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화 〉 371. 신수 부활(3)
* * *
구미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네 녀석이 벌이는 일 중에는 어떻게 된 게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구나.”
“그런 말씀은 조금 서운하네요. 이것도 신수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인데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대꾸를 해오는 표정은 그 의도를 읽을 수가 없다.
“일리아나. 에린을 좀 부탁할게.”
“알았어. 그러면….”
일리아나는 흘끗 처음 대면하는 구미호를 바라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활을 축하드려요.”
은현에게서 간단히 설명으로만 들었지만,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은 타인에게 잘 예우를 갖추지 않는 일리아나도 공손함을 취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유일하게 이 대륙 안에서 그녀가 공손한 예우를 표하는 것은 베르단디 이후로 처음이다.
일리아나의 축하도 받아들인 신수는 순순히 고마움을 표시했다.
“…나를 부활시켜 줘서 고맙다.”
양손은 쥐었다 폈다가를 반복하고, 여우 귀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들, 코를 타고 들어와 전신으로 퍼지는 청량한 공기들.
죽은 이후로 사념만 남았던 그녀가 다시는 맡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던 감각들은 구미호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럼 저희는 이만.”
여우 구슬의 제작이 끝나자마자, 일리아나는 에린을 데리고 텔레포트을 이용해 집안으로 복귀했다.
사당 안에는 은현과 구미호, 둘만이 남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구미호였다.
“나를 왜 부활시켰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네 녀석의 의도를 모르겠다.”
구미호에게 은현은 자신을 부활시켜준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계의 기색을 풀지 않았다.
“내가 곧바로 이곳을 뛰쳐나가, 나의 원수인 오르타스가 세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냐?”
구미호는 사나운 기운을 방출하며 사당의 내부를 장악했다.
꾸준한 자기 수행과 단련을 통해서 눈에 띄게 상승한 에린의 마력과, 은현의 신력으로 제작된 새로운 여우 구슬은 막대한 기운을 보유하고 있다.
그 수준을 가늠해보았을 때, 구미호의 현재 힘은 이전 에린의 몸을 빼앗아 은현과 처음 전투를 치렀을 때보다 한층 더 강하다.
하지만 2년 전의 그때보다 자신이 본래의 힘을 조금씩 되찾아가며 더욱 강해졌듯이, 은현 또한 마찬가지인 상황.
예전이었다면 곧바로 이곳을 뛰쳐나가 미쳐 날뛰었을 테지만, 지금의 구미호는 그 선택이 매우 아둔한 선택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실 겁니까?”
“…….”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걸어오는 은현의 태도에 구미호는 짜증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너는 전력으로 나를 막아오겠지.”
은현과의 싸움은 은현 개인의 싸움만을 고려해서는 아니 된다.
이미 에린의 마음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들은 구미호는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적대한다는 의미.
그저 왕국의 백성들과 기사들, 마법사들이라면 해봄 직하겠지만, 은현의 주위 사람들은 만만치가 않다.
거기에는 대륙에 열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여덟 자릿수 대마법사 중 하나.
차기 성녀 후보, 악마.
게다가 더욱 입장이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의 힘을 이어받았으면서 은현과 특별한 관계로 발전한 에린이다.
‘짜증 나는 놈.’
은현은 자신이 부활하자마자 이곳을 뛰쳐나가 멋대로 날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자신을 부활시켰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한다는 은현의 사고방식이, 자신의 연인이 된 에린과 구미호의 관계성까지 엮어 구미호의 행동을 제한하고, 유도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이윽고 구미호는 머릿속으로 이전에 은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최선을 다해 오르타스에게 엿을 먹일 수 있는 상황을 준비해드리도록 하죠.
구미호는 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게 그때의 그 약속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인상을 찡그린 구미호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자신을 부활시켜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배신한 오르타스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들이 국가의 중심에서 커다란 부와 권력을 누리며 잘살고 있는 것을 구미호는 두고 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설마요.”
은현은 당연히 아니라는 듯이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신수님. 아니, 미호님을 부활시킨 것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지. 이것으로 약속을 지켰다고 우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것은 페르니아스 왕국을 건국한 초대 국왕 오르타스에게 배신당했던 신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다.
“준비라….”
구미호는 은현이 이야기한 ‘준비 단계’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생각을 잠겼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미호님과 대화를 나누며 꼭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미호님이 바라는 것은 정말로 페르니아스 왕국과 그 나라의 왕족들 전원의 죽음입니까?”
“…….”
구미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은현이 그것을 물어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자신의 사람 측에 속해있는 유리아 왕녀나, 그녀의 어머니, 남동생은 구미호의 복수의 대상인 왕족의 피를 이은 이들.
많은 사람과 엮여있는 그 인간관계를 구미호도 알고 있으므로 그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르타스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던 2년 전의 자신은 복수의 대상을 이 나라의 왕족을 포함한 백성들 전체를 불태워 죽이며 스스로 죽는 동귀어진을 각오했었다.
