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화 〉 389. 고대 마수(4)
* * *
과거 자신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여성 엘프, 실비아의 모습을 한 상급 정령.
은현은 그 상급 정령을 보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파악했다.
“…그래. 환생했구나.”
죽음이라는 영면을 맞이하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엘프들 중, 아주 간혹 정령으로 환생이 되는 경우가 존재한다.
은현도 말로만 듣고 실제론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흔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닌, 극히 드문 케이스.
고개를 돌린 실비아의 두 눈이 은현과 마주쳤다.
[……!]
어깨를 들썩이며 움찔 떨던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자신과 계약을 맺어 이 장소에 이 순간 소환한 엘프 여왕, 레지나를 바라보며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추궁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서 끙끙대실 건가요.”
레지나는 피식 웃으며 실비아를 설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무리는 제대로 지으셔야죠.”
“…그렇지.”
레지나의 이야기를 들은 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허공으로 시선을 옮겨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실비아.”
[응….]
‘이제는 누나라고 불러주지 않는구나….’
실비아는 살짝 아쉬운 기분을 느꼈지만, 자신이 죽은 이후로 시간은 300년이 넘게 흘렀다.
이제는 은현 쪽이 나이가 더 많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최대한 아쉬운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얘기해요. 도망가지 말고. 제대로.”
[아, 알았어….]
300년 만에 다시 하게 된 대화 속에서, 실비아는 우물쭈물한 태도를 보이며 답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형태로 다시 재회한 과거의 인연과 다음을 기약하고, 은현은 다시 이곳을 향해 접근해오는 고대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된 해후는 눈앞의 적들을 모두 처리하고 웃으면서 풀어야 한다.
“일리아나. 가자.”
“알았어.”
[은현 고유능력]
[시간 가속]
[네자릿수 하위 마법]
[플라이]
허공에 떠오르는 스태프 위에 앉은 일리아나와 함께 은현은 빠른 속도로 결계 밖으로 나갔다.
고르곤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던 도중, 강한 바람의 저항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게 만든다.
“방금 그 정령이 그 엘프야?”
“…….”
바람을 가르는 소리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일리아나의 질문은 똑똑히 은현의 귓가에 꽂혔다.
그 질문을 똑똑히 들었음에도, 은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현재의 아내에게 과거에 동거했던 전 여자의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은현의 심경이 매우 복잡했다.
“뭘 머뭇거려?”
“아니, 그게….”
“나도 알아. 너랑 인연이 있는 엘프였다는 거.”
“…….”
베르단디에게서 엘프의 숲에 체류했었던 은현의 과거사를 들은 일리아나는 당연히 실비아에 관한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좋아했어?”
“…좋아했지.”
마수를 향해 달려가면서, 은현은 일리아나의 질문에 솔직히 답했다.
거짓말보다는 자신의 그때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낫다고 내린 결론이다.
“그건 사랑이었어?”
“…잘 모르겠어.”
은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실비아는 자신에게 있어 특별한 여성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성으로 생각하는 애정의 감정이었냐고 묻는다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애정이었을까, 아니면 우정이었을까.
그 경계에 서 있었던 모호한 감정.
스스로 그 감정이 무엇인지 자각을 하고,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그것을 잃었다.
그로부터 300년을 가까이 도망쳐 지금에 도달했다.
나름대로 결착을 지었다고 생각했음에도 가슴 속에 떠오르는 것은 혼란함이다.
게다가 이러한 이야기를 현재 아내의 앞에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혼란스럽다.
“일리아나. 나는….”
“괜찮아.”
“뭐?”
“이제 와서 복잡한 네 과거 이력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말할 생각은 없어.”
은현의 400년이라는 세월 동안 겪었던 시간의 무게를 일리아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그가 다른 여성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일선을 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랬으면 은현이 그렇게 정신적으로 내몰렸을 리가 없다.
“저 마수만 처리하고 나면 제대로 마무리 짓고 와. 제대로…멀쩡하게 내 곁에만 돌아와 준다면 나는 다 봐줄 수 있어.”
“…….”
다시 한번 자신을 떠나지 않고, 제대로 곁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뭐든지 괜찮다는 일리아나의 배려와 결의의 무게는 절대로 적지 않다.
“네 사랑이 무겁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편의적인 신뢰와 애정을 보여오는 일리아나의 마음은 언제나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부담스럽다.
“흥. 겨우 이 정도로?”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 일리아나의 말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평원을 달렸다.
[그만큼 아이를 존중해주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그녀를 옹호해주는 베르단디의 애정이 어린 말까지 들으니,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일단 네 옛 여자와의 인연을 마무리하기 전에, 저 마수의 처리부터 해야겠지?”
“표현에 가시가 돋쳐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뭐, 계속 입 다물고 있어 줄까?”
“…그건 그거대로 무섭네.”
피식 웃으며 장난식으로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정말 진심으로 한번 삐치기 시작해서 역정을 낸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풀어주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은현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일리아나의 권유대로 눈앞의 마수를 처리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리아나, 주문의 캐스팅 더 할 수 있겠어?”
석화 광선을 상쇄시킨 반사 장벽을 해제시켰다고는 하지만, 히드라의 독성을 차단하는 장벽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상태.
게다가 허공을 나는 마법을 실시간으로 유지하고 있는 일리아나에게는 소모되는 마력의 양도 양이지만, 더욱 부담되는 것은 머릿속에 가해지는 정신력이다.
“물론.”
“역시 내 아내야.”
“띄워주려고 해도 늦었어.”
하지만 은현의 말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조심해.”
“누구보고 하는 소리야. 너나 조심해.”
고르곤의 공략에서 더 큰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일리아나가 아닌, 은현이다.
“알았어. 그럼 시작하자.”
