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392화 (729/730)

〈 392화 〉 392. 차원의 문(1)

* * *

세 마리의 고대 마수와의 싸움이 끝난 평원의 상황은 심각했다.

히드라의 독성으로 여기저기가 녹아내리고 내부에도 침식하여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고르곤의 마안으로 돌덩이가 되어버린 풀과 나무들.

그리고 키클롭스의 난동으로 갈라져 버린 대지는 이곳에서 일어난 재해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토 골렘과 인형 부대들을 역소환시키고, 혼자 남은 에밀리아를 데리고, 은현은 엘프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양손으로 안아 올려 자신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일리아나가 깨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은 이번 싸움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아내에 대한 은현의 배려다.

“레지나.”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자신을 부르는 은현의 목소리에, 레지나는 은현에게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세 마리의 고대 마수 중, 엘프들이 키클롭스에게 온 전력을 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두 마리의 마수들을 은현 쪽이 전담을 해주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은현과 그의 아내, 그리고 인형 소녀가 없었다면 엘프라는 종족과 그들의 터전, 그리고 세계수는 그대로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세계수의 멸망은 곧 하계의 위협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안.

여신에게 사명을 부여받아 하계의 유지에 힘을 써야 하는 은현은 이 사안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아직 안 끝났어.”

“…네?”

표정을 굳히고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은현의 말에 레지나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마계에서도 상위의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는 고대 마수가 하계로 넘어온 일이 아무런 징조와 이유도 없이 갑자기 발생할 리가 없잖아.”

“…….”

그것도 하나만으로도 재앙이라고 칭할 정도로 위협이 되는 존재들 일진데, 한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씩이나.

중상급의 고위 악마들이 마계로부터 공허의 틈새를 타고 하계로 넘어올 수 없는 것처럼, 고위 마수들에게도 이러한 법칙은 존재한다.

악마들보다 걸려있는 제약이 약하지만, 그런데도 하계로 넘어온 이 사태는 명백히 이상했다.

“있는 거야. 이 상황을 조장한 누군가가.”

‘하계에 세 마리의 고대 마수를 소환시켰다.’라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원인’과 ‘과정’을 만들어낸 배후에 가려져 있는 누군가의 존재.

은현의 이야기를 들은 레지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얼굴을 굳혔다.

만약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어떤 조건과 수단이 갖춰지기만 한다면 재앙이나 다름없는 고대 마수를 다시 이곳에 소환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에밀리아.”

“네.”

“일리아나를 부탁해.”

“명령을 수락합니다.”

에밀리아는 은현에게서 극심한 정신력의 소모로 인해 잠이 들어버린 일리아나의 몸을 받았다.

은현의 허리 정도까지 밖에 되지 않는 키를 가진 인형 소녀가 다 큰 성숙한 마녀를 가볍게 안고 있는 광경은 매우 이질적이다.

“고생했어. 레지나. 일리아나와 에밀리아를 데리고 숲으로 가줘.”

“선생님?”

곧바로 이동하려는 은현을 레지나가 불러세웠다.

“…어디로 가시려는 건가요?”

“이 상황을 조장한 놈을 찾으러.”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레지나. 이곳은 나 혼자 갈게.”

은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너는 이 엘프들을 통솔해야 하는 여왕이잖아.”

“…….”

종족을 대표하는 직위와 책임을 지고 있는 이상, 레지나의 단독 행동은 허락할 수 없었다.

“제가 남은 이들을 통솔하겠습니다.”

사정을 들은 두 엘프가 은현과 레지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엘븐가드의 전 수색조장, 현 수색조장의 두 엘프.

데르킨과 또 다른 엘프였다.

“데르킨?”

“부디 저에게 임시로 다시 한번 엘븐가드 수색조의 조장자리를 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숲을 나와, 적지 않은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엘븐가드의 대원들은 이전 자신들을 이끌고 통솔했던 데르킨의 얼굴을 잊지 않고 모두 알아보았다.

애초에 데르킨이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은현을 따라, 숲을 나와 생활하기 시작한 것을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은 엘프들에겐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이다.

엘븐 가드의 전 책임자와 현 책임자가 함께 나서서 여왕인 레지나 대신, 엘븐 가드와 엘프 병사들을 통솔하겠다고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여왕께선 부디 여왕이 하고자 하신 대로.”

“…선생님.”

부하 엘프들의 보조가 떨어지자, 레지나는 더욱더 강하게 동행의 의사를 밝혀왔다.

“모든 일의 마무리를 선생님께 맡길 수는 없어요.”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버렸다.

