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화 〉 386. 고대 마수(1)
* * *
“어떻게 보면 마수들 또한 생명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주위의 환경에 따라 서식하는 마수는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는 본능의 생물.”
적응이란 ‘생물체’가 서식 환경에 보다 유리하도록,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는 생물학의 기본 개념이다.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그 환경에서 살아갈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변화시킨다.
대표적으로는 먹이를 씹기 위해 발달 되는 포식자의 어금니나, 그 포식자로부터 재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발달 된 다리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근데 그거는 더욱 강한 개체로 진화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생존을 위해서 몸을 변화시키는 방식이 자신의 몸을 강화나 진화시키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건….”
“마수의 경우에는 그 반대야.”
진화의 반대는 퇴화를 의미하는 것.
“…생존을 위해서 퇴화를 선택했다고?”
일리아나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마수의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은 바로 막대한 양의 오염된 마나야.”
마치 인간이 생명 활동을 하기 위해서 밥을 먹고 열량을 섭취하는 것처럼, 마수들 또한 오염된 마나를 집어삼켜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삼는다.
현재 대륙에 출몰하는 마수들의 기원이 된 고대 마수는 현재의 마수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덩치와 힘을 가졌다.
그 덩치와 힘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보충되는 양과 소모되는 양의 불균형 속에서 마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현재의 형태로 퇴화되기 시작한 거지.”
좀 더 힘의 소모를 줄일 수 있도록 덩치가 줄어드는 것은, 전체적으로 약해진 마수들이 살아남기 위한 짐승의 생존 본능과도 같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퇴화되어버린 마수들을 잡아먹으면서 자신의 힘을 유지하고, 마수들의 정점에 서 있었던 존재들도 있었다.
“물론 대륙에 출현했던 과거의 고대 마수가 아예 개체 수가 줄어들면서, 스스로 멸종해버린 것은 아니야. 동족 포식을 통해서 자신의 생존을 이어나갔던 고대 마수들은 어느샌가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자연의 어떤 존재를 감지한 게 시작이었어.”
“…자연의 어떤 존재.”
일리아나는 은현의 표현에 곧바로 머릿속으로 어떤 나무를 떠올렸다.
자신이 직접 부활시킨 엘프들의 신목.
“설마 세계수?”
“맞아. 과거 고대 마수들은 세계수가 품고 있던 막대한 마력들을 오염시키면서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엘프들의 숲을 공격해왔지.”
“설마, 그때도 너 있었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흘겨보는 일리아나의 질문에 은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던 것은 당시 고대 마수의 침략을 경험했던 세대인 데르킨이었다.
“…그때는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데르킨은 찡그린 인상을 풀지 않으며 300년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당시 은현님은 실비아님의 아….”
순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젊은 엘븐 레인저 엘프와 함께 앞장을 서서 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며 직접 은현의 눈치를 살필 수는 없었지만, 뒤쪽의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데르킨이 괜히 쓸데없는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는 것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한동안 함께 여행했던 실비아의 소개로 달의 마을에 체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
“…흐응.”
이미 은현에게서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연인 같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한동안 한 집에서 동거를 했었다는 여성 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일리아나의 마음속에 기묘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일리아나는 그 이야기는 잠시 가슴 속에 접어두고 나중에 추궁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고대 마수에 대한 이야기다.
“계속해봐.”
지금은 넘어가주겠다는 일리아나의 말투에, 은현은 계속해서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때도 세계수가 자신을 노리는 위협적인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엘프들에게 알렸고, 나와 엘프들은 고대 마수들로부터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싸웠지.”
“나무가 말도 해?”
“아니. 직접 엘프들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한 건 아니야. 정령들을 통해서 세계수가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 거니까.”
엘프의 마을, 또는 숲에 존재하는 정령들은 모두 세계수에게서 마력을 공급받아 태어난 정령들이며 세계수는 정령들의 모체나 다름이 없다.
그 정령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고대 마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도록 간접적으로 엘프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삶의 터전을 비롯해 정령들까지 많은 은혜를 내려주는 세계수의 의지를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규율이다.
