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화 〉 385. 세계수의 위협(2)
* * *
이야기를 마친 은현은 곧바로 옆 건물의 손님용 건물로 들어가, 수술 이후 요양을 중인 앨리스와 데르킨 부부를 찾았다.
엘프 여왕, 레지나의 사정을 들은 데르킨은 얼굴을 굳혔다.
“그…렇군요.”
“너한테 굳이 따라오라는 강요는 하지 않아. 너한테도 지금은 중요한 순간일 테니까.”
머릿속으로 많은 고민을 하던 데르킨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앨리스의 눈 수술이 끝나고, 경과를 지켜보는 중이 한창인 지금, 자리를 비우기가 꺼려지는 것은 남편으로서 당연하다.
하지만 그 고민은 깊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뇨. 가겠습니다. 저는…앨리스의 남편이기도 하지만, 엘프입니다. 그리고 엘븐가드 수색조의 조장이었던 몸이기도 하죠. 게다가….”
데르킨은 생각을 굳힌 얼굴로 은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고대 마수가 근 300년 만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우리 종족에서, 숲에서도 큰 문제입니다.”
데르킨은 은현이나 레지나와 함께 이전 고대 마수의 존재를 목격했었던 전적이 있는 장년층의 엘프 중 한 사람이자 중요한 전력이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은현님.”
은현의 의미심장한 말투를 들은 데르킨은 무언가가 걸려 은현을 되불렀다.
이내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저는…앨리스의 남편이기도 하지만, 엘프입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 말의 의미는 엘프라는 종족이 공동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뜻하는 말이다.
개인의 안위보다는 종족의 안위를 우선시하며, 서식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불사를 수 있는 각오를 다지는 종족.
그것이 엘프다.
데르킨이 종족의 안위가 걸린 위협의 존재를 들었음에도, 곧바로 답을 내놓지 못하고 망설인 것은, 그만큼 그가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은 필멸자인 인간 여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반증이다.
게다가 은현은 과거 300년 전에, 소중한 엘프 한 명을 잃어버린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당연히 데르킨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사연이다.
“혹시…. 아직도 실비아의 일을….”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이제는 괜찮아.”
우려가 섞인 데르킨의 질문에 은현은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제대로 마무리했으니까.”
신혼여행으로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를 데려가, 그녀의 유해가 묻혔던 세계수의 앞에서 나름대로 결착을 맺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오는 죄책감과 슬픔이 가득했던 실비아와의 추억은 이젠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좋은 추억으로 바뀌었다.
은현은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준비해. 내일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니까. 아내와 딸에게도 제대로 설명을 해두고.”
“알겠습니다.”
은현이 자리를 떠나고, 데르킨은 은현과 대화를 했던 책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내와 딸인 앨리스와 에리스의 얼굴이 머릿속으로 떠올라 중요한 시기인 지금 자리를 떠야만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지금.
둘에게 현재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미안했다.
‘가족의 행복과 종족의 위협 중에서 어느 쪽을 더욱 우선해야 하는가?’라는 난제는 그만큼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앨리스가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오셨어요?”
침대 위에 함께 누워있는 에리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던 앨리스가 웃으며 데르킨을 반겼다.
기적을 경험하여 시력을 복구하면서, 새근거리며 잠들어있는 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많이 담으려고 밝게 빛나고 있는 녹색의 눈동자는 눈이 부셨다.
저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자신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딸의 탄생 이후로 지금의 데르킨에게 준 두 번째 행복이다.
“…….”
“여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데르킨의 시선에 앨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은현님과 이야기를 하고 오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데르킨을 둘러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한 앨리스가 곧장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자, 그제서 데르킨은 입을 열었다.
“…은현님과 함께 숲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숲인가요? 갑자기 어째서요?”
데르킨이 말한 숲의 말이 ‘엘프들의 숲’을 칭한다는 것은 앨리스 또한 알고 있었다.
앨리스가 신경이 쓰였던 점은 어째서 지금인 걸까.
“여왕께서 은현님께 도움을 요청하셨어.”
레지나의 구원 요청과 세계수가 위험을 감지했다는 것, 그리고 고대 마수에 대한 설명을 들은 앨리스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굉장히 위험하겠네요.”
“미안해. 나는…가봐야 할 것 같아.”
“괜찮아요.”
“앨리스….”
미안함이 가득한 데르킨의 표정을 본 앨리스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여보. 저는 당신의 아내니까요.”
앨리스는 인간 여성에 불과하지만, 엘프를 남편으로 맞이하면서 엘프들의 사고방식과 사회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바였다.
엘프들의 터전이 위험에 처해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딜레마에 빠진 남편을 붙잡을 정도로, 앨리스는 그렇게 어리석은 여성이 아니었다.
“월계수 잎이 들어간 사과 샐러드가 먹고 싶어요.”
“어?”
느닷없는 앨리스의 말에 데르킨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숲에서는 자주 먹었었는데. 이곳에 오고 나니까 다시 생각이 나더라고요.”
“…….”
“오실 때, 가져와 주실 수 있죠?”
데르킨은 순간 할 말을 잃으며 멍한 표정을 짓더니, 앨리스의 말의 의도를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있도록, 자신을 배려해주는 아내의 재치에 감탄과 고마움, 미안함과 안타까움 등의 다양한 감정이 뒤섞이는 복잡한 기분.
그 기분을 가슴 속에 품으며 데르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가져올게.”
“네.”
이윽고 아내의 품에 안겨서 새근거리며 잠들어있는 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출발하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깨울까요?”
