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372화 (372/730)

〈 372화 〉 372. 서운한 마음

* * *

구미호가 제단 위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와, 기운을 방출하고 자신의 몸을 쓰다듬으며 어루만졌던 순간은 10초도 되지 않았다.

‘내가 유혹을 당했다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이 유혹을 당하여 이성을 잠식당했었다는 것을 자각한 은현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여신의 가호로 인해 두터워진 자신의 정신 방벽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불멸에 가까운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베르단디가 부여했던 가호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상태.

은현이 하계의 욕심에 흔들리지 않도록 부동의 의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가호가 방금 전에 뚫려버렸다.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대응하지도 못했다.

400년을 가까이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여신의 가호를 뚫고 들어왔던 구미호의 유혹은 은현을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는 자신의 여신이 보이는 태도다.

“뭘 하고 싶은 것이냐?”

혼란스러워하는 은현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구미호와 대치한 베르단디는 매서운 눈으로 구미호를 째려보았다.

그런 베르단디의 모습을 보고, 구미호는 속으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마치 못된 여자에게 농락을 당하려는 아들을 지키는 어머니의 모습과도 같다.

아니, 마치 자신의 남자를 빼앗으려는 도둑고양이를 처치하려는 연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신계의 규율로 하계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된 여신이 하계의 인간, 그것도 자신의 사도에게 이렇게도 헌신적인 모습을 보일 수가 있을까?

천 년을 살면서도 신계의 신이라는 존재를 직접 대면했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

‘도대체 저 남자가 무엇이기에?’

은현의 무슨 점에 이끌려, 신계의 규칙을 비틀어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 여성의 몸으로라도, 하계에 현신하여 은현의 곁에 있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구미호는 궁금해졌다.

“대답해라. 무슨 의도로 내 아이에게 수작을 부리려고 한 것이냐.”

구미호가 침묵을 고수하자, 베르단디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신계의 규칙을 비틀어 하계에 현신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베르단디의 몸은 평범한 인간 여성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초리와 기세는 여신이라는 존재에 걸맞는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력 같은 기운도 아닌, 이 공간의 분위기 자체를 휘어잡는 것 같은 압도적인 위압감.

베르단디는 지금 화를 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은현의 호의로 일리아나와 함께 자신을 부활시켜주었는데, 그 보답이랍시고 은현에게 꼬리를 치며 유혹을 하려하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부추긴 것은 구미호 자신이다.

은현을 골려줄 의도도 다분했지만, 그 이외에도 이유는 존재했다.

구미호는 베르단디의 뒤에 서서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은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남자에게 경고를 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경고라고?”

베르단디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허투루 쓸데없는 이유를 거들먹거린다면,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는 베르단디의 태도를 보고, 구미호는 설명을 이었다.

“세상에 저와 같은 존재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언제까지나 은현의 영혼 속에 걸려있는 여신의 가호가 안전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베르단디가 건 여신의 가호는 확실히 은현의 정신을 강력한 방벽으로 보호하고는 있지만, 완벽하며 만능한 것이 아니다.

설사 신이 걸어준 가호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천 년을 가까이 살아온 신수라는 자신 같은 존재가 이 하계에 굉장히 드문 것은 맞지만, 아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자신에게 가호가 뚫리게 되었으니, 한번쯤은 대비를 해둬야할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나 여신께서 저 남자에게 가호와 함께 부여한 사명을 생각한다면, 특히나 염두해두셔야 할 사안입니다.”

“…….”

베르단디는 하고 싶은 말은 굉장히 많았지만, 그것을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행위 자체는 굉장히 불순했지만, 그 행위를 통해서 보여주려던 의도는 어디까지나 언젠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지적해오는 것.

구미호가 말하는 것은 같은 하계의 인간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 공허의 저편에 존재하는 마계에 있을 악마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게다가 언젠가는 그 미숙한 것도 성장하게 되면 저처럼 저 남자를 필사적으로 유혹하겠지요.”

“에린을…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구미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은현의 물음에 담담히 대답했다.

계기와 수준은 그렇더라도, 에린은 구미호인 자신의 힘을 이어받은 신수의 후예다.

구미호의 말뜻은 언젠가 에린이 성장하게 된다면 그 끝에 도달하는 마지막 형태는 구미호 자신이다.

“적어도 그 미숙한 것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뺏기고 싶지 않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얘기였지.”

“…….”

그것은 구미호가 은현을 두고 보내는 최고의 조롱이었다.

‘에린이?’

은현은 무의식적으로 아까 구미호가 보여왔던 행동을 에린이 해준다고 머릿속의 상상을 해보았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이야.”

“아, 네. 베르단디님.”