이 규율을 중시하며 엘프들을 통솔해서 세계수의 의지를 떠받드는 것이 바로 엘프 여왕의 역할.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뭣하지만, 저희 엘프들은 굉장히 폐쇄적인 종족입니다.”
인간은 물론 다른 타종족들 조차 삶의 터전인 엘프의 숲에 들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세계수의 힘으로 형성된 결계 속에 숨어서 인간들에게 노출되지 않으며 평생을 살아간다.
“그런 저희가 은현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300년 전 당시, 고대 마수와 저희 엘프들의 싸움에서 큰 도움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긴.”
처음 이 숲에서 엘븐 가드 엘프들과 조우했을 때, 심각하게 경계의 기색을 띄웠던 엘프들 중, 은현을 알아본 데르킨이 반갑게 은현을 맞이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럴 법도 하다.
“네.”
재차 물어보며 확인을 끝낸 일리아나가 자신을 업고 있는 은현에게로 시선을 옴겼다.
두 눈을 흘겨보는 일리아나는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난 아직도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네.”
“안 물어봤잖아.”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더 얄미워.”
뺨을 꼬집으며 잡아당기며 해오는 응징에도, 은현은 피식 웃으며 아내의 손장난을 제지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엘프 여왕님이 너에게 직접 통신을 걸어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알았어.”
300년 전의 고대 마수와의 싸움에서 크게 활약한 은현의 도움을 다시 한번 받고자 미안함과 수치를 무릅쓰고 부탁을 해온 것이다.
수백 년을 살며 오랜 경험과 지식 그리고 마력을 축적하면서, 장수하는 지혜롭고 고결한 종족을 대표하는 여왕이 인간인 개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레지나는 망설임없이 결단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그것은 자신이 책임져야하는 동족들과 삶의 터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엘프 여왕의 결단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네가 나서면 그 고대 마수라는 것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거야?”
“글쎄. 그건 레지나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고대 마수의 출현을 예견한 정보를 사전에 듣기는 했지만, 세계수가 어느 정도의 위험을 느꼈는지 등의 자세한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레지나에게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생각이었다.
“너는 항상 그렇게 확답을 내려주지 않더라. 항상 모두 자기 계획대로 흘러가도록 상황을 만들고 판을 짜면서.”
“사람 일이 항상 쉬운 일만 있냐.”
“…그건 그렇지.”
일리아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은현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 속에서 경험했던 수많은 역경은 하나 같이 한번을 넘기기 힘든 위험천만한 일들이 가득한 경험들 천지였다.
그중에서 일리아나가 가장 싫었던 경험을 꼽으라면, 제국의 황제와 전투를 벌였던 마지막 싸움이었다.
제국의 황제가 강했던 것도 정말 싫었지만, 일리아나가 그때의 그 마지막 싸움을 가장 싫어했던 이유는 그 싸움 속에서 은현의 시체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끝에는 그 자신도 죽음을 맞이했을 정도로, 그의 경험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번엔…이상한 생각이나 계획 같은 거. 안 세워뒀다고 믿을게.”
등에 업혀있는 일리아나의 양팔이 은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은현은 웃으며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했으니까.”
고대 마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치자, 은현과 일리아나는 데르킨과 엘븐 레인저 엘프의 안내를 통해 다시 한번 달의 마을에 진입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은인분.”
곧바로 숲의 회랑으로 향하여 중심의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레지나가 은현과 일리아나를 맞이했다.
“현재 어수선한 저희의 사정 때문에 환영을 해드리지 못한 점.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괜찮아. 상황이 상황이니까.”
은현은 손을 내저으며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고는 곧바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바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알겠습니다.”
◆ ◆ ◆
쿵!
숲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펼쳐진 넓은 평원.
“…세상에.”
그 평원을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낸 거구의 생물체를 보고, 한 엘프가 입을 벌렸다.
햇빛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는 큰 충격이었지만, 엘프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따로 있었다.
한 발자국 씩 앞으로 내딛으며 점점 숲에 가까워질 때마다, 거리가 좁혀지고, 좁혀지면 질수록 대지를 진동시키는 거구의 몸체들이 점점 커져만 갔다.
