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 375. 가족의 얼굴(3)
* * *
수술이 시작되고 총 13시간이 되어서야, 수술실 안에서 세 사람이 나왔다.
데르킨은 이미 잠들어버린 에리스의 몸을 안아 들고, 피곤함이 깔린 적막을 깬 발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새빨갛게 물들어버린 파란색 수술복의 마른 피들이 누구의 것인지를 깨닫고 인상을 굳혔다.
“아내는…앨리스는…어떻게 되었습니까?”
혹시라도 잘못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감이 엄습했던 그때, 은현은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수술은 잘 끝났어.”
그 확답을 듣고나서야 데르킨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재차 물어보는 그 말에 은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취에서 깨어날 거야. 그때 앨리스에게 설명해주면서 같이 들어.”
“아, 알겠습니다….”
데르킨은 그제야 자신이 매우 초조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르킨, 일단은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서는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해. 너도 물론 앨리스를 두고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당연하다는 것을 묻는다는 듯 데르킨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낼 수 있는 방을 안내해 줄게. 먼저 잠이 들어 있는 에리스부터 재우고, 너도 눈 좀 붙여.”
반나절을 가까이 이곳에서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데르킨도 아내의 소식에 긴장이 탁 풀리며 피곤한 표정을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주인님. 끝나셨나요?”
“어. 남은 건 이후의 경과를 보면서 케어 할 예정이야.”
은현은 때마침 타이밍 좋게 지하 공방으로 내려온 릴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릴리, 곧바로 데르킨과 에리스가 지낼 수 있는 손님방을 안내해주겠어?”
“네.”
“나도 있을 거야.”
아니에스 또한 자신의 잔류 의사를 밝혀왔다.
“신전 일은 괜찮아?”
“뭐야. 나 한가한 거 알면서 부른 거 아니었어?”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건, 그것도 좀 그렇잖아. 그냥 사제도 아니고 베스타의 대주교인데.”
에레니아 신성국의 교황의 바로 아래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그 지위에 걸 맞는 업무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아니에스는 예외다.
다른 사제들과 비교해서 압도적인 신성의 축복을 받은 아니에스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신성국과 신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흥, 상관없어. 지금 나한테는 앨리스의 시력이 더 중요해.”
단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답하는 아니에스의 대답을 들은 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 아니에스의 방도 안내해줘.”
“네. 알겠습니다.”
릴리는 그렇게 에리스를 안고 있는 데르킨과 엘빈, 아니에스를 데리고 지하 공방을 나갔다.
“후우….”
엘레노아와 둘만이 남게 되자, 은현은 의자에 앉아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세요?”
“뭐 조금은. 엘레노아는 괜찮아?”
사고 가속까지 써가며, 오랜 시간을 집중했던 것에 대한 반동으로 어마어마한 정신의 탈력감을 맛보고 있는 은현의 물음에, 엘레노아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니에스님의 도움도 있었기 때문인지, 신성력의 소모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어요.”
성역화의 결계 유지로 수술실 내부를 모조리 정화시켜 멸균의 상태를 만들고, 앨리스의 상태를 악화되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혼자가 아니라 두 사제가 맡았기 때문인지, 엘레노아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은현은 두 눈을 감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머릿속으로 현재 자신의 곁에 없는 베르단디의 얼굴을 떠올린다.
지난달, 구미호의 독단 행동으로 인해 은현에게 크게 서운함을 느낀 베르단디는 신계로 올라갔고 지금까지 1개월을 가까이 하계로 내려오지 않았다.
“베르단디님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노곤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은현의 얼굴을 관찰한 엘레노아가 물었다.
“…맞아.”
은현은 솔직하게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베르단디가 신계로 올라가 버리면서, 여신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던 아내들에게 사정을 설명했을 때.
네 명의 여성진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네가 나빴어.
당신이 나빴어요.
…주인님이 잘못하셨어요.
현이가 잘못했어.
하나 같이 모두가 입을 모아 자신을 꾸짖었다.
은현으로서는 구미호에게 그럴 마음을 품을 의도는 추호도 없었지만,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홀릴 뻔했다는 이야기는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녀들은 베르단디가 신계로 올라가 버린 것에 깊이 공감을 했다.
뭐, 그 신수님이 지적해온 점은 확실히 네가 고쳐야 할 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네.
은현의 영혼에 부여된 여신의 가호가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것만으로도 좋은 이야기다.
이 부분을 보완하여 대비를 한다면 여신의 가호는 더욱 견고한 철옹성의 수비를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리아나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합리적인 이성과 비합리적인 감정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다른 여자는 쳐다도 보지 못하게 침대 위에서 아예 쥐어짜내버려야 하나?
일리아나에게는 반쯤 장난에 가까운 발언이었지만, 그 섬뜩한 대사에 제발 봐달라고 빌어야 했던 만큼, 은현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세요.”
“…솔직히 그래.”
은현은 혼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한번 죽음 속에서 부활하고, 함께 있게 된 자신의 여신은 단 한번도 자신에게 서운함이나 분노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가끔가다 자신을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베르단디는 연인이기 전에, 은현이 무엇을 부탁하든 기꺼이 받아 들여주며 자신의 어떤 선택이든 헌신적으로 존중해주는 훌륭한 이해자이다.