“정신차리 거라.”

“…네.”

멋대로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베르단디가 나무라자, 은현은 황급히 머릿속의 잡생각을 지우며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지적 감사합니다. 베르단디님께서 부여해주신 가호에 대한 부분은…저도 생각을 해보도록하겠습니다.”

“그래.”

구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제단 위로 올라가기 위해 등을 돌리려 했다.

“아직 제 쪽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뭐?”

“제가 구미호님을 부활시켜드린 것에는, 처음에 구미호님께서 물어보셨던 대로,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냐?”

구미호는 뒤늦게 본래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어찌되었건 은현은 자신을 부활시켜준 은인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후계인 에린을 이끌어주고 있는 스승이며, 조금 짓궂은 장난을 통해서 경고를 해주었던 만큼 웬만하면 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말해라.”

은현에게서 두 가지의 부탁을 모두 들은 구미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첫 번째는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지만, 두 번째는…확실히 나라면 가능하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해오자, 구미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구미호는 은현의 두 가지 부탁을 승낙하며 다시 제단 위로 올라갔다.

서서히 실체화를 풀며 하나의 여우 구슬로 모습을 되돌린 구미호는 다시 자신의 힘을 회복시키기 위해 잠이 들었다.

“후우….”

드디어 대화를 마쳤다고 생각한 은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곧바로 사당을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저희도 이만 나갈…. 베르단디님?”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실체화를 풀어버리며 허공을 날아 사당을 나가는 베르단디의 뒷모습을 쫓아, 은현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왜 그러세요?”

[…….]

허공에서 앞서 날아가고 있는 베르단디는 은현에게 결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베르단디님?”

재차 베르단디를 부르자, 베르단디는 결국 몸을 돌려 은현을 돌아보았다.

[아이에게 실망했다.]

“네?”

[…….]

입을 꾹 닫으며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짓는 베르단디의 얼굴에 은현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를 깨달았다.

“아…. 죄송….”

[무엇이?]

“예?”

[무엇이 죄송하다는 것이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이 선 목소리로 되물어오는 베르단디의 말에는 서운한 감정이 잔뜩 묻어나왔다.

그 얼굴을 본 은현은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떨떠름한 빛이 스쳤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베르단디는 더욱 재촉하며 물어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냐?]

흥 하고,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베르단디의 모습에서 은현은 지금의 상황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잠식당해서….”

[그래도 이유는 알고 있구나.]

매우 곱지 않은 말투는 차라리 시비조에 가깝다.

한심하다며 한숨을 쉬면서도 단 한 번도 은현을 나무랐던 적이 없었던 베르단디는 이 순간, 처음으로 은현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신수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느냐?]

[그 정도로 신수의 외모가 매력적으로 보이더냐?]

[어떻게 그렇게 정신을 홀딱 빼앗겨버릴 수가 있는 것이냐?]

“아니, 그게….”

속사포처럼 쏟아져 오는 베르단디의 추궁에 단숨에 대역죄인이 되어버린 기분을 맛보고 있는 은현은 한마디라도 대꾸하기가 무서워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상 은현의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이 존재하기는 했었다.

설마 구미호에게 여신의 가호가 뚫려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각은 없었지만 에린의 유혹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구미호의 유혹을 경험해본 것은 은현으로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신공격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자신 또한 방심하고 있었다.

베르단디가 자신에게 걸어준 정신 방벽은 400년을 가까이 단 한 번도 뚫리지 않았던 강인한 수호로 자신의 정신을 지켜주었던 든든한 가호다.

악마들의 싸움에서도 굳건히 유지했던 가호가 이렇게 쉽게 뚫려버릴 것이라고는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현은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억울한 부분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호소하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가 된다는 것을 아내들을 통해서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단디는 은현의 생각을 읽고는 더욱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곁에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베르단디도 자신의 가호가 뚫려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자신이 내려준 가호가 은현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베르단디의 마음속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은현에 대한 서운함이다.

[그래도 아이는 저항해주기를 바랬는데….]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강제성이었다고는 해도, 은현만큼은 그것에 저항해주길 바랬던 마음은 여신으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마음이다.

[은현 고유능력]

[사고 가속]

결국, 은현은 자신의 사고를 가속시켜 재빨리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수를 쥐어 짜냈다.

“죄송합니다. 베르단디님. 제가 잘못했어요.”

[무엇이 죄송하다는 것이냐?]

“…….”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마치 쳇바퀴를 끝도 없이 굴리는 햄스터가 된 기분.

수많은 전장을 경험하면서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던 사고 가속의 판단은 이 순간, 처음으로 오답을 내놓았다.

은현은 슬며시 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환장하겠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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