“아니. 괜찮아.”
천사처럼 예쁜 모습으로 자는 딸을 억지로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없는 동안은…그 녀석을 의지하도록 해.”
마치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순식간에 표정이 구겨지면서 이를 가는 남편의 얼굴이 자못 웃겼기 때문일까.
앨리스의 입가에 호선이 그어졌다.
데르킨이 말하는 ‘그 녀석’이 다름 아닌 엘빈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꽤 그를 신뢰하고 있네요.”
“그야…에리스가 따르는 녀석이니까.”
인간이 아닌, 인공 정령으로서, 인조 육체를 그릇으로 두고 있는 호문쿨루스가 어떠한 경위로 딸의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는, 데르킨이나 앨리스에게나 알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예전부터 그랬다.
두 부부의 딸인 하프엘프 소녀는 본인들도 신기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특이한 안목을 가지고 있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지만…. 에리스의 선택이니,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스스로 중얼거리는 말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밀어내고 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인공 정령이 정말로 아니꼽지만.
딸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실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자신의 피붙이인 어린 하프 엘프의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응….”
데르킨의 손길을 느꼈는지, 조금 뒤척이며 더욱 앨리스의 팔을 끌어안는 에리스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련하고 사랑스러워서, 데르킨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피었다.
이 얼굴을 계속 보고, 성장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기 위해서, 자신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하게 결심했다.
데르킨은 아내와 딸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 월계수 잎과 숲에서 직접 재배한 사과도. 이번에 잔뜩 가져올게.”
“네. 다녀오세요.”
아내의 격려가 담긴 배웅을 받으며, 데르킨은 방을 나섰다.
◆ ◆ ◆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리아나의 텔레포트를 이용해, 초장거리에 위치한 엘프의 숲 입구에 도착한 은현과 일리아나, 데르킨의 셋을 맞이한 것은, 보초를 서고 있던 엘븐가드의 엘프 레인저였다.
이미 출발하기 전에 연락을 넣어두었기 때문인지 엘프들 쪽에서도 은현을 맞이하기 위해 신속한 대응을 보여왔다.
“레지나는?”
“여왕께선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신들의 종족을 대표하는 여왕의 이름을 서슴없이 부르는 인간에 대한 태도는 한없이 정중했다.
은현을 맞이하러 나온 엘프 레인저는 굉장히 젊은 축에 속해있었지만.
지난번 다크 엘프와의 사건 속에서 은현과 그의 아내들이 보여주었던 은혜에 대해 종족의 일원으로서 존경과 존중을 나타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엘프 여왕을 여왕으로써 성장시켜 기틀을 만들어낸 여왕의 스승이 제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도대체 누가 불만을 품을 수가 있을까.
“시간이 아까우니 좀 빠르게 이동하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젊은 엘프 레인저의 질문은 은현을 두고 염두에 두는 물음이 아니었다.
흘끗 시선을 옮겨 그의 뒤에 있는 그의 아내, 일리아나를 두고 하는 질문이었다.
은현은 그렇다 하더라도, 겉보기에는 육체파에는 어울리지 않는 마법사가 엘프들의 움직임을 따라올 수가 있을 리가 없다.
“괜찮아. 얘가 업을 테니까.”
“그, 그러시군요.”
손가락으로 은현을 가리키며 당당하게 밝히는 일리아나의 태도에 젊은 엘프 레인저는 살짝 당황했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은현의 등에 업히면서 자연스레 스킨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뒤늦게 생각해보니, 이들은 부부관계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지.”
“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내와 딸과 함께 숲을 나오기 전에, 엘븐 가드 수색조의 조장을 맡고 있었던 데르킨이 앞으로 나서기를 자처했다.
“알겠습니다. 수색 조장님.”
엘븐 레인저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업혀.”
“응.”
정식으로 안내를 받아 엘프의 숲 내부로 들어서는 과정은 지난번과는 달리 매우 수월했다.
본래라면 숲을 방문한 손님의 입장인 은현과 일리아나는 하룻밤 휴식을 취하고 곧바로 다음날 회의에 참석하도록 권유를 받았지만.
은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곧바로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곧바로 레지나를 만나도록 할게.”
“알겠습니다.”
애초에 텔레포트로 약 3시간 만에 엘프의 숲에 도착한 둘에게는 풀어둘 만한 짐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겨 곧바로 레지나가 있을 숲의 회랑으로 향하는 길.
주변에 보이는 엘프들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하나 같이 웃고 있지 않고 긴장한 기색의 역력하여 분위기 또한 매우 침체되어 있다.
일리아나는 이전에 한 번 찾아왔을 때도 조용한 숲이라고는 느꼈었지만, 이렇게 처진 분위기는 아니었었기에 의아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고대 마수라는 게 그렇게 위험해?”
“위험하지.”
적어도 대륙에 출몰하는 다른 마수들과는 다르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세계수가 직접 위기를 직감하여 엘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부터가 심상치가 않다.
“근 300년 만에 일어난 일이지.”
그만큼 드물기 때문에 쉽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때 이후로 절대로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대 마수가 도대체 뭔데?”
“현재 대륙에 출몰하는 마수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원인이 던전의 수용한계를 뛰어넘는 과부하로 인한 범람이라는 건 알지?”
“알지.”
그리고 그 마수들은 모두 ‘마계’라는 공허의 저편 너머에서 오는 해악의 존재들이다.
“고대 마수라는 건, 현재 대륙에 출몰하는 마수들의 시작점 같은 것들이야.”
“그건 또….”
듣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골치가 아파지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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