이다.”
“아….”
에린은 단번에 ‘부부’가 누구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엘빈의 신원을 보증하고 있는 부부들이라고 한다면 은현과 일리아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왕국 측은 그 남자를 굳이 건드려서 이득을 볼 게 없기 때문인지, 이 문제는 다른 이들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언급하기 꺼리는 분위기다.”
현재 왕국의 주요 궁정 귀족들은 모두 은현과 적대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전에 은현이 왕국 내부에서 부당한 이익을 착취하여 국가를 기만했던 귀족들 절반 이상을 숙청하기 위한 판을 만들었던 사건 때문이다.
게다가 일리아나라는, 사이먼보다 강력한 여덟 자릿수의 고위 마법사를 아내로 맞이한 것도 모자라, 엘레노아와의 결혼을 통해서 아르미타스 공작이라는 뒷배를 얻었다.
심지어는 유리아 왕녀와 비밀리에 커넥션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나서, 왕가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
“왕국의 검이라는 아르티아의 단장, 올리비온 후작까지 그 부부 쪽과 연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도 디아네 왕비 쪽에서도 자존심이 상해서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미 은현이라는 존재는 무력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서 페르니아스 왕국 내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네가 위험한 존재든, 그렇지 않든. 그들에게는 이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살아있는지도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네가 악하고 위험한 존재라면 그 두 부부가 고삐를 쥐고 네가 나쁜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관리를 해주는 걸 기대하고 있을 정도니까.”
“만약…. 현이가…나쁜 마음을 품으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예정인가?”
“…아니요.”
“그럴 것으로 막연히 기대하고 생각하고 있는 게 왕국 측 주요 인사들의 판단이다. 게다가 나 또한 일리아나 그 여자와 척을 지고 싶지도 않으니까.”
페르니아스 왕국 측에서 엘빈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었다.
그의 뒤에 있는 공작 가문과 은현, 그리고 그 개인의 주변 인물들.
그들과 적대하고 싶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굳이 이 상황에서 엘빈이나 그의 뒤에 있는 은현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두 번째는 현재 왕국의 내부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못하다는 점 때문이지.”
절반이 넘는 대규모의 귀족들의 비리가 까발려지면서, 부당한 이익을 착취했던 귀족들의 문책이 시작되었고 숙청된 결과, 지방 영주들은 집안의 재산과 영지를 모조리 빼앗기고 평민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궁정 귀족의 내부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현재 남아 있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들은 혼란으로 인해 부실해진 내실을 다시 정비하고 다지기 위해 정신이 없다.
“이 상황에서 공작 가문 측은 나라의 내실을 다지는데, 돕겠다는 명목으로 거금의 지원을 계속 유지하고 있지. 그런데 어떻게 그가 신원을 보증하고 있는 너를 건드린다는, 공작 가문과 그 남자를 적대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가 있을까.”
그것은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우책이다.
현재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 조차도 정신없는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는 가운데, 페르닌을 추월하여 경제적인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는 아르미타스령은 왕국의 입장에서는 가뭄에 내린 단비와도 같다.
“…정말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는 남자야.”
사이먼은 지금의 상황을 유도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은현을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이 나라는 공작 가문의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백은발의 남자의 손에 농락당하고 주물러지고 있는 것만 같다.
나라의 주인인 왕가마저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그의 영향력에 기대어야만 현재의 혼란을 안정시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현재 이 나라를 대리청정하고 있는 디아네 왕비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럼…. 사이먼님께서 절 찾아온 이유는 정말로 호기심 때문…이었다는 겁니까?”
“아까도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다. 그리고….”
살짝 말끝을 흐리는 사이먼의 태도에서, 엘빈은 혼자서 자신을 찾아온 그의 진짜 의도가 드디어 나올 것이라고 짐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