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화 〉 391. 고대 마수(6)
* * *
우워어어어!
“물러서지 마! 버텨야 해!”
자신들의 수십 배가 넘는 덩치를 가진 거대한 거인의 난동에 땅이 뒤흔들리는 와중에도, 무기를 드는 엘프들은 굴하지 않고 키클롭스에게 달려들었다.
체격의 차이, 공격력의 차이, 방어력의 차이.
모든 것이 우월한 고대 마수, 키클롭스의 앞에서는 일 대 수천이라는 압도적인 수적의 우세조차도 비웃음을 유발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
하지만 숫자의 차이를 비웃을 정도로 그저 힘이 강하다고, 물리적인 무력의 차이가 역력하다고 엘프들과 키클롭스 사이의 판도가 키클롭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은 또 아니었다.
[엘븐가드 정령술]
[바람 요정의 날개]
바람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허공을 날아다니며, 재빠른 민첩성을 이용하여 키클롭스의 공격들을 요리조리 피했다.
키클롭스가 휘두르는 투박한 몽둥이는 몽둥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거대한 암석으로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돌기둥.
한번 직격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고 분쇄되어버릴 것 같은 위력의 둔기가 휘둘러지면서 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듣는 엘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다.
그 둔기를 인간을 상회하는 빼어난 민첩함으로 피하며 엘프들은 목숨을 걸고 키클롭스의 얼굴에 접근했다.
[엘븐가드 정령술]
[화염 요정의 성화]
활활 불타오르는 정령의 불꽃을 머금은 검이, 도끼가, 화살이 키클롭스의 피부를 태우고 살을 가른다.
그리고 아무리 단단한 피부를 가지며 압도적인 방어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는 거인에게도 취약한 부위가 당연히 존재했다.
모든 엘프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엘프 여왕, 레지나가 자신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각궁의 시위를 당기며 키클롭스의 다른 한쪽 눈을 조준했다.
[엘븐가드 정령술]
[바람 요정의 화살]
푸욱
우워어어어어!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섬광처럼 날아와 오른쪽 눈에 박히는 엘프의 화살에 키클롭스가 오른쪽 눈을 질끈 감으며 포효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키클로스의 감은 오른쪽 눈에서 흘러나온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며 바닥을 적신다.
급소인 안구를 찔렸기 때문인지, 고개는 물론 전신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키클롭스가 바닥을 강하게 찰 때마다, 진동하는 평원의 대지에 균열이 생겼다.
“여왕께서 거인의 급소를 명중시키셨다! 지금이야! 공격해!”
몸부림만으로 땅이 흔들리고 공기가 떨리는 재앙 그 자체에 맞서는 엘프들은 키클롭스가 보인 난동 속에서 생긴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저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을 차고 좌우로 무작정 휘두르는 둔기를 빠른 속도와 민첩함을 무기로 요리조리 피하며 계속해서 추가타를 가했다.
“실비아.”
[네.]
레지나는 조용히 과거 엘프였지만 환생을 하여 자신과 계약을 한 바람의 상급 정령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현재 엘프 여왕의 상태는 바람의 상급 정령인 실비아와 ‘동화’된 상태.
자연 친화력이 남다른 엘프이기 때문에 정령을 자신의 몸 안에 빙의시켜 정령의 모든 힘을 끌어내는 이 능력은, 동화한 정령의 등급에 따라 발휘할 힘의 수준이 남달라진다.
실비아와 동화한 레지나는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계속해서 키클롭스에게 타격을 주고 있었다.
“부탁해요.”
[알겠어요.]
자세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레지나와 동화하고 있는 실비아는 금방 엘프 여왕이 요망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실현했다.
화살도 걸려있지 않은, 그저 거대한 각궁의 빈 활시위를 당기자, 당긴 활시위에 정령술로 형성된 녹색빛의 거대한 화살이 걸러졌다.
[엘븐가드 정령술]
[바람 요정의 화살]
레지나의 각궁에서 다시 한번 발사된 요정의 화살이 올곧게 나아가며 키클롭스의 반대쪽 눈에 꽂힌다.
우워어어어어!
결국, 양쪽 두 눈을 당하자,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키클롭스의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졌다.
시력을 잃은 키클롭스의 공격에는 규칙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두 눈의 고통을 억지로라도 없애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성공했다!”