300년 전 고대 마수의 토벌도, 두 차례나 있었던 다크엘프와 엘프의 항쟁도, 세계수의 부활도.

너무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서, 그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 있다.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동행 의사를 밝혀오는 레지나의 언행은 300년 전, 은현에게 레지나를 맡겼던 선대 엘프 여왕의 그 성격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떻게 된 게, 이런 건 쏙 빼닮아가지고….”

“어머니께서 들으셨다면 아마 웃음을 지으시겠죠.”

레지나는 피식 웃으며 은현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래. 알았어.”

“감사합니다.”

결국,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의사를 밝혀오자, 레지나는 자신의 거대한 각궁을 꽉 쥐며 깍듯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지 마. 이제는 여왕이잖아.”

“하지만 선생님은 선생님이신걸요.”

한 종족의 대표자, 여왕으로서 성장하여 그 본분을 다하고 있는 레지나가 일개의 개인인 은현에게 고개를 숙여 깍듯이 존중의 의사를 보이는 상황.

그것은 그녀의 아래에 있는 모든 엘프가 그 개인인 은현을 존중하는 의미와도 연결된다.

규모가 너무 커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짊어져야 하는 부담도 증가한다는 것.

은현은 그 부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것에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가자.”

“네.”

◆ ◆ ◆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의 내부.

안의 시야를 밝혀주는 것은 수십 개의 촛불이다.

양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쭉 배치된 양초들과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커다란 제단의 모습.

그 제단 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여성은 자신이 펼쳐둔 결계로 침입해온 두 존재를 감지했다.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머리를 턱을 괸 쪽으로 기울이고 두 눈을 감고 있던 여성은 슬며시 자신의 두 눈을 떴다.

자신들의 침입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이 당당한 걸음 소리를 내며 동굴 내부로 접근해와, 제단의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의 앞에 두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

“…….”

반가운 친구를 맞이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여성의 언행에 백은발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 은현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우리가 그렇게 담소나 나눌만한 친한 사이는 아닐 텐데.”

“그래도 꽤 각별한 사이인 건 맞지 않나? 내 배에 칼을 찌르고, 목을 잘랐던 남자인데.”

“…….”

은현과 동행해온 엘프 여성, 레지나는 인상을 굳히며 경계의 기색을 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은현과 제단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을 번갈아 보았다.

‘…목을 잘라?’

그런데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눈앞의 여자를 보고,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침내 은현이 입을 열었다.

“역시 안 죽었군.”

마리우스와 함께 메디아의 부하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여성, 레나트의 멀쩡한 모습을 확인한 은현은 곧바로 양손에 검을 소환하여 마력을 담았다.

언제라도 곧바로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벨 수 있도록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옆에 있던 레지나마저도 몸을 움찔 떨며 당황할 정도의 짙고 살벌한 살의는 항상 어느 부분에서 여유가 존재했던 은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고 증오하는 망자의 여왕, 메디아와 연관된 모든 것, 모든 이들에 대해 내뿜는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레나트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

그 모습을 본 레지나는 의아할 뿐이었다.

은현이 뿜어내고 있는 살의와 기운은 함께 하는 레지나조차도 떨리게 만들 정도로 범상치가 않다.

은현과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여성은, 그런 은현의 현재 모습을 우습게 받아넘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어떠한 비장의 한 수를 숨겨두고 있는 것일까.

레지나로서는 눈앞의 레나트의 속셈을 간파할 수 없었다.

“또 메디아에게서 무슨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고 있는 거야.”

“안타깝게도, 이번엔 그분의 사주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뭐?”

“그분이 나에게 흥미를 느끼고, 종복으로 삼으셨던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던 능력 때문이었지.”

은현과 레지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제단 의자 위,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문을 응시했다.

“…문?”

처음 보는 레지나의 목소리에 당황이 섞인 이유는 주변 자연의 마나에 대해 민감한 엘프의 감각이 보내오는 경고 때문이다.

은현과 마찬가지로 남다르지만, 은현과는 반대로 굉장히 불길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강렬한 예감.

“나는 말이지. 이 세상의 섭리를 비틀어 차원과 차원을 잇는 문을 만들어낼 수가 있어.”

“……!”

“뭐, 막대한 양의 영혼이 대가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담담하게 밝히는 레나트의 능력을 들은 은현과 레지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갔다.

의미하는 바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자신의 앞에서 고룡의 사체를 소환하였을 당시, 베르단디와 같은 ‘신의 기운’의 일부를 띄고 있던 그녀의 능력이 단순히 ‘공간 이동’ 계열의 능력이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있었다.

