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373화 (373/730)

〈 373화 〉 373. 가족의 얼굴(1)

* * *

빠악!

“아야!”

정수리를 강타하는 구미호의 손에서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에린의 비명이 사당의 내부에 울려 퍼졌다.

“여섯 번째 여우불의 조정이 너무 약하다. 게다가 만들어내는 시간도 너무 드려. 다시.”

에린은 현재 구미호의 밑에서 신수의 힘을 다루는 수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구미호 요술의 시작과 끝은 마력으로 만들어낸 여우불이다.

이 여우불을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냐에 따라서, 신수로서 힘을 발휘하는 기량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렇기에 현재 에린이 하는 수행은 복수의 여우불을 발동시켜, 각각 다양한 형태로 만드는 훈련을 진행 중이었다.

여우불로 토끼, 다람쥐, 여우 등 다양한 동물의 형태를 만들고, 그 숫자를 점차 늘려나간다.

그 형태가 정교하고 숫자가 많을수록 에린에 가해지는 부담이 늘어나고, 에린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수행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날아오른 구미호의 촙에 에린은 울상을 지어야만 했다.

“…….”

에린은 매몰차게 이야기하는 구미호를 세차게 노려보았다.

“불만이냐?”

“아파!”

“아프면 안 맞을 정도로 빨리 성장을 하면 되지.”

“나빠! 못됐어. 진짜!”

이미 이와 같은 대화를 수차례 반복한 에린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며 내밀었다.

“흥. 불만이면 네 스승인 그 녀석에게 이야기해라.”

코웃음을 치며 몇 번이고 똑같은 대답을 돌려주는 구미호의 대꾸를 들은 에린은 지금까지와 똑같이 벌레를 씹은 표정을 지었다.

은현이 구미호를 부활시킨 첫 번째 이유는 에린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체술이나 검술, 마력의 조작이라는 부분에서는 기초란 기초는 모조리 다져놓았다.

남은 것은 꾸준한 자기 훈련과 숙달로 개인의 기량을 향상시켜나가는 것밖에 없다.

모의 대련이나 훈련을 봐주는 것으로 조언을 해줄 수는 있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요인들.

“그 녀석은 네가 신수의 후예로서 나의 요술을 모두 이어받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 기대에 조금이라도 빨리 부응하고 싶지 않은 거냐?”

그렇기에 은현은 구미호에게 에린의 구미호 요술을 모두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에린의 교육을 맡겼다.

“으….”

은현의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레 에린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이것도 못 하게 된다면, 그 녀석은 너에게 실망하겠지.”

언제나 그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왔던 에린의 마음속 자존심을 건드렸다.

“혀, 현이는 이런 거로 날 버리지 않아! 나는…현이랑 이어지기까지 했는걸!”

“흥,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나는 천 년을 가까이 살아오면서 수십 번이고 여자를 갈아치우는 쓰레기 같은 남자를 본 적도 있었다. 그 녀석도 여자는 너 이외에도 셋이나 되고, 여신까지 있지. 너만 뒤처진다면 별수 있을까?”

코웃음을 치며 확신에 찬 태도로 말하는 구미호의 발언에 에린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귀에 불어넣은 의심의 바람은 주체할 줄을 모르고 에린의 이성을 침범했다.

“아닌데…. 현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나랑 약속도 했는데….”

첫 경험을 했던 날 밤, 끝까지 자신을 사랑하겠다고 약속까지 받아놓고선 그의 말에 의심하고 있다.

이내 흔들리는 두 눈동자 속에 눈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자기 혼자서 훌쩍이기 시작했다.

“흐윽….”

‘…너무 몰아붙였나?’

구미호는 갑자기 코를 훌쩍이며 울적해진 에린의 모습을 살폈다.

에린의 마음속에 은현이라는 존재는 그만큼 커다랗다.