“우리의 여왕께서 거인의 두 눈을 빼앗았어!”
양쪽의 시력을 빼앗고 고대 마수를 거의 몰아넣으며 싸움의 승기가 엘프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을 때.
콰아앙!
키클롭스와의 교전에서 생겨난 여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굉음과 충격에, 키클롭스와 치열한 접전을 이어갔던 몇몇 후방의 엘프들이 몸을 멈칫거렸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불어오는 모래 먼지의 돌풍이 단숨에 주위를 덮쳤고, 레지나는 그 돌풍이 들이닥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은현과 일리아나가 고르곤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장소.
키클롭스에 버금가는 거구였던 고르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평원의 대지를 분쇄해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된 광경을 목격한 레지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선생님이 정말로 해내셨구나….”
애초부터 은현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비롯한 엘프들 수천이 맞서며, 겨우겨우 키클롭스와의 전황을 자신들 쪽으로 기울였던 것과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
단 두 명만으로 고대 마수를 자신들보다 빨리 처리를 했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믿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게다가 고대 마수 간의 전력 수준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두 눈에서 쏘아내는 마안의 석화 광선으로 주위를 모조리 돌덩이로 만들어버리는 위험한 능력을 지닌 마수가 키클롭스와 비교를 했을 때 더 껄끄러웠으면 껄끄러웠지, 절대로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레지나의 생각이다.
[정말로 많이 강해졌구나….]
레지나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던 실비아의 중얼거림은 기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뒤로 약 300년의 시간 동안 저 정도의 힘을 쌓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했을까.
분명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력과 경험을 통해서 이룩한 경지일 터.
함께 살았던 생전의 옛 동거인에 대해 혼자만 애틋한 마음을 품어왔던 실비아이기 때문에, 은현의 성장에 기뻐하면서도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공존했다.
이 싸움이 끝난 뒤에, 300년 만의 해후를 풀어야 하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실비아는 어째서인지,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여, 역시 해후는 다음으로….]
“마음의 준비. 해두세요.”
[여왕님!]
“선생님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고 있어요. 어째서 그렇게 피하기만 하는 건가요?”
[그건….]
실비아도 스스로 자신의 기분을 설명하지 못했다.
다크 엘프의 인질로 붙잡혔었던 그때는, 종족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을 그어 자결하는 것을 선택했다.
은현과의 생활보다, 종족의 미래를 우선시했던 자신이, 떳떳하게 은현과 다시 대화할 수가 있을까.
정말로 뻔뻔하기 그지없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당신의 그런 마음.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상태에서는 조금 답답해요. 어떻게 되든 그냥 빨리 결착을 지었으면 좋겠네요.”
[너, 너무해요!]
어떻게 되든 이라니, 실비아는 정말로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실비아를 레지나는 피식 웃으며 위로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선생님은 당신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낼 남성으로 보이시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은현이 상냥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불만과 원망을 쏟아낼 정도로 이기적이고 사려가 깊지 못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은 실비아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비아 자신이 자신의 양심을 콕콕 찌르고 있는 복잡한 문제다.
“선생님과 제대로 대화를 끝내기 전까지, 실비아, 당신을 역소환시키지 않고, 계속 이곳에 붙들어둘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적어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레지나는 실비아의 요망을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알겠어요.]
결국, 포기해야 하는 쪽은 실비아였다.
◆ ◆ ◆
키아아아아!
가느다란 성대를 가진 뱀이 내는 날카로운 포효.
에밀리아는 그 포효를 내지르는 아홉 마리의 뱀을 응시하며 쉬지 않고 자신의 인형들과 골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처음 은현의 투창과 옵티머스의 캐논 사격에 직격하여 터져버린 머리는 어느새 재생된 상태.
히드라의 강한 특성인 ‘독성’은 그저 주위에 닿기만 하더라도 대지를 오염시키고 자연이든 생물이든 가리지 않고 녹여버리는 강한 산성을 지녔으나, 신철(??) 오리하르콘으로 제작된 인형들과 골렘들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이처럼 계속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독성’ 다음으로 성가신 ‘재생력’을 상회할 수 있는 결정타가 인형 부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아무리 아홉 개의 머리 중 하나를 제거해도, 꼬리는 물론, 몸통 부위를 훼손시켜도 재생하는 마수를, 에밀리아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전술 플랜 G3을 로드.”