레나트의 설명대로라면, 제물이 될 영혼들이 갖춰만 진다면 공허의 저편에 틈새를 만들어, 하계와 마계를 잇는 통로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곧 악마들과 마수들의 침략이 다시 시작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며, 400년 전 지구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해. 네 뒤에 있는 게 누구야.”

대량의 인간을 학살하고, 그 영혼들을 섭취하여 인간의 틀을 벗어던진 초월자가 된 메디아라지만, 레나트의 능력은 메디아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격을 갖춘 신력의 일부를 제련하여 그것을 권능으로 하사를 받은 것이다.

은현이 스스로 영혼의 일부와 신력을 단련시켜 ‘열쇠’로서 자신의 권능을 창조해낸 것처럼.

아직 인간에 틀 속에 존재하는 레나트가 그것을 스스로 달성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레나트에게 그 신의 힘의 일부를 양도한 것이다.

은현은 이 가능성을 깨닫고 베르단디에게 신 중에서 하계에 위험을 초래하는 수작질을 벌이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비밀리에 조사도 부탁했었다.

하지만 신계에서도 레나트에게 비밀리에 권능을 하사 한 배신자의 존재는 찾을 수 없었다.

“글쎄. 내가 그걸 말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피식 웃으며 레나트는 조용히 의자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나트가 몸을 움직이자마자, 은현은 곧바로 레지나를 불렀다.

“…레지나.”

“…네.”

“저 여자는 여기서 꼭 죽여야 해.”

“알겠어요.”

레지나는 살벌한 은현의 명령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의 의사를 밝혀왔다.

마계와 하계를 잇는 통로를 건설하여, 마계의 존재들을 이곳으로 불러올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은 틀림없는 하계의 멸망을 초래하는 위험의 씨앗 그 자체다.

레나트를 없애야 한다는 은현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바.

“나도 그때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

[주현성 극원류]

[이형환위(????)]

언제라도 달려들 수 있도록 임전 태세를 취하고 있었던 은현의 모습이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바로 레나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은현이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시에테 검성술]

[백광일섬(白光一?)]

한번 레나트의 목을 그었던 전적이 있었던 그 기술을 다시 한번 사용하여 레나트의 목을 베려했지만.

카아앙!

“큭!?”

마치 쇳덩이를 때린 것 같은 거친 쇳소리와 함께 은현의 검이 레나트의 살을 파고들지 못했다.

은현은 곧바로 레나트의 목 주위를 살피며,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무언가’의 정체를 살폈다.

“…비늘?”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는 적색의 비늘은 파충류의 그 비늘을 떠올리게 만드는 비주얼이었지만, 무엇보다 은현의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었던 원인은 자신의 공격을 막을 정도로 그 비늘이 가지고 있던 견고함이다.

그리고 그 비늘은 지금은 멸종했지만, 과거에 몇 번인가 목격했던 적이 있었던 어떤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이 비늘은 설마….”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현이 멈칫거렸던 순간은 0.5초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순간이다.

곧바로 레나트가 자신의 뒤를 점거한 은현에게 팔을 휘둘러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은현은 멈칫거린 사고를 다시 움직여 레나트의 반격을 회피하고는 거리를 벌렸다.

콰직!

이윽고 레나트의 신체가 기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부들부들 떨던 양팔과 다리는 목에 나타났던 것처럼 적색의 비늘이 뒤덮으며 날카로운 손톱이 생겨나고.

콰지직!

등의 살을 찢고 튀어나오는 한 쌍의 날개가 거칠게 펄럭이며 그 존재를 과시했다.

양쪽 팔과 다리를 유지하며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미 그녀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은현은 그녀가 무엇을 한 것인지를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미X년. 스스로의 몸에 드래곤의 생체 조직과 마력을 합성시키다니.”

“이 정도는 돼야지, 너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레나트는 ‘용화(?化)’하면서 생긴 자신의 날개를 펄럭였다.

콰아앙!

그저 날갯짓했을 뿐인데, 날개에 부딪힌 충격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동굴이 강하게 흔들리며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한번 막아봐.”

레나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 레지나!”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녀의 의도를 깨달은 은현이 황급히 레지나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고 말하고 싶은 듯이, 숨을 들이쉰 상태를 유지하던 레나트가 은현을 비웃었다.

이윽고 참아왔던 숨결을 있는 힘껏 토해내자.

[용족 비기]

[드래곤 브레스]

무너지는 동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폭염의 숨결이 레지나를 덮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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