전방을 향해 돌진하는 은현과 고르곤 사이의 거리는 겨우 500m.
키아아악!
은현의 모습을 발견한 고르곤이 사나운 포효를 내지른다.
그를 덮쳐오는 고르곤의 수천, 수만의 머리카락은 모두 살아있는 뱀의 머리들.
은현은 자신의 권능을 사용했다.
[역사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
[소환, 모랄타크와 바랄타크]
양손에 쥐어지는 두 자루의 쌍검이 은현의 신력을 머금고 은색의 신성한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재현된 역사는 고대의 옛 영웅이 사용했다는 무시무시한 두 자루의 쌍검.
일격필살, 초격필승의 역사가 있는 쌍검은 단순히 뽑아 든 것만으로도 사용자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고 적대자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는 강력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상대가 인간들 사이였을 때의 분쟁이라는 조건이 붙지만.’
그래도 고르곤의 뱀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것에 적합하며, 자신이 이용하기 편한 쌍검은 현재로서 이것만큼 유용한 무기가 없다.
서걱.
검을 휘두르자, 너무나도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뱀의 머리는 그만큼 터무니없는 절삭력을 의미한다는 뜻.
[은현 고유능력]
[사고 가속]
감지를 통해 주위의 모든 사물을 인식하고, 무엇을 공격할지, 어떻게 막아내고 피해내야 할지, 사고 처리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은현만의 싸움방식.
자신의 몸을 물어뜯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덮치는 뱀들을 하나하나 베어나가며 앞으로 나간다.
[시에테 검성술]
[환상검무(????)]
검을 이용해 베어내는 뱀 머리카락의 숫자는 순식간에 10을 넘어, 40, 160, 640으로 불려 나갔다.
키릭!?
뒤늦게 고르곤도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조리 베어내면서도, 올곧게 먼 거리에 있는 자신을 응시하는 한 인간의 눈동자를 발견하고 오싹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
저것은 위험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수도 없이 짓밟아왔던 생명체 중에 하나.
한낱 미물에 불과한 무력한 생명체가 아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위 개체의 존재.
마수로서의 생존 본능의 경종을 울리는 위험한 존재라고, 고르곤은 무의식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키아아아악!
가슴 속에 피어난 공포를 얼버무리기 위해, 고르곤은 더욱 포효하며 더욱 많은 수의 뱀 머리카락을 보내어 압박했다.
서걱
하지만 은현은 그 뱀들을 모조리 베어내며 상처하나를 입지 않고 유연한 대처를 이어나갔다.
전후좌우와 상하의 전 방위에서 덮쳐오는 수천 마리나 되는 뱀의 이빨을 피하고, 머리를 찌르고, 몸통을 베어내는 광경은 끝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이어지는 흐름의 연속이다.
은현의 몸에 상처 하나를 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의 뱀들을 느낀 고르곤은 더욱 조급함을 느꼈다.
키아아악!
은현의 전방위를 둘러싸며 전신을 물어뜯기 위해 살벌히 달려들었던 뱀 머리카락들이 물러남과 동시에, 다시 한번 흉측한 얼굴의 두 눈에 응집되는 검붉은 마력의 빛.
아까 전 숲을 향해 쏘았던 ‘석화의 마안(??)’의 광선이다.
자신을 향해 쏘아진 빛의 광선을 본 은현은 곧바로 신의 방패를 꺼냈다.
[신의 무구]
[아이기스]
일곱 여신 중 미네르바에게서 하사받은 신의 방패를 자신의 앞에 형상화했다.
콰아앙!
석화 광선과 아이기스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강렬한 굉음.
광선의 파괴력이 가져다주는 묵직한 충격은 아이기스를 지탱하고 있는 팔이 뒤로 밀려날 수준의 위력이다.
설마 아이기스가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은현은 신력을 더욱 주입시켜 아이기스의 방어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고르곤의 공략에서 은현이 맡은 역할은 ‘버티는 것.’
그냥 버티는 게 아니라, 고르곤의 시선을 모조리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온 신경을 쏟게 만들어 빈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은현의 목표다.
자신이 앞쪽에서 고르곤의 신경을 모조리 독차지하고 있는 동안, 일리아나는 은현의 뒤, 먼 거리에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그렇기에 평소의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속에 존재하는 대량의 기운을 무식하게 방출시키며 수백, 수천의 뱀 머리카락을 학살하고 고르곤의 시선을 마주했다.
고르곤이 쏘아낸 석화 광선이 마침내 아이기스를 뚫지 못하고 허공 위로 튕겨 나간다.
석화 광선과 아이기스의 충돌로 인해, 평원은 휘몰아치는 모래 먼지로 뒤덮였다.
키릭?
황급히 고르곤이 뱀들을 조작하여 전방에 뒤덮인 먼지 바람을 모조리 걷어냈지만, 아까까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마수의 생존 본능을 강하게 울렸던 은백색 머리카락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르곤은 뒤늦게 전방의 평원 바닥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무언가가 해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며, 허공으로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키, 키릭!?
고르곤의 두 눈이 포착한 것은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얼음의 송곳이다.
내부가 훤히 보이는 투명한 얼음으로 조형된 터무니 없는 질량.
해시계 방향으로 맹렬히 회전하며 바람을 갈아버리는 듯한 살벌한 소리의 연속.
[여섯자릿수 상위 마법]
[프로즌 스파이럴]
그리고 그 얼음송곳의 옆, 허공에 떠 있는 스태프 위에 다리를 꼬고 요염하게 앉아있는 흑발의 마녀는 무감정한 시선으로 고르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서 눈치채봐야 늦었어.”
딱
대기중의 모든 수분을 응집시키고, 동결시킨 끝에 완성된 거대한 나선형 얼음송곳이 바닥을 낙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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