그에게 이쁨을 받고 싶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만큼, 은현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은현에게 극도로 의존을 하여 애정을 갈구하는 성향은 훌륭한 성장에 대한 훌륭한 동기 부여가 되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감정의 어떤 부분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것이다.

“…쯧.”

은현의 부탁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마는, 설마 자신이 이런 보모 역할을 하게 되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어쩌다가….’

하지만 은인이나 다름없는 은현의 부탁으로, 신수의 후예를 성장시키는 역할은 자신에게 있어서도 그렇게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조금 심하게 말하긴 했지만, 몰아붙였으니 이제는 당근을 줘야 할 때.

“정신 차려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 남자를 네가 꽉 붙잡고 있어야 떠나지 않을 것이 아니냐.”

“…….”

“그 여신에게서 들었느냐? 그 남자가 나의 유혹을 버텨내지 못하고 아주 잠깐 정신을 빼앗겼었다는 것을.”

“…응.”

에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구미호의 돌발행동으로 은현이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구미호에게 홀렸다는 사실은 베르단디에 의해서 아내들의 귀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에린 또한 마찬가지.

타인의 감정을 조작하여 정기를 흡수하는 ‘에너지 배수’의 능력이 있는 만큼, 에린 또한 요술을 이용해 다른 인간의 감정을 조작해보았던 적이 존재했기에, 이것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고 있었다.

“…응.”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점은, 자신의 유혹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으면서, 구미호의 유혹에는 은현이 넘어갔다는 점이다.

굉장히 아니꼽고 짜증이 난다.

그나마 한 가지 희망을 품은 점이 있다면.

“언젠가는 네 녀석도 사용할 수 있으니,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말아라.”

구미호가 은현과 베르단디를 자극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에린을 자극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심 자신의 요술로 발동시킨 유혹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알았어.”

언젠가 성장하여, 자신만의 힘으로 은현을 유혹하고 싶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운 에린은 코를 훌쩍이면서도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했다.

◆ ◆ ◆

아르키스 대미궁의 던전, 심부에 설치된 거대한 건물들을 발견한 세 가족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아르케나 대륙에 존재하는 양식과 자재들로는 지어지지 않은 대형 주택.

“엄마. 아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데, 방 안에서 곡식들이 자라고 있어요.”

데르킨과 앨리스의 손을 하나씩 맞잡으며 중간에서 걷고 있는 에리스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햇빛이 전혀 들지 않은 던전의 내부에서 대규모의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온실이라는’ 환경은 굉장히 이질적이다.

“이곳은….”

“던전이 아닌 걸까요?”

아르키스 대미궁 내부의 던전 주택을 처음 방문해본 두 부부는 혼란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입니다.”

자연스레, 이 미궁의 내부에 대한 안내는 동행한 엘빈이 맡아야 했다.

“너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거냐?”

“그야, 제 동생이 이곳에 사니까요.”

엘빈은 며칠 전, 느닷없이 헤벌쭉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왔던 에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빠! 나 드디어 해냈어! 현이의 연인이 됐다고!

당당하게 자신의 솔로 탈출과 함께 첫 경험을 밝혔던 에린의 해맑은 표정을 떠올리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피곤한 표정이 지어진다.

내심 여동생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여동생의 사랑을 응원했던 오빠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첫 경험을 밝혀왔던 에린의 철없음은 나무랄 수밖에 없었다.

축하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이제 막 성인이 된 자신의 여동생은 너무 철이 없었다.

물론 에린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경박한 사실을 해맑게 웃으며 밝힐 리는 없었지만, 평소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던 에린이 활기차진 것은 좋은 경향이다.

‘모두 그 녀석의 덕분이지.’

엘빈은 새삼 자신과 에린, 헤르샤 남매를 구원해준 은현을 생각했다.

‘그 녀석이 잘 이끌어 줘야 할 텐데.’

이제는 여동생의 연인이 되었다는 그 남자는 동시에 자신이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한 주인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품으며, 엘빈은 데르킨과 앨리스, 에리스를 안내했다.