히드라를 죽이기 위한 시도는 이것으로 17번째.
이것이 막힌다면 또 다른 방법과 전략을 고안해내어 다시 시도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서로에게 결정타를 선사하여 이 싸움을 끝장내지 못하는 것은 에밀리아나 히드라나 마찬가지.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인형 소녀는 이 상황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현에게서 받은 명령은 3분 이상의 교전으로 시간을 끌어 히드라를 엘프들에게 접근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 명령을 수행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마스터인 은현의 적인 저 아홉 머리의 뱀을 자신의 부대가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인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인형 소녀이지만, 에밀리아는 분명 ‘짜증’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플랜을 개시하려 했을 때.
[검은 마녀 고유 마법]
[블랙 큐브]
전후좌우, 상하의 전 방위로 히드라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하는 검은색의 반투명한 정육면체의 결계.
이윽고 정육면체 결계의 크기가 점점 축소되고, 내부의 압력은 점점 강해졌다.
동시에 내부에 존재했던 히드라의 몸이 점점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키, 아아!
그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또한 불가능.
애초에 몸부림이라는 것을 칠 수 있을 정도로 블랙 큐브 내부의 공간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전신을 압박한 정육면체의 결계는 히드라가 머리나 꼬리를 꿈틀거릴 수 있는 작은 틈조차도 주지 않고 강하게 압박했다.
마침내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점점 찌그러지는 히드라의 아홉 머리에서 눈알 열여덟 개의 눈알이 튀어나오고, 전신에서 터져버리는 검붉은 마수의 피가 블랙 큐브의 내부를 흥건히 적셨다.
아무리 베고, 찌르고, 뜯어내도 재생하는 막강한 회복력을 보유한 히드라를 공략하는 방법으로 은현이 내놓은 해결책은, 머리와 몸통, 꼬리를 비롯한 내부의 장기까지 동시에 모조리 파멸로 몰아넣는 일리아나의 압도적인 고유 마법이었다.
“…….”
에밀리아는 오토골렘들과 도미너스 부대의 인형들의 행동을 일제히 정지시켰다.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정체를 모르는 결계의 마법.
하지만 그 마법을 발현시킨 마력은 에밀리아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서브마스터의 마력이다.
“3분. 잘 버텼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은현과 일리아나의 모습을 확인한 에밀리아는 자신의 명령이 완수되었다고 판단하고 인형과 골렘들의 행동을 정지시킨 것이다.
“…….”
“왜 그래?”
“아직 부족합니다. 더 강력한 전력의 보강을 요구합니다.”
“너는 뭐 이 대륙을 손에 넣으려는 악의 세력이라도 되냐?”
무언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건의해오는 에밀리아의 발언에 은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에밀리아는 히드라를 자신의 무력으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심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지만, 그것은 히드라가 마수들의 정점에 군림하는 고대 마수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존재였기 때문.
이미 옵티머스와 범블비를 비롯한 인형 부대의 전력은 마음만 먹으면 공작령 규모의 영지 정도는 간단하게 괴멸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솔직히 옵티머스와 범블비야 자신의 취미 수준으로 제작함과 동시에, 에밀리아의 전력 강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이쪽 분야에 꽤 진심처럼 보였다.
“마스터의 적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본 개체와 본 개체의 부대는 더욱 강한 전력을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인격이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있다는 인형 소녀의 강력한 건의에, 은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생각해보자.”
은현은 흘끗 시선을 옆으로 옮겨 엘프들과 키클롭스의 전황을 살폈다.
승기는 완전히 엘프들 쪽으로 기울어 싸움을 끝내가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을 때, 일리아나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괜찮아?”
일리아나가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려는 것을 은현이 지탱하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뭐, 조금…. 피곤하네.”
삼중창을 한계의 한계까지 유지하며 머릿속 연산능력을 모조리 끌어다 쓰고, 결국에는 상위 자릿수의 마법들을 펑펑 쓴 결과, 마력까지 모두 소모하게 된 일리아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신의 탈력감을 맛보고 있었다.
“고생했어.”
“응.”
일리아나는 자신의 몸을 상냥하게 안아 들어 올리는 은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 싸움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은현도 아니라 일리아나다.
“나 잠 좀 잘게.”
“그래.”
일리아나의 두 눈이 천천히 감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