그런 베르단디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토로하고는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는 마세요.”
“…글쎄.”
걱정을 하지 말라고는 해도, 이렇게나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던 베르단디의 빈자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
“베르단디님도 당신에게 그렇게 크게 화가 나신 건 아니에요.”
서운한 감정은 남아있을지라도, 결국엔 베르단디는 화를 풀고 은현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엘레노아는 확신했다.
여신과 인간이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존재하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남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엘레노아는 베르단디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머지않아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불합리한 것으로 은현에게 말도 안 되는 화풀이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대신 돌아오시면 당신도 잘해주셔야 해요?”
“그거야 당연하지.”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으….”
나른한 몸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서서히 의식을 각성시킨 앨리스는 나른한 자신의 몸 상태를 느끼며 억지로라도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 뒤척였다.
“일어났어?”
“아….”
뒤늦게 자신의 한쪽 손을 양손으로 맞잡고 있는 익숙한 손과 익숙한 목소리.
작게 탄식하고는 소리가 들린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보?”
“그래. 나야.”
자신의 손을 맞잡고 있는 양손에 힘이 들어가자 따뜻한 온기가 손을 타고 앨리스에게 전해졌다.
이내 자신의 눈가에 붕대로 강하게 압박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앨리스는 완전히 각성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 천천히 파악해나갔다.
“수술은…잘 된 건가요?”
“그렇다고 하셨어.”
“확실히….”
20년을 가까이 시력을 잃고 맹인으로 살았던 이전과 지금의 감각은 명백히 다르다.
붕대로 강하게 압박을 받는 자신의 두 눈이 느껴졌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주 그리운 감각이 자신을 되찾아오자, 앨리스는 도리어 낯섬을 느껴야만 했다.
“눈의 감각이 느껴져요.”
“정말로?”
데르킨은 앨리스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네.”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의 대꾸에 데르킨이 급하게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곧바로 은현님을 불러올게.”
“네.”
급하게 말을 하며 강하게 움켜쥐었던 자신의 손을 놓는 데르킨의 말투에는 잔뜩 흥분이 묻어나 있었다.
데르킨이 자리를 떠나고, 방안에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앨리스 혼자가 되자, 앨리스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정말로…?”
자신의 시력은 다시 되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은 과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 정도.
그렇게 홀로 기대감을 품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끼이익
문을 열고 은현과 아니에스가 앨리스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앨리스! 눈을 떴다며!?”
우당탕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와 앨리스의 상태를 살피는 아니에스 또한 매우 흥분해 있는 상태.
앨리스는 작게 미소지으며 아니에스에게 말했다.
“아니에스님. 조금 진정하세요.”
“맞아. 수술이 끝났어도, 이제 막 깨어난 앨리스는 아직 환자야.”
“아, 그렇네. 미안.”
은현의 지적에 아니에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몸 상태가 나쁘다면 신성력으로 단숨에 회복시키는 수단도 수단이지만, 자연적인 치유 능력에 기대며 의안을 몸에 정착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은현은 그렇기에 신성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다.
“기분은 좀 어때?”
자신의 상태를 물어오는 은현의 질문에 앨리스는 답했다.
“좀 나른하네요…. 몸도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그건 아직 몸안에 마취제의 약효가 남아있어서 그래. 조금씩 호전될 거야. 그 이외에는?”
“글쎄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구나.”
은현은 앨리스가 누워있는 침대 앞의 의자에 앉아 앨리스의 맥을 짚었다.
매우 양호한 상태임을 파악하고 말을 이었다.
“이제 눈에 감긴 붕대를 풀 거야.”
기대와 긴장이 공존하는 마음으로 딱딱해진 앨리스의 입이 대답했다.
“…네.”
앨리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은현은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아니에스. 앨리스의 몸을 일으켜줘.”
“어.”
조심스레 앨리스의 상체를 일으키며 허리 부분에 베개를 끼워 넣고, 침대 머리맡에 상체를 기댈 수 있도록 부축했다.
이윽고 앨리스의 머리에 두른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붕대를 모두 풀고, 안대를 착용하지 않은 앨리스는 두 눈을 감고서 긴장한 표정으로 은현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제 눈 떠볼래?”
“네.”
앨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그녀의 두 눈은 쉽게 뜨이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주저하기를 잠시, 이윽고 파르르 떨리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두 눈꺼풀은 앨리스가 드디어 결심을 했다는 뜻이다.
“아….”
조금씩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빛을 느낀 앨리스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20년 만에 느껴보는 빛.
이제는 포기하고 살았던 시력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하기 시작하고 점차 과감하게 두 눈을 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두 눈동자는, 방안의 내부와 숨을 죽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앞의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이윽고 시선의 오른쪽 끝,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 남편.
데르킨과 시선이 마주치자, 앨리스와 데르킨은 서로를 보고 몸을 떨었다.
이내 앨리스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것은 슬픔이 아닌,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다.
결혼하고, 둘 사이의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가졌음에도,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남편의 얼굴을 이제서라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애, 앨리스….”
앨리스는 마취가 덜깨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을 뻗어 데르킨의 뺨을 정확히 어루만지며 미소지었다.
“드디어…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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