이내 던전 주택의 입구에 다다르자, 능숙하게 초인종을 눌러 자신들의 방문 사실을 알렸다.

약 2분도 걸리지 않아서, 메이드 복을 입은 한 여성이 곧바로 입구로 마중을 나와주었다.

자신과 비슷한 형태로 은현에게 종속된 ‘악마’ 릴리였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신의 치맛자락을 쥐고는 위로 들어 올리며 격식을 차린 정중한 인사를 건넨 릴리는 네 명의 방문을 반겼다.

“주인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릴리의 안내를 받으며 네 명은 주택의 내부로 들어섰다.

신기한 방안의 내부 구조를 두리번거리며 릴리와 엘빈의 뒤를 따라 오는 한 가족을 내버려 두고, 엘빈은 릴리에게 말을 걸었다.

“에린은 어디에 있지?”

“에린은 지금 수행 중이야.”

에린의 이야기가 나오자 릴리는 미소를 지었다.

“수행?”

“응. 굉장히 의욕을 내고 있거든. 아무래도 좋은 자극이 된 것 같아서.”

“…흐음.”

미소지으며 대꾸하는 릴리의 말에 엘빈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닌 듯 보였다.

위험하거나 안 좋은 일이었다면 은현 쪽에서 자신에게 먼저 알렸을 터.

엘빈은 우선 눈앞의 엘프 정령사 부부의 안내를 우선시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잘 지내? 최근엔 얼굴을 잘 못 비춰줘서.”

가끔 보육원의 아이들에 대한 근황을 이어나가면서 일행은 이윽고 지하의 공방에 도착했다.

“오셨어요.”

문을 열고, 공방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그들을 반긴 것은 엘레노아와 은현이다.

“어서 와.”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나요?”

“너무 윗사람 대하듯이 말하지는 마.”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오늘 은현이 데르킨과 앨리스 부부를 부른 이유는 엘리스의 두 눈을 고치기 위함이다.

동료인 에레니아 신성국의 대주교.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성의 축복을 받았다는 아니에스조차도 고치 못한 앨리스에게 새로운 시력을 선물하는 것이, 두 부부와 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목적.

앨리스는 긴장한 표정을 보이기는 했지만, 굳건한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네. 은현님께 맡기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부탁을 해오는 앨리스와 데르킨 부부의 행동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보였다.

“제 눈을 고쳐주세요.”

에리스의 손을 꽉 잡은 앨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작게 떨리기 시작한다.

두 눈을 잃으면서 불편했던 적은 있었지만, 자신의 인생이 불행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종족은 틀릴지라도 언제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이 생겼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 사랑스러운 딸도 태어났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던 전쟁의 시대를 헤쳐나간 앨리스는 그에 대한 대가로 두 눈을 잃었지만, 그에 대한 보상으로 행복한 가정을 얻었다.

그렇기에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하나의 욕심은 이내 그녀의 간절한 염원으로 뒤바뀌어 갔다.

행복한 일상 속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남편과 딸의 얼굴.

정령의 힘을 빌려 두 사람의 모습을 인식할 수는 있어도, 만지고 냄새를 맡을 수는 있어도, 자신의 두 눈에 사랑스러운 가족의 얼굴을 담는 것만은 하지 못한다.

그동안은 포기하고 체념하며 살아왔지만, 그만큼 은현이 제시해준 가능성은 포기와 체념으로 꺼졌던 희망의 촛불을 다시 지피기 시작한다.

“제 두 눈으로…남편과 에리스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아저씨.”

마찬가지로 간절한 남편의 염원과 함께,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함께 부탁을 해오는 가족의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정겹다.

그 광경에 엘레노아와 릴리에게도 웃음꽃이 피게 했다.

피식 웃으며 은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귀여운 하프엘프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들의 부탁에 답했다.

“그래. 아저씨가 엄마의 눈. 꼭 낫게 해줄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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