“…저게 뭐야?”
고대 마수와의 사투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젊은 엘프들처럼 일리아나 또한 비슷한 표정으로 경악을 드러냈다.
아르미타스령의 거대한 성벽 따위는 간단하게 파괴해버릴 것 같은 거대한 외눈박이의 거인.
쿵! 쿵!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점점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인은 올곧게 숲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외눈박이 거인의 양 옆을 따라오고 있는 마수들의 형태 또한, 매우 기괴하다.
하체는 뱀의 형상을 가졌으나, 상체는 인간 여성의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기괴한 것은 일그러진 추악한 외모와 머리카락 대신 존재하는 수천 마리의 뱀이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아홉 개의 흉악한 뱀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꼬리를 꾸물거리며 앞으로 다가올 때마다, 주위의 대지를 녹여버리고 오염시키는 흉악한 독기를 내뿜는 광경은 공포를 넘어서 절망 그 자체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싶은 재앙들이 점점 앞으로 다가오며 그 흉측한 거구로 숲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다.
“저것들과…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마수의 수는 겨우 셋.
하지만 그 셋만으로도 엘프들의 전의는 완전히 꺾여나가고 있었다.
엘븐 가드를 포함하여 전투가 가능한 모든 엘프를 끌어모아 준비시킨 병력의 수는 약 천 명.
지난번 다크엘프와의 항쟁에 나섰던 병력의 배가 되는 숫자였지만.
“무리야….”
젊은 엘프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했다.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 세계수와 숲을 지킬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재앙은 자신이 목숨을 불태워서 싸운다고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의 재앙이 아니라는 것을 두 눈으로, 코로, 귀로, 피부로 인식한 것이다.
그 재앙의 숫자도 하필이면 하나가 아닌 셋.
저것들과 싸운다는 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닌,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그저 개죽음에 불과하다.
목숨을 불태워도 사명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자각한 엘프들은 공포로 무기를 쥐고 있던 손들이 덜덜 떨렸다.
그런 가운데, 재앙들을 향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 것은 단 두 명 뿐이었다.
“고르곤, 퀴클롭스, 히드라. 그래도 다행이네. 상정한 범위 내야.”
“…솔직히 제국의 황제와 다시 싸우라고 하면 기꺼이 그쪽을 고르겠는데.”
담담한 표정과 기가 질린 표정을 짓는 두 부부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기가 질린 표정을 짓는 쪽은 당연히 일리아나다.
자신이 경험했던, 가장 힘들었었던 최악의 경험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눈앞의 재앙은 참담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빠져도 돼.”
“흥. 그거 농담하는 거지?”
꽉 쥐고 있던 스태프를 앞으로 들어올리며, 일리아나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가는 길이 이제는 내가 가는 길이야. 너 죽을 때도 내가 쫓아갈거니까, 명심해둬.”
“그, 그래….”
가끔 느끼는 거지만, 아내의 사랑이 너무 무거울 때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재앙에 공포로 온몸이 굳어 있는 엘프들 사이에서, 데르킨과 함께 하나 둘씩 은현을 뒤따라 앞으로 전진하는 엘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두 근 300년 전, 은현과 함께 고대 마수 토벌을 경험했던 엘프들이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고마워.”
모든 엘프들을 대표하여 자신에게 굳건한 신뢰를 보인 데르킨의 말을 들은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현은 허공에 손을 내뻗어 자신의 권능인 열쇠를 소환했다.
하계의 섭리를 비틀어 과거의 역사를 재현할 수 있는 은현이 창조해낸 권능.
‘베르단디님.’
[그래.]
은현의 부름에 답하여 베르단디는 허공에서 은현의 등을 꽉 끌어안아주었다.
가슴 속에 가득 채워지는 신력을 느끼며, 은현은 자신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드디어 이 널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왔구나.’
은현이 자신의 권능으로 이 열쇠를 제작한 이유.
그것은 소멸을 각오하고 몸을 바쳐가며 사명을 완수했던 자신의 옛 친구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 때문이다.
[역사를 재현하는 신의 열쇠]
[소환, 신창(??) 브류나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