그것이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한 화풀이라고 할지라도, 여우 구슬을 빼앗기면서 자신의 천 년의 시간을 함께 빼앗긴 구미호는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택한 선택이다.
하지만 지금의 구미호는 다르다.
에린의 몸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배신을 당한 경험으로, 땅속에 자신의 유해를 묻어 시체마저 능욕당하고 활용당하는 것에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 것에, 끝도 없이 쌓여갔던 증오와 분노는 점차 희석되어갔다.
사념체로 지내면서, 몇백 년을 가까이 끝을 모르고 커져만 갔던 감정이 단 2년 만에 사그라진 것이다.
‘어이가 없군.’
그것은 구미호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분노는 너무나도 쉽게 사그라졌다.
홀로 수백 년의 시간을 사념체로 지내야 했던 구미호의 마음속 분노와 증오를 사그라들게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에린이라는 것을 구미호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구미호는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해보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감사합니다.”
이 자리에서 단호하게 페르니아스 왕국 백성과 왕족의 피를 이은 이들 전부를 불태워 죽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은현은 구미호의 판단에 감사히 여겼다.
“흥. 이미 어느 정도 나의 상황을 옭아매고 유도하려 했던 주제에.”
마치 자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었던 것인 양 말하는 은현의 태도는 구미호에게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거나 은현은 자신을 부활시켜준 은인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볼까. 원하는 게 뭐냐.”
구미호는 굳이 자신이 정착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제작하는 수고를 들이며 자신을 부활시킨 이유에는 무언가 속셈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에린의 몸속에서 보아온 은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호의를 베푸는 남자가 아니었다.
에린이나 아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는 것은 물론,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서 행동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 사고방식 속에서도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남자가 은현이다.
“역시 신수님. 이야기가 굉장히 빠르네요.”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군.”
“칭찬입니다.”
은현이 자신의 몸을 부활시킨 은인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에린과 자신의 관계성이나 다양한 부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행동을 옭아매 통제하려는 그의 의도는 심히 괘씸했다.
이내 머릿속으로 한 가지 괜찮은 생각을 떠올렸다.
‘조금은 골려줘 볼까?’
제단 위의 계단을 내려와 천천히 은현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 내 몸이 목적인 것이냐?”
“…예?”
뜬금없는 구미호의 질문에 은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당당한 태도를 보이던 구미호는 이내 은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고, 새로운 여우 구슬에 정착한 자신의 기운을 해방했다.
우우웅
“……!”
그 기운을 느끼며 은현은 얼굴을 굳혔다.
자신의 전신을 휘감는 구미호의 기운이 범상치가 않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등을 붙잡는 구미호의 행동에 당황했다.
“시, 신수님?”
“많은 인간 남성들이 나의 몸을 보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지.”
그 손은 너무나도 따뜻하면서도 굉장히 야릇하다.
피부를 타고, 몸속으로 침투해오는 이상야릇한 감각에 은현은 당황했다.
‘이건….’
이야기로만 들었지, 접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사실상 처음은 아니지만, 은현은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린이 은현에 대한 마음을 품으며 자신의 힘을 조금씩 키워나갈 때, 신수의 힘을 이용하여 은현을 유혹해보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것이 베르단디가 은현에게 부여한 여신의 가호로 형성된 정신 방벽에 가로막혀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현은 에린이 사용한 ‘유혹’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벗어나야 해.’
하지만 지금 구미호가 사용하고 있는 유혹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무려 여신의 가호를 뚫고 들어올 정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딱딱한 돌처럼 굳어진 양다리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 형태가 없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몸 안의 무언가를 간질이며 이성을 침식해 온다.
사람을 홀리고, 그 사람에게서 ‘에너지 드레인’을 통해 정기를 흡수하기 위해 대상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특수한 기운.
많은 인간이 한번 접하면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버린 기운은 실로 기묘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서, 계속 접하고 싶다고 바라게 된다.
“너도 결국에는 나의 이 실체를 탐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냐?”
은현의 손등을 접한 구미호의 손가락은 그의 팔, 어깨를 타고 점차 위로 올라왔다.
어깨의 옷감을 쓰다듬던 요염한 손놀림은 이내 그의 쇄골의 맨살을 어루만지며 그의 뺨에 도착했다.
호흡은 멈추고 바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 두 눈동자는 정면의 구미호를 바라보고 있지 않으며 흐릿하다.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구미호가 조용히 은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려던 순간.
“멈춰라.”
“…….”
구미호의 팔을 붙잡아 제지하는 누군가의 행동 때문에, 아주 미세한 차이를 두고 두 입술이 겹쳐지지 않았다.
“…베르단디님?”
갑작스레 실체화하여 은현과 구미호의 사이를 가로막는 베르단디의 난입은 멍해져 있던 은현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주 짧은 순간, 구미호의 유혹에 자신의 이성이 잠식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아….”
은현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떨며 옆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인간 여성에 불과한 신체로 실체화한 여신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기를 띤 얼굴로 구미호를 노려보고 있다.
* * *